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자에서 다시 초보가 되어 알게 된 것
어떤 기억은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오롯이 마주할 수 있다.
어느덧 플라워 카페에서 일한 지 네 개의 계절이 흘렀다. 그때를 떠올리면 서툴고, 상처받고, 때로는 부끄러웠지만 이제야 온전히 마주하며 깨닫는다. 그곳에서 겪었던 일들이 단순한 치기 어린 도전의 시간만은 아니었음을.
우리는 대개 무언가 어긋났을 때 비로소 경험했다고 인식한다. 아무 문제 없이 흘러간 시간은 경험으로조차 인식되지 않곤 한다. 화훼업계의 근무환경은 생각보다 열악했고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들이 많았다. 그 안에서 나는 자주 당황했고 때로는 무력해졌다. 그럼에도 그저 순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서툴렀지만 그 안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애썼고 근로자로서 최소한의 권리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멀리서 보면 흠결처럼 보일지라도 가까이서 들여다본 그 시절의 나는 마냥 무력하지 않았고 매 순간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었다.
이 글은 오랜 시간 경력자로 살다가 마흔에 다시 초보가 되어 겪은 설렘과 서러움 사이의 방황. 그리고 낯선 환경에서 부딪히고, 고민하고, 버텨내며 나 자신을 단단히 빗어갔던 90일간의 기록이다.
01.
내 몸을 돌보는 게 1순위: 휴게시간의 중요함
월화수목금 주 5일 매일 6시간 근무 일과는 이러했다. 오전 11시 50분에 출근해서 카페 물품을 채우고, 점심시간에 몰려드는 직장인들에게 커피를 만들어 서빙을 하고 폭풍 설거지를 한다. 근처에 꽃 주문이 있을 때는 걸어서 배달을 다녀온 뒤, 손님이 없을 때 점심을 먹는다. 이후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용 사진을 찍어 선별하고 글을 써서 올린다. 꽃 컨디셔닝을 하는 날에는 꽃 냉장고 청소를 한다. 꽃이 꽂혀있던 물통들을 세척하고 미끌거리는 줄기를 물에 씻어준 뒤 물러지거나 갈라진 줄기의 맨 아래 부분을 하나하나 잘라 꽃이 물을 잘 먹을 수 있게 해 준다. 시들거나 갈변된 꽃잎들까지 모두 제거한 꽃들은 새로 간 물통에 꽂아 꽃냉장고에 넣는다. 이틀에 한번 야외 화분에 물을 주고 중간에 카페 손님이 오면 음료를 만들고 꽃 손님을 응대하다가 마감 청소를 한다.
어느 날. 나 지금 나가야 되니까 빨리 와. 밥 먹으러 나간 지 채 10분도 되지 않을 때였다. 사장의 전화에 결국 쟁반째 밥을 들고 돌아와 싱크대 앞에 서서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쳤다. 법적으로 4시간 근무 시 30분, 8시간 근무 시 1시간의 휴게시간이 보장되어야 하지만, 소규모 꽃집의 현실 앞에서 무력했다. 정식으로 휴게시간을 요청하기에도 애매했다. 무급으로 온전히 쉴 건지, 돈을 받으면서 밥도 먹으며 일타쌍피를 취할 건지. 선택권이 주어지는 상황도 아니었지만 모두 후자를 택해왔으니 나도 따라야 했다. 처음에는 열정으로 버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몸에 무리가 왔다. 한 달 만에 살이 10kg이 빠질 정도로 몸은 축나고 있었다. 평소 밥 먹는 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던 사장에게 말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잖아요. 일하는 동안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없었지만 한 가지는 명확히 깨달았다. 단 30분이라도 온전히 쉬는 것. 그것이 장기적으로 나를 지키는 지름길임을. 꽃을 돌보는 마음만큼 내 몸을 돌보는 게 일 순위다.
02.
초보여도 내 시간은 소중해: 근무시간 경계의 기술
시간 외 근무하는 일이 잦았다. 픽업 고객을 기다리거나 출퇴근 전후 주문 문의에 답하는 일이었다. 추가 근무수당은 없었다. 처음에는 경험 삼아 해보라는 사장의 말을 따랐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처럼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잃어야 한다. 나는 배움을 얻기 위해 내 시간을 투자했지만 점차 명확한 선이 필요함을 느꼈다. 시급제로 일하는 내게 시간은 곧 정당한 보상이어야 했다. 사장이 퇴근 후 업무를 지시할 때는 개인 일정을 언급해 퇴근시간을 인지시켰고, 근무시간 외 주문 문의가 오면 응대는 하되 사장님께 문의하시면 더 빠른 답변받으실 수 있다고 고객에게 안내했다. 어차피 문의가 와도 내가 사장에게 물어본 후에 고객에게 답변하는 방식이라 그게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퇴근 후의 무분별한 연락은 사라졌다. 나를 지키는 경계는 내가 세우지 않으면 허물어진다.
03.
