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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모레비 Jul 08. 2020

세상에서 가장 슬픈 "라떼는 말이야"

80년대생 젊은 꼰대의 "라떼" 이야기





우리는 단지 환경에 압도되어 왔다.




그 악마 같던 담탱이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80년대생들의 술자리에는 학창 시절 선생님들이 남겨준 악몽 같은 추억이 단연 최고의 안주거리다. 등교 시간 교문 앞에는 바늘에 찔려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학생주임 선생님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서있었다. 그분의 오른손에는 엄벌을 상징하는 회초리 혹은 야구방망이가 들려있었다. 선생님 옆에는 선도부 선배들이 노란색 완장을 차고 교문을 통과하는 친구들을 물샐틈없이 감시했다.


 간혹 멋이란 것이 폭발해 머리에 젤이나 무스를 바른 용감한 남학생들은 화장실로 끌려가 대걸레로 머리를 빨리는 굴욕을 맛봤다. 두발 규정을 애써 외면하며 귀밑 3cm 지점을 통과한 여학생들의 긴 머리는 단호한 가위질로 엔딩을 맞이했다.


 그들의 숨 막히는 눈빛을 피해 교문을 무사히 통과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조금 답답하고 불편하더라도 학교에서 정해놓은 교칙을 순응하며 말없이 따르면 됐다. 그렇게 우리는 교복을 줄여 멋을 내고 싶어도 통자 바지와 치마를 입었고, 화려한 연예인들처럼 머리를 길러보고 싶어도 짧은 스포츠머리와 단발머리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어느덧 규율과 통제로 가득했던 학창 시절을 지나 대학생이 되니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철저한 학번 중심의 위계질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수, 삼수를 해 선배와 나이가 같더라도 학번이 높은 선배는 하늘과 같았다. 선배가 술을 주면 잔을 꺾어 마시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한번 채워준 술잔은 바닥이 보일 때까지 비워야 했고, 별도의 허락이 있지 않다면 깍듯이 존댓말을 써야 했다. 철저한 위계 중심적 문화가 정해놓은 룰을 거부한 신입생들은 선후배들과 어울리기 어려웠고, 이너서클에서 멀어져 갔다.


 그 시절 짧은 머리, 정해진 폭의 바지와 치마 길이는 공부를 잘하는 것과 어떤 심오한 상관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학문을 탐구하는 지성의 요람 대학에서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는 꼭 필요했던 것일까?


 80년대생은 그들이 마주하는 불합리한 현실 앞에서 나름의 생존 방법을 터득하며 인생을 살아냈다. 우리는 충분히 납득하지 못한 괴상한 규칙들 속에서도 꿋꿋이 군말 없이 따르고 버텨내면 언젠가는 힘 있는 권력을 갖고, 이 시스템 안에서 점점 편한 위치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학습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80년대생은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을 뚫고 신입사원이 되어 다시 먹이사슬 피라미드의 최하단으로 이동했다. 신입사원 교육에서는 조직인으로서의 자세를 갖추기 위해 행군을 하거나 산 정상에 올라야만 했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정사각형 도화지를 들고 조직의 핵심가치를 상징하는 글자를 표현하기 위해 잠을 줄여가며 단체 카드 섹션을 준비하기도 했다.


 사회생활의 a 조차 모르는 햇병아리들은 그만큼 흡수력이 빨랐고, 잔뜩 얼어붙은 얼음 상태로 회사형 인재로 쉽게 조각됐다. 프로그램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였다. '너희는 조직에 속한 하나의 구성원이다. 조직에서 개인의 개성은 그리 중요치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사불란하게 지시에 맞춰 하나로 움직이며 조직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의 공채 기수로 이름 붙여져 다시 태어난 80년대생은 사회생활을 거듭하며 사회와 조직의 의도대로 저마다의 개성을 잃어갔다. 수많은 선택의 경험과 그에 따른 결과를 통해 학습과 강화가 이뤄지듯 80년대생 앞에 놓인 환경과 그에 순응하며 버텨낸 30여 년의 세월은 우리를 물들였다. 어느덧 ‘세상이 원래 그렇고 그런 거지’라며 주어진 환경과 상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순응형 인간'이 되어버렸다.


