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몸이 나았고 (열이 많이 나서 아팠기 보단, 목이 굉장히 따가웠다.) 나는 드디어 오후에 호텔 밖을 나와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뮌헨은 5년만이었지만, 베를린은 첫 유럽여행을 온 2010년 이후 왔으니 딱 십이간지가 한 바퀴 돈 12년 만이었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여행 준비할 때 온갖 신경을 써야했다. 첫 여행이라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겁도 많았었기에 (그리고 나이도 21살이었지...) 매 중앙역마다 숙소까지 가는 길을 프린터를 했으며, 3G 폰은 로밍을 썼지만 데이터가 많이 달면 안되니 꼭꼭 필요할 때만 쓰려고 거의 꺼놨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구글맵이 잘 안되어 있어서 모든 도시에 갈때마다 꼭 여행자 센터에 가서 지도를 받았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10년 전의 이야기이고, 요새는 모든 것이 너무 편하다. 꼭 책과 인쇄된 지도에 의지하지 않아도 목표지점을 찍으면 어떻게 최단거리로 가는지도 나오고, 몇 분이 걸리는지, 막차는 언제인지 까지 나온다. 음식점도 지도에 다 있으니, (꼭 먹고 싶은 것이 있는게 아니라면) 적당히 별점 좋고 내가 먹음직스럽게 생각하는 곳에 가서 먹으면 된다.
2010년의 나도 박물관에 관심이 있었지만, 미술에는 그리 크지 않았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친구와 함께 온 베를린에서 우리는 각자 가고 싶은 곳을 가기로 하고 하루를 보냈다. 나는 동독 박물관과 같은 약간은 특이한 곳에 갔었고, 다른 친구는 회화와 조각이 전시된 표준적인 미술관에 갔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다시 그 미술관과 박물관이 한 대 모여있는 Museum Insel (박물관 섬)으로 갔다. 그리고 그 주변을 그냥 걸었다. 사실, 유럽 여행을 몇 번 온 탓에, 정말 화려하거나 특이한 것이 아니면 이제 놀라는 일도 적고 감흥도 없다. 그래도 안에 있는 것들은 궁금하다. 오늘은 늦게 나왔기도 했고, 어차피 베를린에 7개월 이상은 머무를 예정이니 천천히 돌아보기로 하고, 오늘은 대신 페졸트에 영화 <운디네>에 나왔던 로케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확정은 아니지만, 시집 이후에 또 한 권의 책을 낸다면, 페졸트의 영화와 로케이션을 찾아다니면서 쓰는 독일 기행문과 영화평론집이 들어간 것을 내고 싶다. <운디네>는 가장 최근작인데, 신화속 존재인 물의 요정 '운디네'가 역사학자로 나오고, 잠수부인 크리스토프와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 초반, 운디네는 어떤 남자와 헤어지는데, 영화에서의 영상을 참고로 난 그곳이 매르키쉬 박물관이란 것을 알아냈다. 저곳에 간다면 나 또한 카페에 들어가리라. 하지만 상상은 보기좋게 깨졌고, 카페는 없고, 당연히 어항이 있는 장소도 없었다. 대신, 영화와 연결되게도, 그 박물관은 베를린 도시의 역사를 다루긴 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엔 운디네가 역사학자로서,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베를린 도시에 대해 강연을 하는 건물이 있었다. 그곳은 상시 개방이었고 나는 영화를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방대한 크기의 도시모델에 압도당했다. 각기 다른 컨셉으로 만들어진 도시 모형을 보면서 나는 베를린 안에 있다... 라는 것이 다시금 상기됐다.
그렇게 돌아보다가 오랜만에 저녁은 또 사람들을 구해 먹었다. 두 명 중 한 명은 나와 같은 나이였고, 석사를 이곳에서 끝내고 회사도 일년 반 동안 다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맥주를 마시면서 그가 나지막히 얘기를 했다. "여기도 사람사는 곳이라 똑같아요." 맞다. 나도 어느정도는 예상했다. 한국에서 회사를 그만 둘 결정을 한 내가 했던 고민들, 그것과 비슷한 불합리는 여기에서도 어느정도는 똑같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궁금하니까 온거겠지. 그래도 나는 이곳에서는 좀 더 학문적인 것에 도전하고 싶다. 식사가 끝나고 잠시 문앞에서 대기할 때 그가 또다시 말했다. "그래도 다른건, 독일애들은 저한테 일이 재밌냐고 먼저 물어보더라구요." 이건 다행이었다. 모든 독일인이 다 그렇진 않겠지만, 여기는 그래도 일의 재미를 좀 더 찾고, 더 낮은 연봉이라도 자기가 재미를 느끼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 꽤 있구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오랜만에 맥주를 마신 것 같았고, 나는 홀로 S-Bahn을 타고 유유히 숙소로 돌아왔다. 양조장에서 먹은 맥주는 아주 맛있었고, 조만간 한국에서 독일문화원 수업을 같이 들었던 사람을 만난다면 여기를 오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한 편으로는 한계를, 한 편으로는 기회를 들을 수 있었던 하루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