분노를 마음에 품고 살고 있진 않습니까?
TV를 보면 주로 보게 되는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자동차 블랙박스 영상을 보여주며 교통사고가 발생하게 되는 원인과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분석해 보는 프로그램 입니다. 도로 위에서 발생하는 사고들은 몇 가지 패턴이 있는데, 그 중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보복운전’입니다. 요즘 대부분의 자동차는 블랙박스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예전에는 차량을 구매 이후에 애프터마켓에서 이것을 설치했는데, 요즘에는 자동차 기본 옵션에 포함될 만큼 블랙박스가 없는 차량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는 나의 앞 차와 뒷 차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사고 전후로 모두 녹화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복운전은 이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주요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도로 위에서 저지르는 상당히 큰 범죄 행위에 해당할 뿐 아니라, 자신의 잘못이, 자신의 차는 차치하더라도 앞차, 혹은 뒷차에 의해 녹화될 것이 뻔함에도 왜 이러한 행위를 저지르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상대방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의 분노가 자신의 모든 이성을 앞질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무시당한다고 생각될 때, 혹은 누군가로 인해 자신이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할 때,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변에 자신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는 ’블랙박스‘가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마주하기 싫은 대가가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보복 행위를 멈추는 데 까지 작용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의 모든 행위를 감찰하는 하나님이라는 블랙박스가 항상 내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감정’은 때때로 말씀이라는 담장을 넘어 지극히 어둡고 서늘한 곳으로 우리를 밀어넣어 어리석은 행동을 낳게 합니다.
아담의 두 아들 중 가인과 아벨은 이러한 분노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치는지 잘 보여줍니다. 가인과 아벨은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나,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형인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수 많은 살인이 등장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주로 가장 많은 살인이 발생하는 것은 국가간 전쟁입니다. 전쟁에는 지리적 다툼, 정치적 충돌, 혹은 신념의 대치와 같은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는 분명한 요인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둘은 한 부모를 가진 형제입니다. 이권 다툼이 있을리 없고, 서로를 향한 적개심은 커녕, 앞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함께 간구해 가야할 가장 가까운 핏줄이었음에도 가인은 왜 아벨을 죽이는 선택을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제사가 거절된 것에 대한 마음속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것에 대한 극단적 결과가 결국 살인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동생의 제사가 받아들여 진 것이 마치 자신을 향한 대적이자 공격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화‘라는 한자어는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근히 화를 생각할 때, 그 성격 때문에 한자로 ’불 화’자를 생각하지만, 사실 ‘화’는 한자로 없습니다. 대신 ‘종 노’자 아래에 ‘마음 심‘자를 합친 ‘화낼 노’라는 한자가 있습니다. 즉, 마음의 주인이 내가 되지 못하고 내가 마음에 종노릇 하게 되었을 때, ’노가 났다’, 즉 ‘화가 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분노는 나를 지켜보고 있는 블랙박스의 존재를 잊게 합니다. 더 나아가 나와 가장 가까운 형제나 이웃을 대적으로 삼아 그들의 실패와 고통을 기쁨으로 삼는 원수가 되게 합니다.
