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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한 달 여행, 게스트하우스

낯선 자리에서 발견한 나이 듦의 순간들

by 오은오

얼마 전 '서브스턴스'라는 영화를 봤다. 50살이 된 여배우가 '늙었다'는 이유로 TV 프로그램에서 잘린다. 그녀는 젊어지기 위한 마법 같은 약을 맞고, 20대의 완벽한 자신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선택은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광기로 이어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거울 앞에서 주름을 살피고, 처진 볼살을 끌어올리며 한숨 쉬던 주인공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영화는 피칠갑을 하며 끔찍하게 보여줬지만, 누군가에겐 너무나 현실적인 두려움이었다. 바로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공포. 이 영화는 내게 늙어감에 대한 두려움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했다.

여행 이야기를 영화로 시작하는 이유는 이번 게스트하우스에서 생경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껏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던 주제. 바로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고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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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여수에 도착했다. 그리고 하루 여행을 동행하는 친구가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에 갔다. 이 게스트하우스는 다른 곳보다 좀 더 동적인 공간이다. 단순히 쉬는 공간을 넘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실 수 있는 그런 곳. 손님이 나서지 않고 주인장이 알아서 파티를 만들고 주도하기 때문에 단순히 '놀기'에 집중할 수 있는 그런 게스트하우스다. (파티 비용은 별도로 지불해야 한다)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다면 아래 영상을 보시길. 내가 갔던 게하가 유튜브에 나온다.

맛의 고장 전라도, 배 타고 배 터지는 [여수 게스트하우스]ㅣ세입자 ep.08 [EN/ID/JP/TH]

(20분 11초부터 파티 시작)


사람 많은 장소에서 기가 쭉 빨리는 나로썬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그리고 친구는 '무조건 우리보다 형 누나가 있을 테니 걱정 말라'며 장담했는데, 웬걸. 나와 친구를 제외하고는 전부 20대였다. 띠동갑인 동생들도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처음 보는 사이라도 나이는 절대적인 서열이라, 갑자기 내가 모임의 '큰형'이 되어버렸다. 뭔가 모를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졌고, 친구의 장담은 결국 내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이 되어버렸다.


하지 안했으면 하는 술 게임이 결국 시작되었고, 나와 친구는 각팀의 팀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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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 시장이나 주택가를 걸을 때면 늘 들리던 목소리들이 있었다. '학생~' 하고 부르시던 가게 주인 아주머니들, '젊은 총각 어디서 왔어?' 하며 말을 걸어오시던 어르신들. 20대까지만 해도 그런 정겨운 말들이 일상이었다. 시장 골목을 걷다 보면 '학생, 길 좀 물어볼게' 하고 먼저 다가오시는 어르신들도 있었고, '이 동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 사니?' 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시는 분들도 많았다.


이주전 포항 죽도 시장에 들렀을 때다. 새로운 길 속 익숙한 무언가가 즐비한 시장 속 길. 정겨움은 똑같이 느끼지만 나 혼자 느끼는 정겨움인 거 같은 상황. 관광객을 호객하는 음식점 직원분들은 유독 혼자 걷는 나를 지나쳤다. 패딩을 목 끝까지 잠그고, 패딩에 달린 모자를 푹 쓰고,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니 말걸기 힘들어 보였나? 물회집에선 소주 먼저 주문하는 내 모습이 아저씨 같았나? 20대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두가 같은 상황인데, 내가 달라졌다. 더 이상 '학생'도 아니고 '젊은 총각'도 아닌, 그저 평범한 손님이 되었다. 혼자라 그런지 4D로 느낀 이 감정.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던 나이 듦을, 이날 시장에서 처음으로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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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서 게스트하우스 데시벨이 한껏 올라간 타이밍. 친구는 워낙 활동적이라 팀장 역할을 자연스레 해내고 있지만, 난 마치 업무를 하듯 움직이고 있다. 자의적으로는 절대 못하는 이 역할. '회사에서 시켜서 한다'는 마인드로 하면 어찌어찌 버틸 만하다. 20대 중반 이후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술게임도 하고, 아기자기한 율동도 함께 했다. (만약 율동하는 내 모습이 어딘가에 찍혔다면, 영화 '테이큰'의 리암 니슨처럼 그 영상을 찾아 지우러 다닐 것이다)


