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해석자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
<그의 글을 보고 경탄하다>
김영하의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을 꺼내 들었다.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스타일이 너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직전에 읽었던 김영하의 책은 ‘오래 준비해온 대답’이었다. 태생이 자유로운 이야기꾼이, 자유로운 소재인 시칠리아 여행을 소재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낸 책이다. 그는 그만의 자유함이 있고 나는 그 매력에 흠뻑 빠져있었다. 그런 직후에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으니 첫 챕터는 글을 읽어 내려가는 것부터가 힘들었다. 김영하를 따라 자유로이 날아다니다 딱딱한 책상 앞에 앉아, 옆에 있는 신형철과 같이 논문을 읽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책을 접고 김영하의 다른 책을 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계속 읽기로 했다. 이 책을 세 번째로 찾게 된 내 안의 끌림을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잠깐 호흡 맞추는 시간인 거겠지,라고 생각하고 충동을 잘 달랬다. 그렇게 잠시의 적응기를 마친 후 나는 책에 빠르게 빠져들 수 있었고 끝내 나 홀로 독백. 와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쓰지. 경탄이었다.
<어려움에 대한 항변>
그의 글은 어려워 보이지만 아예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조금의 인내심으로 차근차근 따라가면 그의 글과 동행할 수 있다. 그는 자기 지식을 뽐내려고 일부러 ‘어려워 보이는’ 글을 쓰지 않았다. 대변하자면, 그는 그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어려움’만을 골라 글을 쓴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기 지식을 뽐내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지식이 쌓여 있는지를. 그는 뽐내기를 꺼려하는 '찐똑똑이'이다. 그는 자기 지식을 대중의 수준에 맞춰서 디스플레이할 수 있는 진짜 똑똑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 안의 지식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서 알기 쉽도록 딱 필요한 만큼만 ‘정확히’ 꺼내어 보여준다. 과함도 모자람도 없다. 책 제목처럼 그는 ‘정확함’의 신봉자이다. 정확한 내용을 정확한 표현으로 정확한 만큼만 꺼내어, 독자들이 정확히 읽고 정확히 이해하도록 한다.
<신형철만의 고유한 지점 - 그가 내가 아는 유일한 문학 평론가인 이유>
그의 글을 읽으며 대단히 치밀하게 설계했겠구나, 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손이 가는 대로 쓰지 않았다. 오히려 닥치는 대로 쓰고 싶어 막 나가려는 손을 붙잡고 차곡차곡 정확한 문장들을 쌓아 올린 듯한 느낌이었다. 구조와 형식을 잘 갖췄고 그것을 매우 정확한 문장들이 채운다. 이상적인 논문에 가까운 글같이 느껴진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건조함과 딱딱함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글은 또 대단히 감정적이다. 읽고 있으면 내 마음이 울렁거린다. 논문을 읽을 때 느끼는 보통의 감정은 아니다.
마음을 절제하며 차곡차곡 쌓아 올렸을 구조적이고 정밀한 글 뒤에서는 감수성이 풍부한 예술가의 감정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다. 안과 밖이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그는 치밀하게 짜 놓은 구조 뒤에서 서슴없이 눈물을 흘린다. 절제된 모습을 보이지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감정 변태의 모습. 그 태도와 상태의 불일치에서 오는 강렬함이 그에게는 있다. 나는 이 부분이 그만의 고유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지점’은 ‘매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유한 매력. ‘츤데레'의 매력. 무뚝뚝함 속에 친절함과 애정이 느껴지는 매력, 정도로 나답게 상스럽게 표현해본다.
나에게 그는 내가 아는 유일한 문학평론가이지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그는 어느 정도 문학평론가의 틀 밖에 있다. 해석자와 문장가를 더한 어느 지점에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글은 내 마음을 잡아 쥐고 흔들기에, 문학평론에 관심이 없는 나도 그의 글을 찾아 읽는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신형철이 자신의 직업인 문학평론가를 넘어선 폭넓은 지지와 환대를 독자들에게서 받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 영화를 보고 쓴 글을 모은 책이라 손쉽게 시작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거기서 평론가의 해석자의 면모를 제대로 맛보게되고 이어서 '몰락의 에티카'를 찾아보게 된다면, 그것은 어쩌면 그의 본진인 문학 평론계에서도 반가운 일이 아닐까. 그는 신선하고 곱다. 부디 그 빛이 퇴색하지 않길.
<그는 왜 문학평론가가 되었나>
------------------------------------------------------------------------------------------------------------
‘한눈’(?) 팔지 않고 성실한 해석자의 길을 걸으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창작에 한눈팔지 않는 것은 그래 봤자 칭찬보다는 욕을 먹을 가능성이 커서겠죠.(웃음) 제가 비평가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많은데 제일 멋없는 답은 이런 거예요. 제 삶에는 이야깃거리가 없어요. 타인의 삶에서 그걸 찾아낼 만큼 관심의 에너지도 없고요. 그러니 이와는 다른 자극이 주어져야만 하고 그게 작품이겠죠. 작품에 대해선 경탄과 실망을 다 경험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경탄의 에너지가 저를 움직여요. 왜일까.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는데, 저는 사랑할 줄 아는 능력으로 사랑받고 싶어 하는 유형 인지도 모르죠.” (출처 글 하단)
------------------------------------------------------------------------------------------------------------
그의 인터뷰 일부를 발췌해 실었다. 나도 참 궁금했다. 이렇게 글 잘 쓰는 사람이 왜 1차 창작을 안 하고 2차 창작만 하고 있을까. 그게 나만 궁금했던 건 아니었나 보다. 인터뷰에서 질문이 나왔고, 그는 명쾌하게 답변해주었다.
