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신앙, 진정한 그리스도인
너희도 알거니와 (살전 2:1-12)
사도 바울은 가장 많은 성경을 쓴 저자이기도 하지만, 가장 확신에 찬 말투를 가진 제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울의 말에는 늘 힘이 있고 신뢰가 간다. 그는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와 같은 말을 자주 한다. 겉보기에는 자기 확신으로 교만한 모습처럼 보일 수 있으나,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삶이 복음에 그만큼 치열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삶으로 복음이 바꾼 삶을 친히 보여주며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그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고, 오늘날 성경을 읽는 우리도 그의 표현에 감동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에 소극적이거나, 불확실한 말투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바울처럼 치열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찾고 있다. 그들은 확신에 차지 않은, 어색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갖춘 자들을 보며 실망하고 교회와 멀어진다. 그러나 삶이 바뀐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만날 때, 그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경이로움에 사로잡힌다.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이 진짜 있나 보다!’.
어렸을 적 봤던 드라마에서 무좀약을 팔던 아저씨가 버스에서 무좀약을 팔았다. 능숙한 말투와 언변으로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얻고 있을 때, 한 손님이 말한다. “아저씨 발에 무좀이 없으면 내가 그 약 10개 살게요!”. 주저하다 결국 양말을 벗은 아저씨의 발에는 무좀이 가득 차 있었다.
신앙이 입에만 있고 삶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우리의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표를, 우리의 입에는 복음을 달고 살지만, 그것이 내 삶에 어떠한 변화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좀 약을 파는 무좀 있는 아저씨와 다르지 않으며, 이웃으로 부터 오는 결과는 ‘그러면 그렇지’라는 비야냥뿐이다.
우리가 욕을 먹는 것뿐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과 복음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로 동족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 조금이라도 무좀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모든 공격을 받아서 드러나는 것은 그의 복음에 대한 헌신과 믿음, 그리고 열정이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는가?
첫째, 복음의 능력이다. 자신의 죄가 용서받고 의로운 옷을 입은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일이 복음을 통해 일어난다. 그래서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 우리는 그분의 용서함을 경험한다. 부활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을 하셨던 것처럼, 바울에게 친히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든 그 상황에 맞는 옷을 입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다. 그것은 그분의 겸손한 성품과 만인에게 닿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 준다. 그래서 누군가는 천사의 소리를 듣기도, 누군가는 헌금을 통해 은혜를 체험하기도, 또 누군가는 선행으로 말씀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살아서 우리를 움직이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이러한 복음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을 잡아 넘기는 죄인 중 괴수인 자신에게 친히 음성을 들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경험한 것이 그를 바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5장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고백을 한다. 바울이 한 달음질의 추진력은 자기 노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로부터 나온 것이다. 날마다 죽는다는 그의 고백처럼, 우리의 신앙은 매일 아침마다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고백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 죄가 사라지는, 그리고 나를 의인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는 어떠한 믿음의 추진력도 얻을 수가 없다. 죄가 용서받은 죄인만큼 복음의 능력을 잘 아는 자는 없다. 그들은 자신을 변화시킨 복음이 다른 사람도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복음 전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생각보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말라. 이것은 마귀가 가장 원하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과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도 닿을 만큼 큰 능력이 있다.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둘째, 바울의 치열한 믿음의 싸움에 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삶이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훈련하고 채찍질하며 달음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믿음을 상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자로 표현할 수 있었다. 빈틈이 없는 삶은 매우 고단하기 때문에 타협점을 찾는 것은 일반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시험대에 올라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타협점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른다.
과속 카메라가 설치된 도로를 지나는 운전자는 그 순간 감속을 할 것이다. 그러나 경찰차가 뒤에서 따라오는 차는 운전하는 내내 속도를 조절할 것이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 고난의 순간에 함께하시고 위로해 주시는 주님이기도 하지만, 내 모든 삶의 순간을 지켜보고 판단하는 지존자이시기도 하다.
그래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나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삶과 같다.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뿐만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행동이 말씀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얼마 전 중학교가 시험기간이라 학생들 시험 준비를 해 주었다. 결석 없이 치열하게 준비한 한 학생은 전날 집에 가며 꼭 100점을 맞아 오겠다 말하며 학원을 나섰다. 시험을 철저히 준비한 학생은 이처럼 여유가 있다. 어떤 문제가 나오더라도 답을 찾아낼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학생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시험이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치열한 믿음의 싸움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그들에게 시험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 낼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아쉽고 피하고 싶은 일인 것이다. 모든 의심과 공격이 있을 때, 바울은 드러내며 말한다.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증명하는 바’. 왜 시험이 두렵고 고난이 두려운가?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빈틈이 있기 때문이다. 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비어 있는 믿음의 껍데기만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께서 열매를 먹기 위해 무화과나무로 가신다. 잎사귀가 풍성해서 안에 열매가 있는 줄 아셨는데, 얻을 열매가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본모습대로 그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셨다. 빈틈 있는 믿음, 세상과 타협하는 믿음은 겉보기에 풍성해 보일지라도, 그 본질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판단받는 날이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