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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독오독 Jan 01. 2024

기억이 나를 선택했다

#최진영 #홈스위트홈 #꽃사과나무 #페르소나


 시간은 발산한다. 과거는 사라지고 현재는 여기 있고 미래는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언가가 폭발하여 사방으로 무한히 퍼져나가는 것처럼 멀리 떨어진 채로 공존한다.


 변하고 싶었다. 지금 내가 나를 힘들게 해서. 하지만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한 과거’ 역시도 현재라면 어디서부터 바뀌어야 할까. 그래서 신청한 연수였다. 연수원은 안양에 있다. 현재의 집부터 24km. 대중교통으로 1시간 38분,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가치가 있는 연수여야 할 거 같지만 사실 강의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안양에 가야 하는 이유'를 만드는 것이 내 연수의 목적이다. 그곳에 어린 내가 살고 있다.                


 어린 내가 사는 집은 연수원에서 3km 거리에 있는 신도시에 있다. 지금은 신도시라는 표현이 맞지 않겠지. 20년 전 지어진 이 아파트 단지 뒤뜰에는 꽃사과나무가 있었다. 계절이 온기를 찾을 때면 초록 나뭇잎 사이에 동그란 사과가 열렸다. 그 작은 열매에 팔을 뻗었을 때 엄마는 말했다.

 "꽃사과는 사람이 먹는 게 아냐."

나무 아래에는 잇자국이 난 꽃사과 한 알이 떨어져 있었다. 누가 한 입 먹고 뱉은 듯 살이 보였다.


 네이버 지도에 아파트를 검색한다. 2023년 4월에 촬영된 거리뷰. 단층 상가 옆 오래된 16층 아파트. 익숙하고 그리운 모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처음 보는듯한 낯선 풍경. 시간은 멈추어 있지 않았고, 나는 그 집을 기억하지 못했다. 내 어린 시절도 사라졌을까.


 토요일 새벽 알람이 울린다. 일어나기 싫다. 하지만 이미 출장은 결재되었다. 후회하며 집을 나선다. 서울을 반 바퀴 돌아 구로역에서 급행열차를 탄다. 주 5일제 근무자가 휴일에 이게 무슨 짓인지 싶다. 안양역을 나온다. 여기까지 왔으니 별 수 있나. 마을버스를 탄다. 열두 정류장을 지나 수리산 입구에 내린다. 오르막길을 걷는다. 누군가에게 모교일 초등학교를 지나, 어머니가 근무했던 중학교를 지나 연수원에 도착한다. 집에 가고 싶다. 피곤하다. 힘도 의욕도 없다. 괜히 왔다.                


 "여기 원래 제가 다닌 중학교였어요."     

 미래가 보냈을까. 우연히 옆자리 앉은 L의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다. 그녀가 졸업한 여중이 폐교되고 그 건물이 연수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근무했던 남중은 남녀공학이 되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건물에 학교의 흔적들이 보였다. 운동장은 주차장 그리고 우리가 앉아있는 강의실은 크기를 보았을 때 아마도 과학실이었을 거다.     

 "학교에 다시 돌아오니 중학교 때 제가 생각나요. 그때 저는 발랄한, 소위 '노는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었는데 섞이지 못했어요."

 "결이 달랐어요?"     

 "네, 성향이 달랐는데 억지로 닮으려고 했어요. 그게 좋아 보였나 봐요. 이도저도 아닌 그때 저랑 놀아주고 급식도 같이 먹던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 친구들에게 잘할걸. 여기오니 고마운 마음이 드네요."  

 오늘 연수 잘 온 거 같다.


  수업이 끝나고 조금 들뜬 마음으로 시내버스를 탄다. 안양일번가와 관악역을 지나, 시장을 돌아 어린 나의 집에 도착한다. 열여섯 동밖에 없는 작은 단지. 언니방 창문을 열면 은경이네, 해진이네 집이 보였다. 5분이면 희원이네, 수연이네, 주현이네 집에 갈 수 있다. 이렇게 가까웠는데 지금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상가에 있던 슈퍼와 문구점, 금은방도 이제 보이지 않는다. 그 꽃사과나무는 아직 있을까.