인터뷰에 따르면, 모든 글쓰기는 글로 옮겨 쓸 어떤 원천을 찾아내야 하는데, 소설가와 같은 1차 창작자는 자신의 삶이나 타인의 삶에서 그런 것들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고, 신형철은 그럴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 원천을 작품에서 찾아내 글을 쓰는 것일 테다. 여기서 굳이 1차 2차 구분하며 'n차 창작'의 이름표를 붙였지만 그것은 사실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원본과 사본의 경계가 무너진 채 굴러가고 있으며, 그 둘의 가치 또한 엄격히 상하 구분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고 쓴 그의 글을 읽고 내가 지금 이 글을 쓴다. 이처럼 ‘어디에서 글감을 찾아내었느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것에서 뽑아낸 글이 어떠하냐’가 더욱(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느껴진다.
글을 쓰려면 어찌 됐든 뜨거움을 발견해야 한다. 자기 안이든, 다른 작품 속이든, 발견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나는 뜨거움을 찾아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지닌 사람인가.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서 뜨거움을 발견하는가. 좀 더 직접적으로, 나는 직업적인 소설가가 되기 위해 내 안에서 혹은 타인의 삶 속에서 뜨거움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리고 발견한 그 뜨거움을 끄집어내서 창작물로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럴만한 기술과 체력을 갖추고 있는가. 많은 질문들을 나에게 해본다.
<세상에 해석자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
영화감독 박찬욱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추천사를 썼다. 여러 표현이 있었지만 나는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알다니!” 정도로 짧게 요약하고 싶다. 그는 아마도 놀랐을 것이다. 신형철이라는 해석자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잘 알아줘서. 그리고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자신의 숨은 마음조차도 발견해내고 글로 써줘서. 그는 마치 자신 안에 복잡하게 뒤엉켜 있어 자신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누군가가 대신 말해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것도 몹시 정확하게. 커다란 쾌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세상은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고, 정렬되지 못한 채로 뒤엉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설계도와 매뉴얼이 있고 그것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것은 인간의 문명 중 소수에 해당할 뿐이다. 대부분의 것들은 ‘왜 그러한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그저 '단순히'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설계도 없이 세상에 출현해 존재하고 있는 그것들에 해석자는 달려든다. 씹고 뜯고 캐내고 고민하며 세상에 없는 그것의 설계도와 사용설명서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를 밝혀내고 그 의미가 우리 삶의 어느 지점에 어떤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지도 알려준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익힐 수 있고, 반복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스스로의 눈을 훈련시킬 수 있다. 나 또한 어느 정도의 해석력을 가진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미지로 보이는 세상에서 의미와 뜻을 찾아내고 내 안으로 가져올 수 있게 하므로, 목적 없이 태어나 세상에 던져진 인간들이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게 할 것이다. 세상에는 해석자가 반드시 필요하고, 그들의 해석의 결과물들을 지켜보고 나의 해석력을 키우는 일도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저런 글을 쓸 수 있는(해석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인가>
나도 그처럼 ‘해석자’가 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고, 될 수 없다, 로 결론지었다. 해석은 감상이 아니다. 작품을 긁어내고 읽어내는 데에는 합당한 지식과 이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작품과 연결 지을 수 있는 통찰력도 필요하다. 나는 스티브 맥퀸의 영화를 보고서 헤겔의 정신분석학을 떠올릴 수 없다. 저 떠올리는 행위의 전제조건은 정신분석학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러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이 모두 부족하기에 헤겔의 정신분석학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공부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저 작품을 감상하고, 그것으로 인해 내 안에 일어나는 파문을 살피고, 그 물결의 모양이 어떠한지 겨우 글로 옮겨 쓸 수 있을 뿐이다. 이 과정에는 주로 ‘표현력’(만)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상을 읽어내는 데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고 큰 능력들이 필요하며, 나는 그것을 익히고 가질 능력과 의지가 없다. 능력이 없기에 의지 또한 생겨나지 않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창작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나는 창작자가(는) 될 수 있는 사람인가? 아직은 확실히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조금이라도 예상해보려면 이번에는 창작자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다행히 나는 지금 창작자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고 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인데, 에세이 곳곳에서 ‘직업적인 소설가’에 대한 그의 이야기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볼 때마다 추려서 나는 따로 보관해둔다. 창작(자)에 관한, 창작자들의 이야기들을 담은 나만의 요약 노트,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이런 것들을 모으고 살피면서 내가 창작자가 될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까? 아니다. 나는 내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를 판단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될지를 생각하고 탐구할 것이다. 나는 가불가에 상관없이 창작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맞지 않는 부분은 바꾸고 기를 수 있는 부분은 길러 나는 ‘직업적인 소설가’가 될 것이다. 그래서 건강하고 튼튼하고 강인한 육체를 만들기 위해 신체관리와 운동에 몰두한다. 나는 창작자가 될 수 있는/없는 사람이 아니고 창작자가 되고 싶은/되어야만 하는 사람이기에 원하는 위치에 가 있는 사람들을 보며 끊임없이 나를 그들과 닮아가기 위해 애쓸 것이다.
첫 직업을 소설가로 시작해서 평생을 글만 쓴 ‘순수한’ 사람만이 소설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키는 20대를 재즈 클럽 사장으로 지냈고, 30대가 돼서야 직업적인 소설가가 되었다. 내가 그처럼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는 없겠으나 나 또한 그럴 수 있으리라고(그가 뒤늦게 소설가가 되었듯 나도 늦게나마 직업적 소설가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내본다. 내 안의 이야깃거리를 찾아내서 그것을 소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나를 지켜보는 데에 열심이다. '정확히'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P.S.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175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