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처럼 화해하고 아이처럼 용서할수 있다면
고후 5:17-21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어린 아이들이 주변 사람들과 쉽게 잘 어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화해의 능력에 있다고 본다.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 가장 많이 보는 관계의 불화는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장난감을 가지고, 밥먹는 자리를 가지고, 엄마 옆에 눕겠다고 싸운다. 그러나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다툼이 다음날까지 이어지는 일은 없다.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화해하고 다시 웃는다. 그러나 어른들은 다르다. 일주일, 혹은 한 달에 한 번 다툼을 겪을 만큼 빈도는 적지만, 원만한 화해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다툼의 횟수가 아니라, 화해의 속도다. 화해를 빨리 하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은 무엇인가? 그 것은 상대를 용서하는 관용이다. 어린 아이들은 다투고 난 뒤, 미안하다는 말을 쉽게 건네고, 상대방도 괜찮다며 그 용서를 받아준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그 용서를 거절하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은 그렇게 마음이 낮은 곳에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화목제를 드리게 하셨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분쟁을 없애고 관계를 온전하게 하는 제사이다. 제사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반드시 희생제물을 드려야 한다.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은 모세에게 죄를 범한 백성들을 완전히 멸하고 모세를 통해 큰 나라를 이루겠다는 하나님을 가로막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사이에서 그들의 죄를 용서받게 했던 모세가 바로 화목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켜 죄를 없는 것 처럼 만들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제이다. 오늘날 다른 보혜사, 곧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대언자가 되어 주시는 것 역시 화목제와 다르지 않다. 인간이 처음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다시 화목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를 계획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없애고 완전한 새로운 계획을 실행하지 않고, 인간의 죄를 해결하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방법을 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하게 지내길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미안하다고 말하는 우리에게 ‘괜찮아’라고 말하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어떤 잘못이든, 잘못의 횟수가 많든 적든, 이미 용서할 준비를 마치셨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방에게 고백하는 것에 있는 것 처럼, 올바른 신앙생활, 곧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회계, 곧 우리의 죄를 그 분 앞에 고백하는 데 있다.
죄를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고, 사람들을 가르칠 때,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인데, 형제에게 노하거나 나쁜 말을 하는 것으로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말씀처럼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혹은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 살인과 동일하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계명을 지킨 청년에게 가진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그런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청년이 절대 내려놓을 수 없는 중심을 지적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병자, 곧 죄인으로 부르셨고, 예수님은 우리의 의원, 곧 구원자가 되셨다. 그래서 요한의 말처럼 우리가 만약 죄가 없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또 다른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요일 1:10). 죄를 고백하지 못하는 두번째 이유는 나 자신, 곧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자신의 모든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다. 가슴에 자신의 이름표를 달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표를 달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은 스스로 미혹되어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나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 ‘내가 그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그렇게 자신을 높이며 다른 자들, 그리고 하나님을 낮춘다. 그렇게 하루하루 회개가 멀어지고 사라져 간다. 세상이 떼 놓을 수 없는 축복의 관계인 부부가 이혼을 한다. 이혼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사실 서로 화목하지 않은 데 있다. 반드시 큰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배우자가 치약을 중간부터 짜는 일이 시작이 될 수 있다. 옷을 벗을 때 뒤집어서 벗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아침에 인사하지 않고 출근한 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고한 사람들은 이런 작은 일 하나를 용납할 마음을 품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과 화목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높아진 마음으로 다른 자들을 낮추고 있는데 있다. 이러한 마음을 품고 예배를 드리는 일은 아무런 제사의 준비도 하지 않고 제단에 들어온 자들과 다르지 않다.
회개하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크게 만드는 일이다. 그렇게 자신을 낮춘 자가 화목한 직책을 가지고 이웃에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대상이 이웃이 아니라 원수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기억하며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 겸손함이 우리가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고 오른뺨을 치면 왼편을 돌려 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도 주며,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면 십 리를 동행하도록 만든다(마 5:38-41). 그래서 우리가 화목하게 할 능력인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주도록 돕는 대상은 우리의 원수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곧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와 화목하게 된 것이 우리 마음의 큰 빚이 된 것처럼, 우리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은 우리의 원수에게 우리가 받은 그 용서를 베풀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용서를 받는 것 만큼 기쁜일도 없으며, 용서를 비는 일 만큼 자신을 낮춰야 할 일도 없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요일 2:9-11). 원수가 다가온다면 피하지 말고, 내가 받은 용서의 값이 얼마인지 증명할 기회로 삼는 겸손한 자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