 왜 남아있는지 나조차 알 수 없는 기억들. 나의 선택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나를 선택해 남아있는 것만 같다.


 ‘꽃사과 나무가 나를 선택했다.’ 현재의 나는 지금 과거의 꽃사과나무 앞에 있다. 그곳에 어린 내가 꽃사과 열매를 먹고 있다. 청색에 가까운 꽃사과의 맛은 떫다. 그럼에도 그 열매의 떫은맛이 좋았다. 아니 유리가 좋았다.

 "우리 저거 먹어볼까?"

 꽃사과를 먹어보자고 한 것은 유리였다. 작고 단단한 열매를 앞니로 갉아 입에 넣고 씹었다. 시큼함에 혀가 알싸했다.  

 "맛있지 않아?"

 "응!"

 유리가 맛있다 하니 나도 맛있었다. 그 후로 우리는 뒤뜰에 갈 때마다 씻지도 않은 꽃사과를 따 먹었다. 우리만의 의식이 생긴 거 같아 기뻤다. 그리고 혼자 나무 앞을 지날 때도 꽃사과를 먹었다. '분명 일어났으나 아무도 모르는 일'. 꽃사과를 먹으면 유리와 함께 있는 거 같았다.


 그 비밀스러운 의식의 끝은 평소와 다름없던 날이었다. 언제나 그래왔듯 나는 수업이 끝나고 6학년 3반 교실 앞으로 갔다. 유리와 나는 반이 달라도 항상 집에 같이 가니까. 유리가 친구와 빗자루를 휘두르며 놀고 있다. 머리카락이 다 헝클어진 줄도 모르는지 신나게 웃고 있다. 유리가 뒷문에 서 있는 나를 본다. 유리가 나온다. 유리 책가방은 교실 안에 그대로 있다. 유리가 말한다.

 "이제 날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기다릴 필요 없어. 먼저 가."

그 후 나는 유리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다. 더 이상 꽃사과를  먹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상은 너무 조용했다.

 

 페르소나, 나는 착한 아이이고 싶었다. 상대의 뜻에 맞게 행동하고, 내 감정보다 상대가 마음을 중시하면 사람들이 날 좋아할 거라 믿었다. 착한 아이는 친구와 싸울 줄 모른다. 네가 잘못 생각하는 거라고 설명도, 변명도 못 한다. 화내는 방법도 모른다. 속상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줄도 모른다.


 졸업식날, 나는 학교 대표로 착한 어린이상을 탔다. 곁눈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유리를 보았다. 유리는 장난스럽게 하얀 이를 활짝 드러내고 친구들과 웃고 있었다. 식장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 다시 이곳에 왔다.

 '사실 너 알고 있었지?'     

 마음이 변한 건 내가 아닌 유리였다. 내 감정과 행동에 상관없이 어차피 끝났을 관계. 반 친구와 노는 유리 모습은 빨간 구슬처럼 반짝였다.

 "이제 날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유리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난 내게서 다른 잘못을 찾으려 했다. 내 착한 가면이 유리를 지겹게 만들었을 거라고, 그 거짓 얼굴의 아이가 마음을 끝까지 숨겨 자신보다도 소중한 친구의 오해를 풀지 못했다고.

 '꽃사과는 사람이 먹는 게 아냐. 그래서 쓴 거야.'

 이제 그 어린아이가 페르소나를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선택과 상관없이 변하는 것들이었다. 그건 내 탓이 아니었다. 지금 내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현재의 내가 지금의 꽃사과나무 앞에 서있다. 청색 꽃사과는 먹지 않는다. 열매는 여름 내내 붉게 영글어 갈 거다.



* 융(Carl Gustav Jung)이 언급한 대표적인 원형인 '페르소나'는 가면을 뜻하는 희랍어로 개인이 사회적 요구에 대한 반응으로 밖에 내놓는 공적 얼굴이다. 우리는 페르소나를 통해 다른 사람과 관계하면서 좋은 인상을 주거나 자신을 은폐시킨다.


* 참고문헌

최진영, (2023), 홈 스위트 홈, 문학사상.

노안영, 강영신, (2016), 성격심리학, 학지사.


* 그림: Gustave caillebotte, <apple tree in bl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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