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영성
신앙생활을 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레 훈련되는 영성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기다림의 영성이다. 어릴 적 하나님을 시험하며 길을 가다 넘어지게 하면 믿겠습니다, 혹은 저 산이 바다로 가게 해주세요, 하며 기도했던 경험이 있다. 넘어지지도 않았고, 산도 여전히 잘 있다. ‘역시 하나님은 없어’하며 교회를 떠날까 생각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 끝까지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나에게 있었던 것 같다.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는 주님과의 교제가 일시적이고 즉각적인 현상주의적 관계였다. 그래서 판단이 빠르고, 누구보다 의롭고, 신앙생활에 대한 열정이 어떤 면에서는 넘쳤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 모습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지금은 마치 주님과 나의 시간이 멈춰 있는 것처럼 아주 느리게 지나가는 것 같다. 말씀을 판단하는 데도 느리고, 사람을 판단하는 데도 그렇고,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는 데도 그렇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잘 모르겠는 부분이 있다. 이렇게 저렇게 이해해 보려고 해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몰라서, 이해를 못해서 오히려 좋다. 주님이 보다 커 보이고, 내가 아직 낮은 자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늘 기다림의 연속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시 139:16) 다윗의 고백처럼 우리의 모든 삶의 일은 주님의 책에 낱낱이 기록이 되어 있다. 그분은 우리를 계획하실 때, 우리의 머릿 털의 개수까지 헤아리고 계셨다(마 10:30). 그래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정한 계획표 안에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날을 매 순간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정적인 활동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할 순간을 바로 깨닫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위해 항상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열 처녀 중 다섯은 등과 기름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지만, 다섯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등만 들고 신랑을 기다린다. 신랑이 예상했던 것보다 늦게 오자, 신랑을 기다리던 열 처녀는 잠에 들게 된다. 신랑이 왔을 때,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혼인 잔치에 결국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열 처녀는 모두 신랑을 기다렸지만, 정적으로 기다린 다섯 처녀는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기다리던 다섯 처녀는 잔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물론 모세가 홍해 바다 앞에서 하나님의 큰 구원을 이루기 위해 모든 행동을 멈추고 기다려야 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이때 조차도 이러한 기다림은 정적인 활동은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원수가 칼을 들이미는 순간에 그 자리를 지키는 행위야 말로 가장 확실한 믿음의 행위요, 구원의 확신을 보여주는 적극적인 행동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자신의 모든 과거를 회상하며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오버랩시켰던 것처럼, 적극적으로 그분의 구원하심을 갈구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이야 말로 부르심의 때에 그것을 깨닫고 지체 없는 순종을 행할 수 있다.
우리가 그 부르심의 때를 잘 준비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러한 기다림(참을성)의 영성은 그 입술을 통해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하고 십자가에 달리지 않을 기회가 있었다. 빌라도 앞에서.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부당한 죽음을 앞두고도, 수많은 고발 앞에서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오직 유대인의 왕이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말씀만 하셨다. 십자가의 고난이 육신을 돌이키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지만, 그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어려운 기다림의 시간들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에게, 그리고 다른 대적들에게 결코 입술의 저주를 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의 반역으로 도망하는 가운데 그를 저주하는 시므이를 만났을 때, 그 저주를 그대로 두었다. 그 이유는 그 저주를 그대로 두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선으로 갚아주실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삼하 16:12). 다윗에게는 하나님께서 내리는 것은 저주까지 축복이었다.
2002년 월드컵 영상을 종종 방영해 줄 때가 있다. 그중 가장 화제는 단연 이탈리아 전이다. 거의 졌던 경기를 후반 마지막에, 그리고 연장 마지막 시간에 골을 넣어서 이겼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경기가 방영되면 채널을 도저히 돌릴 수가 없다. 그 당시에는 조마조마했지만, 지금은 행복한 기억만이 있다. 승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경기를 뛰고 있는 선수와 같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미 승리한 결과를 향해 가고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다윗처럼, 예수님처럼 항상 축복의 말을 하며 승리의 순간을 미리 즐길 수 있다. 물질을 쉽게 여기는 것은 하늘에 상급이 있기 때문이며, 생명을 내줄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모든 실패를 달게 여기는 것은 결국 변하지 않는 영원한 승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예배를(8월 9일) 드리고 3달 만에 예배를 다시 드린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여기까지 오는 데 우리의 마음은 어떠했는가.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간이 감히 경험하기 어려운 기적을 수 없이 보았고, 성경에서 일어난 가장 큰 기적 중 하나인 홍해 사건을 경험했던 자들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불만과 불신으로 바꾸는 데 그들은 세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가나안 땅을 정탐할 때도 그들은 자신들을 메뚜기에 비유하며 원망을 쏟아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그들의 중심은 언어로 드러났고,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길에 서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그분의 능력을 보지 못한 세대, 곧 구약의 마지막과 신약의 시작 사이의 침묵 기라 불리는 약 400년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과 그 신실하심을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다. 바로 안 나와 시므온이다. 특히 시므온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한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눅 2:25)
성령이 언제부터 인간에게 임했는가, 를 두고는 적지 않은 논쟁이 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사람을 세울 때, 성령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보편적으로 인간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것이다. 시므온에게 임한 성령은 하나님의 오랜 침묵을 깨는 그 시작점이 되었고, 그 동기는 바로 그의 거룩한 기다림에서 시작되었다.
긴 터널의 끝에서 빛을 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빛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