무조건 참는 것이 미덕은 아니다
:전문성의 가치를 존중 없이 깎아내릴 때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면접 때 듣지 못한 블로그 운영 업무가 추가된 것이다. 사장은 10년 넘게 글로 밥벌이를 해온 내 경력을 빌미로 길고 제대로 된 글을 요구했다. 전 직원이 10분 만에 대충 쓴 짧은 글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나는 습관처럼 퇴근 후까지 콘텐츠를 고민하며 정성을 쏟았지만, 돌아온 것은 느려진 꽃 관리 속도에 대한 채근이었다. 기존 직원이 했던 업무량은 그대로인데 작성해야 할 글의 양은 3배로 늘어난 과부하의 상황에 나는 결국 쐐기를 박았다.
매일 긴 글을 써야 한다면 월급을 더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사장은 꽃을 가르쳐주니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 아니냐며 노골적으로 불쾌해했다. 본인의 꽃 스타일대로 상품이 나가야 매장에 손해가 없으니 당연히 가르쳐야 할 업무 교육임에도 사장은 생색을 내며 내 노동력과 저울질했다. 하지만 내게 가르쳐준 것은 직원이 차질 없이 해야 할 매장 업무였을 뿐. 한때 전문 업체에 비용을 지불하며 블로그를 운영했다던 사장은 그 돈은 아까워하면서 내 글은 당연한 덤으로 치부한 것이다. 자신의 기술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전문성에도 마땅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인지시켜야 했다. 결국 주 2~3회 게시로 업무량을 타협하고 그날 이후, 나는 챗GPT를 활용해 사장이 원하던 긴 글을 고민 없이 후다닥 써 내려갔다. 존중받지 못하는 곳에서는, 상대가 대우해 주는 만큼만 에너지를 쓰는 것이 현명하다는 걸 배웠다.
04.
내가 만든 꽃다발이 풀어지던 날
:나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연습
초보라는 이유로 꽃다발을 잡을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전임자처럼 사장 몰래 꽃다발을 만들고 다시 풀어 흔적을 지우는 증거인멸을 반복할 뿐이었다. 어느 날, 시든 꽃은 그때그때 정리하라는 지시대로 사장의 시든 꽃다발을 수정해 두었다. 다음 날 사라진 꽃다발을 보고 팔린 줄 알고 설레었으나 사실은 사장이 풀어헤친 것이었다. 내 흔적조차 부정당한 기분으로 퇴근하는 길, 볕에 비치는 들풀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지금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고 있구나. 미약한 존재임을 받아들이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윤슬이 반짝이는 강물과 푸릇한 가로수를 보며 움츠러든 마음을 달랬다. 보잘것없는 들풀처럼 살아가도 나는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냈다 다독였다. 나라는 존재도 여느 길가에 들풀처럼 살랑이고 있었다.
05.
무례를 정당화하는 배움은 없다
:내 개인정보가 동의 없이 배포되던 날
모르는 번호로 주문전화가 왔다. 사장이 해외여행을 가며 동의 없이 내 개인 번호를 고객들에게 배포한 것이다. 직접 주문을 받아 전달해 주겠다던 약속과 달리, 나도 모르게 내 번호가 노출된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고객에게는 퇴근 후라 어렵다고 정중히 사과드린 뒤, 사장에게는 근무 시간이 지나 대응할 수 없었음을 보고했다. 존중받지 못했다는 기분은 씻을 수가 없었다.
미리 양해를 구했다면 기꺼이 책임감을 가졌겠지만, 예고 없는 침범 앞에서 나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법적 근거를 찾아보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보통의 꽃집은 근로자 보호를 위해 개인 번호 공유를 금기한다. 배움이라는 명분이 타인의 소중한 개인정보를 함부로 다룰 권리까지 주지 않는다.
06.
앞담화 뒷담화 사이에서
:협상의 기술을 익히다
쟤처럼 세상물정 모르나 보지. 기억력이 안 좋네. 단골들 앞에서 깎아내리고 폄하하는 사장의 앞담화에도 나는 묵묵히 내 일에만 집중했다. 평소 전 직원의 험담을 일삼던 사장은 본인이 없을 때 꽃 가격을 몰라 손님을 놓친 직원들을 탓하곤 했다. 하지만 정작 꽃 가격은 본인만 쥐고 모든 판단이 자신을 거치길 원했다. 자리를 비울 땐 전화로 물어야 했는데 전화를 안 받아 손님을 놓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사장이 전화를 못 받는 상황을 대비해 가격을 물었더니, 대강 알려준 가격대로 판 꽃을 두고 다음 날 손해 봤다며 몽니를 부렸다. 전화해서 물어보지 그랬어. 기승전 전화, 이런 일들이 반복되자 나는 무분별한 비판과 비효율적인 업무방식을 개선하기 위해 감정 대신 실리를 택했다. 전 괜찮은데 사장님이 손해 보시잖아요. 가격정보는 메모장에 남겨주세요. 사장의 이익을 앞세운 한마디가 사장의 태도를 바꿨다. 그날 이후 사장은 메모장에 꽃 가격과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무례한 언사 속에서도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상황을 유리하게 돌리는 협상의 기술을 배웠다.
07.