 부모님 세대보다 훨씬 더 물질적으로 풍요로웠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이 자유분방했던 그때 그 시절 우리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방향에 대한 '거부권'과 ‘선택권’이 달리 없었다. 1994년 처음 실시된 수능, 대기업 취업과 같은 획일화된 목적지를 향해 주변을 돌아볼 새도 없이 함께 경쟁하며 전속력으로 달려야만 했다.


 한참을 달려오니 불합리한 시대를 감내한 우리들에게 남은 유산은 함께 겪은 세대들과 나눌 수 있는 웃픈 이야기뿐이었다. 외치기만 하면 꼰대로 오해받는 ‘라떼는 말이야'는 사실 후배들에게 주어진 조건에 토 달지 말고 순응하며 따르라는 강요의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80년대생 중 대다수는 꼰대질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세대의 웃픈 추억을 소환하는 하나의 주문으로 술자리에서 '라떼는 말이야'를 외치고 있었다.




우리 부모님들은 더 심한 일도 겪어왔는데..



 글로벌화, PC, 인터넷, 힙합 등 젊음과 자유, 다양성을 상징하는 문화를 경험하고, 즐기며 자라온 X세대 그리고 그들을 뛰어넘는 자유분방함과 개인주의적 성향을 보였던 80년대생들은 어찌 된 영문으로 우리 앞에 놓인 다소 비상식적 환경과 집단주의 문화에는 순응하며 압도당하고 살아왔을까? 왜 그들 중 상당수는 '젊은 꼰대'가 되었을까?


 80년대생을 둘러싼 아이러니함의 실마리를 풀어내려면 그들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부모님과 그들을 둘러싼 시대적 배경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80년대생의 부모님은 대부분 베이비부머 세대(1946년~1965년 출생)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6.25 전쟁 후 배고픈 보릿고개 시절, 멀쩡한 대중 가수도 간첩으로 오해받아 수사를 받을 만큼 가혹한 검열과 통제로 가득했던 유신시대 등 시대적으로 어둡고, 불투명한 비민주적인 시대를 겪었다.


 80년대생이 자라며 부모님께 들었던 인생의 풍경은 참혹했다. 단칸방에서 7남매가 옹기종기 모여 잠을 자다 연탄가스가 새는 바람에 가족 모두 죽을 뻔했던 이야기, 집안에 하나뿐인 아들의 성공을 위해 중학교 졸업 후 곧장 공장에 취직하며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 형제들의 희생, 통금 시간을 넘겨 집에 들어가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까지. 가슴 시린 이야기의 절정은 1997년 시작된 IMF 시대였다. 눈앞에 닥친 절망적인 현실을 온몸으로 버텨내는 위대한 부모님의 모습을 그들은 누구보다 생생하게 곁에서 지켜봤다.



  80년대생이 성장 과정에서 마주했던 조금은 비상식적이고, 불합리해 보이던 경험들은 베이비부머들의 ‘라떼’ 시절과는 감히 견줄 수 없는 진일보한 현실일 뿐이었다. 그들이 주어진 환경에 물음표를 과감히 던지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순응하며 자랐던 이유는 이보다 더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인생을 살아내신 부모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을지 모른다.


 나와는 맞지 않는 답답한 환경에 과감히 등을 지고, 나만의 길을 가기 위해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위가 마치 큰 죄를 짓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부모님들의 고생을 생각하면 절로 숙연해졌다. 우리는 감히 그들의 기대를 무시하고 부모님이 달려온 비포장길보다 정돈된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길을 이탈할 수 없었다.


  이런 배경들은 80년대생이 변화를 위해 과감한 용기를 내기보다 숨죽이고 압도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공고히 구축했다. 그 시절 선배들이 내뱉는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은 불합리한 현실과 제도를 견디게 하는 진통제 역할을 했다. 라떼를 외치는 상사들의 모습에서 이보다 더한 일들을 견뎌낸 우리 부모님들의 모습이 투영됐고, '그래 이 정도는 참을만한 거야'라는 스스로의 주문을 되뇌며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참아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태어난 80년대생에게 딱딱한 위계질서 아래 불투명하고, 각자의 개성이 존중받기 어려운 집단주의 문화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환경에 압도당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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