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가 없는 농사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디모데를 자신의 아들로 부르는 모습을 봅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친 아들이 아닙니다. 사실 바울은 여러 말씀을 토대로 추정해 볼 때,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므로, 자녀가 있을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디모데를 자신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은 디모데가 자신의 전도로 믿음에 이르었기 때문입니다. 즉, 디모데는 바울이 복음으로 낳아 사명으로 키운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당시 교회의 리더에는 적합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어렸고, 성격이 조심스러웠을 뿐 아니라, 자주 병약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을 읽겠습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1).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복음 전도자의 모습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나,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가장 거리가 먼 곳에서, 가장 늦게 부름 받은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가 학군단 생활을 할 때, 모든 동기들보다 가장 수고하고 노력하며 항상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기억에 남는 동기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학군단 합격자 발표에서는 불합격이었는데, 합격된 후보생 중 한명이 포기하여 추가 합격이 되었습니다. 그는 학군단 생활 동안 항상 겸손하고, 누구보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모든 동기들에게 끝까지 존경과 인정을 받는 훌륭한 후보생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제자들 중 이런 모습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그 부르심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구보다 깊게 경험했으며, 그것은 더 나아가 그가 앞으로 그의 사역 도중,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디모데의 겉모습을 보고 그를 판단하며 업신여긴다 하더라도 바울만큼은 믿음 안에서 디모데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큰 일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일평생을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를 핍박했던 자신이 완전히 다른 길로 돌아서 더 많은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자가 되었던 것 처럼, 어쩌면 그는 디모데를 통해 그의 약함과 부족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강하게 거듭나는 역사를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이처럼 누군가를 관용하고 더 나아가 용서하는 일은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관용받고 용서받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3년이라는 시간동안 제자들과 함께한 것은 그들이 삶에서 당하는 수 많은 일들을 입으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참 된 복음의 DNA를 심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성경은 누가 썼습니까? 모두 사람이 썼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과 그의 자비와 은혜를 경험한 자들이 마음에 감동을 받아 그의 뜻대로 이 성경을 기록한 것입니다. 한 때 부족하고 죄인이었던 자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능력을 받아 새 사람이 되어 거듭나는 이야기는 수천년간 이어졌고, 이제 이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 안에서 굳건하게 서는 자로서 세 직업을 비유로 듭니다. 이 직업 비유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해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3-4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3-4)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을 잘 표현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삶에서도 자기부인을 경험합니다. 부모가 그렇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힘든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지금이 바로 겨울방학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견디면 드디어 고대하던 개학이 찾아옵니다. 왜 부모들은 주말이나 방학이 힘들까요? 자녀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대폭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녀가 싫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자녀들이 없었다면 자기만을 위한 시간이 자녀와 함께 있으면 자녀를 위한 시간으로 완전히 탈바꿈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참으로 귀한 마음인 것이지요. 부부가 함께 먹는 식탁 메뉴는 어른용에서 아이용으로 바뀝니다. 드라마를 보거나 책을 읽는 시간은 아이를 공부시키거나 아이와 함께 노는 시간이 됩니다. 물론 모든 시간을 아이만을 위해 쏟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자신의 시간을 아이 중심의 시간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부인 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기부인을 경험하는 직업으로 군인을 언급하는데, 그들도 부모처럼 자기부인을 강력하게 경험합니다. 군대에 가서 가장 먼저 해야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머리를 비우고 생각을 안하는 것입니다. 제가 소초에 소대장으로 부임했을 때, 우연히 복도에 뜯겨 열려 있는 박스 하나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누가봐도 쓰레기 였습니다. 언제, 누가 복도 한 가운데 둔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박스 쓰레기를 모든 병사들이 불편하게 비껴 지나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박스를 치우려다 아무도 치우는 사람 없이 그 박스를 비껴 다니는 것이 신기해서 하룻동안 치우지 않아 봤습니다. 다음날 놀랍게도 그 불편한 박스는 복도 중앙에 있었습니다. 병사들이 게을러서 그 박스를 치우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자신들이 볼 때도 쓰레기 같았지만, 자신의 상급자가 그것을 쓰레기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그들의 행동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생각과 판단보다 상급자의 의도가 더 중요한 곳이 바로 군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자기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한 시간보다 언제나 하나님을 위한 시간이 우선되고, 나의 생각과 판단보다 하나님의 의도가 더 먼저여야 합니다.