급여가 누락됐다
:근로계약서와 기록은 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급여가 하루치 누락되어 지급됐다. 사장은 근무 지시를 한 적 없다 발뺌했지만, 캡처해 둔 카카오톡 업무 내용 덕분에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내 노동의 가치가 이토록 가볍게 사라져도 되는 것인가. 정당한 노동을 구걸하듯 받아내야 하는 현실에 마음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평소 사장은 나중에 꽃집을 하려면 다 경험해 봐야 한다며 본인의 개인적인 모임 서류 작성까지 서슴없이 지시해 왔다. 왜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느냐는 물음에는 나중에 꽃집 차리게 됐을 때 궁금한 거 있으면 다 가르쳐줄게라며 마치 미래의 가르침을 빌미로 현재의 부당한 노동을 거래하려 들었다. 20년간 이어온 관행을 핑계로 면접 때 약속했던 근로계약서 작성을 암묵적으로 묵인하는 환경에서, 내가 근로자로서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기록자가 되는 것이었다. 출퇴근 내역부터 작업 결과물까지, 꼼꼼한 기록은 계약서에 준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자 나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주었다. 회사에서는 계약서 작성이 기본 중의 기본이었건만, 꽃집에서의 근로계약서는 사장이 직원을 존중하며 일할 환경을 갖췄는지 가늠하는 지표가 됐다.
08.
권리는 스스로 챙기는 것
:파트타임도 4대 보험 가입이 가능하다
3.3% 프리랜서 공제로 일하던 중 4대 보험으로 고용형태를 바꿀 수 있는지 문의했다. 사장은 지금까지 그런 파트타임이 없었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3.3% 프리랜서 공제는 업계에서 은연중에 횡행했다. 사업주와 근로자 모두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4대 보험을 적용하면 사업주는 추가 비용을 부담해야 하고, 최저시급을 받는 근로자에게는 당장 떼이는 보험료가 부담으로 다가온다. 실수령액만 보면 사장과 근로자가 윈윈 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불안정한 근로 환경에서 사고나 실직을 당해도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것이다.
주 15시간 이상 근무하면 근로자로 인정돼 4대 보험 가입 대상임을 피력했지만 사장의 입장은 완강했다. 그때 분명해졌다. 이곳은 내가 오래 머물 곳이 아니구나. 근로자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는 불안으로 돌아왔고, 그 불안은 떠나기로 마음먹게 된 결정적 방아쇠가 됐다. 당연한 권리조차 스스로 요구하지 않으면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지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배웠다.
불편한 감정은 내가 머물고 싶은 곳을
비춰주는 이정표
사람이 살면서 억울한 순간이 있다면 신경 쓰면서 정성을 다했음에도 그 모든 것이 대충대충, 쉽게 퉁쳐져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될 때다. 대강했으면 억울하지도 않다. 하나하나 신경 쓰면서 한 게 억울하고 허탈해진다. 신경 쓴 강도대로 마음의 쓰나미도 크게 온다. 플라워카페에서 일하면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싫다'는 감정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감정을 잘 인식하는 것이 나를 알게 하고 보호하며, 내가 머물고 싶은 곳을 비춰주는 이정표가 된다. 왜 사람들이 좋은 직장 환경에서 좋은 사람과 일하고 싶어 할까. 그 이유는 상호 존중과 배려, 그리고 공정한 대우를 받고 싶어서였다. 명확해진다. 어떤 사람과 어떤 환경에서 일하고 싶은지.
마르셀 프루스트는 힘겨웠던 시절이 가장 좋았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그 시간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플라워카페에서의 시간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이제는 그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참 고생 많았다. 너는 그때 최선을 다했어.
첫 출근길, 앙상한 가지 위에 맺혀 있던 봉오리는 시간이 흘러 싹을 틔우고 꽃이 되었다. 나처럼 성장이 느린 것 같아 볼 때마다 응원해 줬는데, 그 시간을 지나며 나도 조금씩 자라고 있었을까. 꽃이 피고 나서야 비로소 사과나무였다는 걸 알게 되고 얼마 후 맞이한 마지막 퇴근길, 나는 사과나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나를 찾아가는 여정의 길목에서 묵묵히 함께해 줘서 고마웠다고.
인생은 결국,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꽃집 구직 시 알아두면 좋을 법률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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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근로계약서 작성 관련 근로기준법
근로기준법 제17조에 따르면 근로계약 체결 시 임금, 근로시간, 휴일, 업무내용 등을 서면으로 명시·교부해야 하며, 이를 위반할 경우 제114조에 따라 5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_4대 보험 가입 관련 법률
「국민연금법」 제8조, 「국민건강보험법」 제6조, 「고용보험 및 산업재해보상보험의 보험료징수 등에 관한 법률」 등에 따라 사업장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자는 원칙적으로 4대 보험 가입 대상에 해당한다. 1개월 이상 계속 근로하고, 주 15시간 이상 근무하는 경우에는 단시간 근로자라 하더라도 적용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근로 형태와 관계없이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 근무하는 경우 근로자로 인정되어 4대 보험 가입 의무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