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
고등학교 때 방송반을 정말 들어가고 싶었다. 면접을 봤고 떨어졌다. 학교에서는 자존심 때문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나를 데리러 온 차에 타자 마자 울음이 터졌다. 방송반 면접에 떨어졌다고 했더니 울긴 왜 우냐며 되레 소리를 지르는 엄마의 말에 뒷자석에서 숨죽여 눈물만 흘렸다.
이런 일들이 아이와 하루를 보내다가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리고 엄마처럼 자식을 키우지 않겠다고, 아이에게 절대 상처주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혹시 아이가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두려워하며 아이의 웃음에 목숨 걸고 하루 종일 전전긍긍한다. 모든 것을 아이에게 맞춰 살고 있지만 엄마를 원망하는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지 늘 자신이 없다.
엄마에 대한 원망을 키우기 시작한 건 대학에 가면서 부터이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닌데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다 나처럼 자란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집이 싫고, 엄마가 미웠다. 어린 나를 체벌한 것, 사소한 일에 자주 화를 낸 것, 매일 부부싸움하면서 불안하게 한 것 등의 불행한 가정의 흔한 요소들을 떠올리며 엄마를 미워하고, 내 결함의 원인을 모두 엄마에게로 돌렸다. 집에서는 잠만 잤고, 말을 잘 하지 않았다.
원망하는 마음을 지니고 사는 건 힘들다. 미움과 죄책감으로 뒤엉킨 마음을 감당하지 못해 주변 사람들에게 터놓기도 하고, 개인 상담을 받기도 하고, 집단 상담을 받기도 했다. 엄마에게 사과해달라고 말해 사과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만 잠시 마음이 가벼울 뿐 늘 원점으로 돌아왔다. 원망은 부메랑처럼 늘 제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결혼을 해서 멀리 떨어져 살게 되면서 엄마의 영향을 덜 받게 됐다. 가끔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여전히 갈등하는 엄마, 아빠를 봐도 감정이 동요되지 않을 수 있었다. 임신하고 출산하면서는 가난한 형편에 엄마는 얼마나 힘들게 나를 낳고 길렀을까를 생각하면서 많이 울었다. 이번에야 말로 엄마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정말 엄마를 미워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다 보니 어린 시절이 생각나고 원망하는 마음이 커진다. 또다시 원점이다.
엄마와 만남도, 전화 통화도 자주 하지 않지만 나의 모든 곳에 엄마가 함께 있다. 할머니가 되어 내 눈치를 살피는 진짜 엄마가 아닌, 언제 화를 낼지 몰라 불안하게 만들었던 옛날의 젊은 엄마가 늘 나와 같이 있다. 물건을 살 때도(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 아이와 씨름 할 때도(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사람을 대할 때도(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 늘 내 옆에서 영향을 미친다. 내 미련이 엄마를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박완서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읽었다. 엄마를 사랑하고 또 미워하는 ‘나’가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다고 했을 때, 엄마는 ‘나’가 없는 곳에서, ‘나’는 엄마가 없는 곳에서 통곡을 했다. 그리고 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심하게 서로를 대했다.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온몸을 내던진 울음은 앞으로 부드럽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통과의례, 자신에게 가하는 무두질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엄마하고 나하고 만날 수만 있었다면 둘다 울지 않았을 것이다. 따로따로니까, 서로 안 보니까 울 수 있는 울음이었다.
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내가 결혼할 때와 거의 같은 상황, 엄마와 나의 눈물이 소설 속에 있었다. 소설 속 모녀처럼 우리도 ‘서로 안 보니까 울 수 있는 울음’을 울었다. 이 울음을 통과의례라고 했던 작가는 미워했던 엄마와 화해했을까. 엄마를 미워하는 자신을 용서했을까.
영화를 보면서는 펑펑 울어도 현실의 일에는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는 나를 보고 엄마는 ‘독한 년’이라고 하곤 한다. 엄마와 나는 여전히 서로가 없는 곳에서만 울 수 있는 사이다. 엄마와 내가 만나 서로를 보면서 실컷 울며 쏟아내고 나면 지금과 다른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아직은 엄마를 마주 보고 울 용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할머니가 된 지금의 엄마와 편안하게 대화하고 싶다. 마음속에 미움, 원망이 없는 가볍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런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