2시간이 넘는 1차 자리는 게하에서 마무리됐고, 술이 모자란 사람들은 2차로 자리를 옮겼다. 술자리의 분위기는 어느 부서의 회식 자리와 별 다를 건 없었다. 다들 성격이 좋은 친구들이라 그런지 어색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고 다들 술도 잘 마셨다. 2차 자리가 끝난 후에도 늦은 밤인데도 친구들은 숙소에 갈 생각을 안했다. 친구와 난 노래방에서 노래 한 곡 딱 부르고 빠졌다. 다음날 아침에 물어보니 노래방 이후 4차까지 술을 마시러 갔다더라. 피곤하지도 않나. 대단하다.


친구와 숙소로 돌아갈 때 문득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20대 때 술자리에서 봤던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선 내가 되어 있었다. 평생 막내 혹은 중간 위치에서 살아왔고 집에서도 막내인 내가, 이제는 어딜 가도 '형'이나 '오빠'소리를 듣는다. 중간은커녕 으레 윗사람 자리가 되어버렸다. 한 번도 '큰 형님' 자리를 맡아본 적 없는데, 이제는 그런 자리가 자연스레 따라온다. 비공식 첫 팀장 역할. 어려웠지만 익숙해지면 할 만 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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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같이 있는데 말 한마디 안해도 어색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터무니 없는 질문을 많이 한다. '월 600받고 지금처럼 일하기 vs. 월 300받고 일하지 않기', '주 4일 근무 vs. 일정 기간 방학', '10년 전으로 돌아가기 vs. 10억 받기' 등 상대방의 대답과 그 이유가 재밌어서 종종 한다.


최근에 던진 질문은 '20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갈 것인가'였다. 질문 받은 모두가 돌아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웃긴 건 이유였다. 하나같이 "비트코인 투자해서 대박 난다"는 말을 꼭 했다. 그 외에도 '주식에 올인 한다', '강남 아파트 산다' 같은 대답이 이어졌다.


내가 기대했던 건 '다시 한번 꿈에 도전해보고 싶다', '그때 못해본 것들을 해보고 싶다' 같은 낭만적인 대답에서 상상력을 총동원한 이유를 듣고 싶었는데. 다들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대답만 늘어놓는다. 우리 모두 직장인이 되어 있어서 그런가. 순수한 도전이나 열정보다는 안정과 현실을 먼저 계산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 얼굴만 늙은 게 아니라 마음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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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런 변화들은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내 곁에 있었지만 눈치채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야 조금 보인다. 평범한 시장 나들이에서, 게스트하우스에서의 하룻밤에서, 친구들과의 가벼운 대화에서. 일상의 작은 순간들이 이번만큼은 다르게 다가왔다.

늙음을 논할 나이는 아직 아니다. 서른 중반, 아직은 젊다고 말하기에 충분한 나이다. 늙음을 주제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순 없지만,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는 조금 알거 같다. 술자리에서 '큰형님' 자리에 앉게 되고, 20대로 돌아가자는 질문에 투자 이야기부터 하게 되는 내 모습이 그렇다.

나이 듦이란 결국 변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인거 같다. 시장에서 더 이상 '학생'이라 불리지 않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자연스레 '형'이 되어있고,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현실적인 고민을 나누게 되는 이 모든 순간들이 그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는 것을.

내게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도 계속 흘러갈 것이고, 그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부정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다.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이 듦'이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더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KakaoTalk_20250218_145159010_25.jpg 여수 해질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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