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의미 버리기도 필요하다.
장마가 끝난 직후 본가에 내려왔다. 하필이면 더운 이 시기에 나만큼 나이 먹은 주택은 열기를 뿜어낸다. 그나마 아래층은 에어컨을 틀어 덜 더운데, 우리를 위해 부모님과 동생은 더운 위층에서 밤을 보낸다. 나와 아내와 아이는 가족이지만, 또한 손님이다. 눈치 빠른 아내는 우리가 너무 오래 머문 거 아니냐 한다. 괜히 죄송스럽다.
내 정치 성향을 생각한다면 절대 방문하지 않을 곳이었다. 아이의 존재는 내 신념을 부수고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에 고개 숙이게도 만드나 보다. 싫어하는 지도자의 기념관에 아이가 좋아할 만한 키즈카페가 있다 하여 이틀 연속 운전대를 잡았다. 아이도 어머니도 좋아하니 만족스럽다. 친구 한 녀석은 배신자라 농을 한다.
이제 40개월 넘긴 아이가 치카치카가 하기 싫어 40을 넘긴 아빠에게 대든다. 든든한 뒷배가 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셔서일까.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빠닥빠닥 말대답을 한다. 하루종일 좋아하는 티브이도 보고, 예쁜 드레스와 구두와 인형을 선물 받고, 어이구 어이구 귀여워해 주시니 더욱 기가 살았다. 서툰 아빠라는 핑계가 무색하게 한편으론 어이가 없고 한편으론 부모님이 살짝 원망스러웠다.
글쓰기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80억 인구는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좀 떨어져서 보면 다들 거기서 거기일 수도 있다. 잠에서 깨 눈을 뜨고, 무언가를 먹고, 누군가를 만나 대화하고, 때로는 몸을 움직이고, 비슷한 몇몇 감정을 느끼다 잠에 든다. 그렇게 누군가는 살다 죽고, 또 다른 누군가는 태어나 비슷한 인생을 살아간다.
글쓰기는 우리 삶을 담는 그릇이다. 그러니 모두가 비슷할 수밖에.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좀 더 매력 있고 흥미진진한 글도 있다. 매력적인 삶을 사는 이들이 부럽다. 나와 비슷한 삶을 흥미진진한 글로 표현하는 재주꾼들도 우러러보게 된다. 그러다 또 남들과 비교하는구나 하며 스스로를 타박하고 고개를 젓는다.
한 때, 의미 찾기가 삶의 화두였다. 학문을 공부하며 허투루 하지 않으려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문제를 풀고 싶었다. 최근 명상, 마음 챙김 관련 책을 읽으며 때로는 의미 버리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가고자 하는 길을 막고 있는 거대한 절벽을 원망할 수는 없다. 태초부터 거기 존재했으니. 오르고자 하는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린 태풍을 탓할 수도 없다. 바람과 물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일 테니. 때로는 의미를 추구하는 일이 우리를 숨 막히게 할 수도 있다.
글을 쓰는 행위가 내가 어딘가에 과하게 부여한 의미를 버리게 하고 그래서 그 삶의 무게를 덜어낼 탈출구가 되었으면 한다. 내게서 떨어져 나간 글 한 조각은 하나의 생명이 되겠지만, 그게 내 시름 하나를 덜어주어 자유롭게 날아가길 바란다. 너무 힘주어 쓰지도 말고, 이 글이 누군가에게 닿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자.
내일은 다시 먼 길을 운전해서 가야 한다. 다음 주에 원하면서 원치 않는 일들을 해치워 나가야 한다. 고속도로 주행차선을 따라 달리다 보면 내비게이션에 찍힌 남은 거리가 줄어든다. 파일을 열고 닫다 보면 주어진 일도 하나하나 해결될 것이다. 뜨거운 여름 소소한 휴가도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