분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감정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가진 귀중한 자산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불의한 것에 대해 진노하시며, 예수님께서도 성전이 장사치들의 소굴이 된 것을 보고 분노하셨습니다. 즉, 분노는 불의한 것에 대해 일어나는 불같은 마음이며, 이것이 말씀 안에서 성취될 때, 우리는 감정에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주인으로서 필요에 따라 절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음에 화를 품을 때, 우리는 화 그 자체보다는 그것의 방향성에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모세는 자신의 인생에서 두 번의 잘못된 분노를 보였습니다. 첫번째는 그가 젊었을 때, 에굽에서 자신의 민족인 히브리인을 핍박하는 에굽 사람을 쳐 죽인 일입니다. 젊은 시절의 모세는 혈기가 왕성하고 힘이 셌으며, 왕자라는 특별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민족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많았습니다. 성경은 당시 일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출 2:11-12). 그는 사람을 쳐 죽이는 일이 잘못된 행위임을 알고 그 일을 행하기 전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마치 그 일에서는 하나님이 그를 지켜보지 않는 것처럼 그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 일에서 모세는 자신의 동족에 대한 사랑은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은 없었습니다. 이튿날 모세는 자신의 동족인 히브리사람들이 다투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들을 말립니다. 그러자 그들이 모세에게 자신들도 쳐 죽일 것이냐며 조롱과 협박이 담긴 말을 뱉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행위가 자신의 민족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될 것이라 여겼으나, 오히려 그것이 동족에 의해 자신의 발목이 잡히는 덫이 되어 버렸습니다. 민족을 구하고자 하는 선의에 사로잡혀 말씀을 벗어나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이처럼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종종 분노에 찬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을 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민족성에 대한 신념을 보여주기 위해 모세처럼 하나님의 낯을 피해 누군가를 향해 주먹을 드는 것 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말씀에 대한 신념을 보여주기 위해 누군가를 향해 독설과 공격을 일삼는 자들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공개적으로 단상에 세워 비판하고, 다른 종교나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영적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핍박을 일삼는 것입니다. 바울 시대에는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로마는 황제를 우상화하며 태양신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이러한 로마에게 세를 바치는 것을 마치 우상을 섬기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일에 대해 예수님과 바울은 매우 명료한 메세지를 주었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 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 13:7) 현상을 보고 우리의 적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모세는 자신의 동족을 고통스럽게 하는 에굽과 그 백성들을 대적했고, 유대인들 역시 자신들을 지배하며 괴롭게 하는 로마를 대적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한 계획 안에서 이스라엘을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를 박해하는 세상의 정치나 비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직접적인 대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들에게 선을 행함으로 그들 머리 위에 숯불을 쌓으라고 말합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주권이 하나님의 계획과 판단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불의에 대한 분노를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폭력적인 행동으로 표출했고, 결국 그는 에굽에서 도망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자로 살아가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자에서 아무런 이름도 없는 광야의 목자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가 다시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때, 사람을 죽였던 그의 손에는 목자와 나약함을 상징하는 하나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즉, 40년이라는 시간동안 하나님은 모세의 혈기를 통제하여 이스라엘의 참 된 지도자로 가다듬어 갔습니다.
이 후, 모세는 변화되어 자신의 혈기대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민수기 12장은 그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한 때, 사람을 주먹으로 쳐서 죽인 사람이 이제는 세상의 모든 사람의 온유함보다 더 큰 온유함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두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는 감정적 연약함과 실수를 전혀 새로운 것으로 바꾸고 가듬어 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둘째는 분노를 품은 상태에서는 결코 하나님의 그릇으로 세워질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뒤, 므리바에서 두번째 잘못된 분노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물을 달라고 요구하는 백성들을 향한 원망과 육신의 피로로 인해 바위를 지팡이로 두 번 쳐서 물을 낸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들에게 물을 낸 것 같이 보이지만, 모세의 중심에는 이 백성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섞여 있었고, 그 행위에 자신의 감정을 담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행위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말씀대로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행위에 우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제사보다는 순종이 낫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종보다 더 나은 것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모세는 지칠대로 지쳤습니다. 감정적으로 충분히 격양되고 지속적으로 불만을 말하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분노의 감정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데 방해가 된다면, 우리가 말씀대로 행한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두 번의 분노로 땅을 잃었지만, 예수님은 억울한 분노를 당하시고도 침묵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가나안을 열어 주셨습니다. 모세는 분노로 아무런 죄가 없는 바위를 세게 두 번 때렸지만, 아무런 죄가 없는 예수님은 수 없이 맞으셨습니다. 모세는 분노로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온유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혹시 우리 마음 속에 보이지 않는 분노로 중심을 잃은 껍데기만 남은 순종이 있다면, 언제나 블랙박스처럼 우리의 삶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중심을 다잡고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그 부족함을 돌이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실 것이며, 감정의 종에서 감정의 주인으로 우리를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