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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0 한

그동안의

by soripza


요새는 어학원을 잠깐 옮겨 시험준비반(TestDaF)에 다니고 있다. 시험은 네 가지 모듈, 읽기/듣기/쓰기/말하기로 구성되어 있고 나는 네가지 영역에서 모두 TDN4 (B2~C1수준)을 받아야 독일어로 진행되는 석사과정에 지원할 수 있다. 당초 예상은 말하기가 제일 어려울 줄 알았는데, 선생님한테 받은 피드백은 오히려 쓰기. 전체 구성은 좋지만 틀린게 너무 많다고 했다. 쓰기야말로 한국어에서 내가 제일 자신 있는 부분 중 하나인데, 오히려 외국어에서는 말하기와 순위가 뒤바뀐 사실이 약간 슬펐다.

제일 큰 문제는 나의 강박이다. C1수업을 들으면서 배운 명사화(Nominalisieren)에 너무 신경쓴(혹은 심취한) 나머지 독일어로하면 뜻을 알기어렵거나 틀린 동사나 명사를 쓰는 바람에 나의 쓰기는 시험텍스트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예컨대, ‘어제 비가 왔다. 그래서 나는 밖에 나가지 않았다.‘(Es regnete gestern, deswegen bin ich nicht draußen gegangen.)라는 문장을 나는 굳이 ‘어제의 굳은 날씨로 인하여 나는 밖에 나가지 않았다.’(Wegen der gestrigen schlechten Wetters bin ich nicht draußen gegangen.)로 쓰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줬다. 명사화는 그것이 알맞은 상황에서 문장을 압축하기 위해 사용하는거지, 좀 더 높은 레벨의 쓰기는 아니라고.

한편 이런 쓰기는 나의 언어습관과도 비롯된다. 구어체도 쓰지만 책에 나오는 문장처럼 말을 하는 것 같다는 말도 나는 많이 들었다. 그때문일지 몰라도 나는 나의 독일어실력이 한국어에는 한참에도 미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국어를 사용할때처럼 독일어를 쓰려고 했던 거다. 하지만 나는 단어나 표현도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고, 여기에서 생활한 경험도 이제 막 오개월이 됐을 뿐이다. 그건 아직 시기상조다. 어쩌면 영영 나의 독일어가 한국어처럼 자유분방해질 날은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표현으로 쓰고 말해야하는 것이다.


한편, 독일문화원에서의 수업은 한달 전에 끝났고 저번주 주말엔 오래간만에 소타(일본인)과 마티스(스위스인)을 만나 프랑스식 크레페를 먹었다. 일본에서 먹었던 디저트와는 달리 프랑스 특정 지방에선 크레페에 이것저것을 넣어서 한끼식사로 한다고 마티스가 말해줬다. 가성비는 떨어지는 것 같지만 그가 추천해준 식당에서 식사용 크레페와 후식용 크레페를 먹고, Cider(사이다?)라는 맥주보다 도수가 조금 낮고 탄산이 들어간 음료를 곁들어 마셨다. 그러면서 나는 이번 여름에 왔을 때 3개의 수업을 연속으로 같이 들었던 니콜라스(콜롬비아인)를 생각했다. 그도 내년 대학 입시를 위해 독일어자격이 필요했고 꽤나 오래 같은 수업에 있었는데… 어느순간부터 보이지 않았고 벌써 그를 못본 지 2달이

넘어간다. 8월쯤 내가 썼던 소설의 내용이 생각났다. 그곳에는 주인공과 같이 학원을 다니던 친구가 돌연히 사라지는 내용이 있었다. 내가 허구로 지어냈던 아야기가 혹여나 현실에서도 이행될 것 일까. 소설에 적었던 말처럼, 그의 연락처를 진작에 적어놓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한편, 두 번의 수업을 같이 들은 호르헤(맥시코인)과도 여행이 끝난 후 맥주 한 잔을 했다. 홍상수 영화에 진심인 그는 가끔씩 인스타그램으로 한국에 대한 것을 묻는다. 얼마전엔 BTS의 입대에 관해 물었고, 비록 공익이었지만 훈련소를 한 달 갔다온 경험을 바탕으로 군대는 좋을 것이 없는 곳이라고 둘러 말해줬다. 그동안 장필립에게 이메일 하나를 보냈고, 이번엔 빠른 답장이 왔다. 내년 봄에는 편하게 프랑스에서 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은 드디어 비자를 신청하러 간다. 근데 약속시간이 오전 8시 20분이라 집에서 넉넉잡아 7시엔 나가야한다. 독일에 오고나서 제일 일찍 일어나는 날이 될 것 같아. 그래도 비자를 받으면 이제 2차적으로 마음이 편해지는 날이 온다.

1차는 집이었고, 3차와 4차는 어학자격증과 석사합격날이 될 것 같다. 뒤의 두개는 아직 먼 날이기도 하고 해외에서의 나의 체류가 문제없으려면 비자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12월에는 결혼하는 회사동기와 로마에서 1박2일 동안 보기로 했다. 그것을 위해서고 비자취득은 중요한 일이다. 한국과 달리 여기는 일을 아날로그 적으로 처리할 때가 많다. 그리고 이민과 전쟁으로 인한 난민 문제 때문에 베를린의 비자청은 예약을 해도 날짜를 기약하기 힘들었다. 원칙적으로는 나도 쉥겐조약으로 90일 동안만 머무를 수 있는거였는데(대략 9월 초) 이미 10월 중순을 넘겼으니. 대신 비자예약을 했다는 서류를 늘 몸에 품고 다녔다.


이제 여기에 온지도 100일이 더 넘었다. 무더웠던 날씨는 쌀쌀해지고 발에 낙엽이 치인다. 생활에는 이제 완벽히 적응 한 것 같다. 지금은 누워서 여기서 지금까지 이뤘던 것을 천천히 생각해본다. 그리고 앞으로 이루고 싶은 것도 상상한다. 앞으로도 잘 되겠지. 그건 나에게 달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