5절 읽겠습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5).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경기는 무엇일까요? 그가 로마서에서 하늘의 상급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경주로 빗댄 것을 토대로 볼 때, 이 경기는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이라는 언급을 통해 그 경기에 존재하는 규칙이 있으며,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승리자의 관을 얻을 것이라 말합니다. 즉, 이는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일이 있어도 하늘에서 상급을 받지 못하는 수고가 있을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제 동계 올림픽이 시작되었습니다. 매스컴을 통해 선수들이 출국하며 인사하는 모습과 개회식에서 입장하는 모습이 중계되었습니다. 얼마 뒤면, 각 나라에서 모인 모든 선수들이 자신의 종목에서 능력을 겨루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경기는 모두 승리자의 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모든 선수들은 이 관을 목표로 앞서 언급 된 모든 과정들을 거쳐갈 뿐 아니라, 매스컴에서는 다루지 못하는 수년간의 그들의 피나는 수고와 노력 또한 그 과정에 포함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경기에서의 법은 바로 이러한 보이지 않는 모든 과정을 의미합니다. 군사분계선 넘어로 어렴풋이 보이는 높은 북한의 건물들은 밤이 되어도 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관측 장비를 써서 건물을 확대 해 보면 건물 유리창 뒤로 건물 내부가 아니라, 건물 뒤 풍경이 그대로 보여집니다. 이 건물은 앞에서 볼 때만 멀쩡한 높은 건물처럼 보일 뿐, 옆에서 보면 무대 장치처럼 세워진 넓은 벽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멀리서 그것을 사람들이 사는 건축물로 여기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그 누구도 살 수 없는 장식품일 뿐입니다. 이처럼 멀리서 보면 그리스도인이지만, 가까이 와서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멀리서 보면 교회이지만, 가까이 와서 살펴보면 교회가 아닌 곳이 있습니다. 입술에는 항상 하나님이 있으나, 정작 행위에는 하나님이 없는 사람, 교회에서는 예배자로 서지만, 정작 삶에서는 죄인의 무리에 드는 사람. 이런 사람은 겉보기에 경기하는 자로서 경기장에 들어와 선수들처럼 행동하지만, 결승선에서는 경기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실격 처리를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입으로는 복음을 말하지만, 정작 그 의도는 교회를 더 크게 만들고자 하는 성과에 집착하는 교회, 진리와 율법은 말하지만, 정작 그 안에 사랑을 담지 못하는 교회, 그리고 부활의 복음은 이야기 하지만, 정작 그 부활을 위해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는 가르치지 못하는 교회. 이런 교회를 위한 승리자의 관은 없습니다.
마지막 6절 읽겠습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6) 우리는 성경에서 농부 비유를 자주 봅니다. 농사는 참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작은 씨앗이 전혀 다른 존재로 비교할 수 없는 큰 결실을 맺을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뿌리는 농부의 모습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봄에 시골에 가면 넓은 들판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눈에는 빈 땅이지만, 그 곳에 씨앗을 뿌린 농부의 눈에는 완전히 자라 그 자리를 가득 매우게 될 작물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언급한 ‘수고하는 농부’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어 보이더라도 믿음의 눈으로 그것이 낳게 될 수백, 수천배의 결실을 보며 누구보다 노력하는 전도자를 의미합니다. 농부는 때로는 게으를 수 있습니다. 농사는 기상의 변수로 인해 언제든 실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절대 실패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복음은 실패가 없는 농사입니다. 우리가 뿌리기만 하면, 이 것을 하나님께서 자라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게으른 농부는 있을 수 있어도, 결코 게으른 전도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이러한 믿음의 관점을 가지고 그 누구보다 노력하는 전도자가 되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처럼 수고하는 농부는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곡식은 무엇입니까? 모두 다 자라서 추수해 얻는 것입니다. 노력하는 전도자가 얻는 놀라운 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수고해서 믿음으로 씨앗을 뿌리는 자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 처럼, 수고해서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말씀의 복을 먼저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것은 마치 나 자신을 말씀으로 채우는 일과 동일합니다. 마치 다른 누군가를 제자삼기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제자 삼아 준 것처럼, 다른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 처럼, 마찬가지로 다른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복의 선순환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도록 항상 수고하는 농부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좋은 병사’, ‘경기하는 자’ 그리고 ‘수고하는 농부’를 통해 참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역시 우리가 맡은 전도자의 직책을 기억하며 좋은 병사의 자기부인, 경기하는 자의 진실됨, 그리고 수고하는 농부의 믿음을 본받아 참된 그리스도인들로 거듭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