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안전가옥 #내인생의빌런
*회사에서 한 달에 한 번, 한 달을 돌아보는 글을 써서 공개했다. 여기에 다시 포스팅하면서 눈에 거슬리는 표현들은 조금 수정했다.
<500일의 썸머>의 썸머와 톰, <원 데이>의 덱스터와 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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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에 #방구석여행 해시태그와 함께 올릴 옛 사진을 찾다가, 2016년 겨울에 로마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찾았습니다. 포르토에서 리스본까지, 길에서 만난 친구들과 흥청망청 마시고 뛰놀다가 홀로 이태리로 이동한 첫 날이었습니다. 짐을 풀어놓고, 애매한 시간에 식사를 하고, 조금 외로워하면서 제일 관광지처럼 보이는 곳을 헤매다가, 포로 로마노를 보게 된 거죠. 와 여기 내일 와야지 하면서 구글 맵으로 현재 위치를 찍었는데, 제가 서 있던 곳은 깜삐돌리오 언덕이었습니다.
깜삐돌리오 언덕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는, 위로 갈 수록 폭이 넓어져서 처음부터 끝까지 폭이 같아 보이는 것으로 유명한 계단이 있는 곳이고,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와 붙어 있어서 관광객이라면 지나칠 수가 없는 곳이기도 한데요. 저한테는 이 언덕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이 있었습니다. 열 아홉살, 8월 말 즈음에 선물로 건축가 오영욱의 <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라는 책을 받았었거든요.
열 아홉살 어느 날에 받은 책을 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냐면, 당연하게도(?) 좋아하는 애가 준 선물이어서 그렇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수시 1학기 제도로 저는 8월 즈음에 대학에 합격했는데요, 당시 이미 대학교 신입생 생활을 즐기고 있던 그 애가 축하 선물로 준 책이었어요. 솔직히 엄청 맘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평소엔 잘만 쓰던 편지도 없이, 오는 길에 서점에서 고른 책인 것 같았거든요. 저는 우리가 그것보단 좀 더 의미와 준비와 성의를 담은 시간을 같이 보낼 사이인 줄 알았는데. 그러고보니 이 때도 여름이었네요. 여름하면 생각나는.. 저와 비슷한 또래의 ‘프로-짝사랑러'들은 모두 한 번쯤, 과몰입했을 영화가 있지요. <500일의 썸머 (2009)>.
그 애를 생각하면 주이 디샤넬의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가 떠오를 만큼, 20대의 저도 썸머를 미워했었습니다. 아니 사랑했죠. 썸머와 그 애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분석하고, 톰의 대응과 실패를 곱씹어보고. 그 애를 ‘넌 내 연애 역사 아니 내 인생의 빌런이야아아아'하고 몰아붙이고 싶을 때 이 영화를 다시 봤습니다. 꿈결같은 대학 시절을 허비한 건 내 인생의 빌런, 내 인생의 썸머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지요. 그리고 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 한 편의 영화를 더 만났습니다. <원 데이 (2011)>.
<원 데이>는 연인이 아닌 소울 메이트로(?) 20년을 지낸 덱스터와 엠마의 이야기입니다. 20년 동안, 매년 7월 15일을 함께 보내는 ‘친구'들이에요(그래서 원 데이..). 저는 이 영화에도 푹 빠져버렸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요. 그 당시 저도 그 애를 연락은 자주하는데 만나는 건 일년에 한 번, 두 번.. 그 애 여자친구 얘기도 들어주고.. 여자친구 헤어지면 같이 술 마셔준다고 만나고.. 마치 해답지를 본 것 같았거든요. 영화 초반의 엠마가 나, 덱스터가 너 나는 물고기 너는 어장 이렇게 공식이 서 버렸습니다. 특히 <원 데이>의 결말부를 아시는 분이라면 제가 얼마나 비통한 심정이었을지.. 아실 거에요.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지나 총천연색의 이상한 일들과 다양한 빌런들을 마주하며 살았습니다. 계절이 지나고 해가 바뀌니까, <원 데이>의 결말이 새롭게 와 닿더라고요. 슬픈 사랑 이야기보다는 인생의 진리 - 모든 것은 타이밍이며 타이밍이 운명이다 - 를 설파하는 프로파간다(?) 영화 같아요. <원 데이>는 더 이상 호러물이 아니게 되었고, 이제는 썸머보다 톰이 빌런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썸머의 남편에게는 썸머가 썸머가 아니라는 사실도요. 어쩌면 톰도 누군가에게 덱스터였을수도 있겠죠.(아닐 듯) 저도 누군가에겐 썸머였을수도, 아니면 썸머가 될 수도 있고요.(이것도 아닐 듯)
*이 글을 다 쓰고 나서 오랜만에 <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를 꺼내봤습니다. 몰랐는데 책 머리에 서점 도장이 찍혀있더라고요. 제 생일이 있는 5월에 산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