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명을 앞둔 젊은이들을 위한 송가 (1917)
2025 통영국제음악제를 위해 공식 번역에 데뷔하는 영광(?)을 얻게 된 뒤, 《전쟁 레퀴엠》에서 특히나 애정과 공을 많이 들였고 그만큼 만족스러운 번역이 나왔기에 이를 회고하는 차원에서 쓰는 글이다.
아무래도 전례문 번역은 텍스트가 고정이라서 어느 정도 굳건하게 자리잡혀 있기에 굳이 해설하지 않고, 삽입된 윌프레드 오언의 시를 중심으로 번역하며 고민했던 사항들을 다뤄볼 예정이다.
전곡 번역은 아래 링크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What passing-bells for these who die as cattle?
소 잡듯 죽어 나가는 이들에게 무슨 조종이 울리랴?
Only the monstrous anger of the guns.
총포의 무지막지한 분노만이 있을 뿐.
Only the stutt'ring rifles' rapid rattle
말 더듬대는 소총들의 급박한 드르륵 소리만이
can patter out their hasty orisons.
그들을 위해 경황없는 기도문을 갈겨 주리라.
No mockeries for them from prayers or bells,
기도나 종소리에서 위령 삼아 보내오는 조롱도 없고,
nor any voice of mourning save the choirs, –
애도의 목소리도 합창 말고는 무엇 하나 없다.
the shrill, demented choirs of wailing shells;
곡을 해 대는 포탄들의 귀 찢기듯 한 광포한 합창과
and bugles calling for them from sad shires.
슬픔에 찬 지방 곳곳에서 그들을 부르는 나팔 말고는.
What candles may be held to speed them all?
그들 모두를 떠나보내려고 무슨 촛불이 들리랴?
Not in the hands of boys, but in their eyes
소년들은 손에 들지는 못해도, 눈길 속에
shall shine the holy glimmers of good-byes.
작별을 보내는 신성한 불빛이 아롱아롱 빛나리라.
The pallor of girls' brows shall be their pall;
소녀들의 창백한 이마 빛이 관을 덮을 흰 천이 되어 주리라.
their flowers the tenderness of silent minds,
묵묵한 마음의 애틋함이 곧 그들에게 바치는 꽃일지니,
and each slow dusk a drawing-down of blinds.
애도의 소등에 땅거미도 하나씩 차차 드리우리라.
가장 일반적인 번역은 「전사한/전사할 운명의/죽어가는 젊은이들/청년들을 위한 송가」지만, 그러면 원문의 뉘앙스와 비교했을 때 다소 애매해지는 부분이 있다. 우선 doomed라는 표현은 흔히 “운이 다한/파멸이 확정된/패망의 운명을 맞이한”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로, 가까운 미래에 대한 단언을 담고 있어 이미 사건이 완료된 “전사한”은 부적절하다. 시의 내용 역시 치명상을 입고 이제 죽을 일만 남은 병사를 위로할 것이 있긴 하냐고 묻고 있으니 “전사한”은 더더욱 어색해지는 셈이고, “전사할 운명의” 역시 시 내용에 비해 다소 먼 미래를 그리고 있다고 판단된다. “죽어가는”은 시제 일치 면에서는 가장 정교하지만, doom이 갖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비장한 이미지를 생각하면 “죽다”는 너무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표현이다.
사실 doomed의 뉘앙스를 정확히 전달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서술적 번역을 피할 수는 없기에, 처음에는 가장 간결한 “운이 다한”을 선택했다. 그러나 다시 곱씹어 본 결과, 해당 번역은 시에서 묘사하고 있는 압도적인 필연성, 절망감보다는 애처로움, 비참함의 정서에 가깝다고 느껴졌고, “파멸”과 같이 보다 치명적인 인상의 어휘를 포함할 필요를 느꼈다. 이에 따라 최종적으로 선택된 번역은 「절명을 앞둔 젊은이들을 위한 송가」가 되었다.
전반부는 냉소적 언어, 브리튼의 장기인 섬뜩한 음악이 결합하여 귀기 어린 전쟁터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비참한 전사자들의 최후 묘사, stutt'ring rifles' rapid rattle의 자극적인 소리 패턴, 테너가 한 음절 한 음절 무뚝뚝하게 내뱉는 가운데 빈정거림을 연상케 하는 과장된 멜리스마가 돌발적으로 등장하는 순간들을 모두 고려해 뇌리에 꽃힐 정도로 섬뜩한 이미지를 형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What candles may be held to speed them all?까지는 “전사자에게 그런 건 사치다”의 서늘한 분위기가 음악에서 계속되지만, Not in the hands of boys부터는 “그래도 대신할 것은 있다”라는 내용과 조응하여 가사도 자장가를 연상케 하는 온화한 리듬에 실려 나타난다. 여기서는 음악이 첨언하기 보다는 애틋한 분위기를 잡아 주는 정도기에 텍스트만 살려도 음악과 충분히 조화롭다고 여겨진다.
What passing-bells for these who die as cattle?
처음부터 these who die as cattle라는 강렬한 비유가 사용되고 있는데, 겉보기에는 정직하게 번역하면 되는 무난한 문장 같아 보여도 하나하나 따져 보면 이 충격을 살리기 상당히 난감한 표현. 말마따나 기존 번역들은 die as cattlte을 하나같이 정직하게 “벌레같이 죽어가는”, “소 떼처럼 죽어간” 등으로 옮겼는데, 난 그대로 쓰기엔 임팩트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죽음이라는 말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한국어 문화에서 이런 미물+죽다 조합은 무가치한 죽음을 나타내는 관용 표현으로 자리 잡아서 영어 문화에서 거의 들어볼 일 없는, 사람을 두고 감히 cattle의 죽음과 같다고 말하는 충격적 비참함의 정서를 뿜어내기엔 다들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언이 전달하는 이미지는 분명 일개 소모품으로 무가치하게 버려지는 병사들의 이미지 외에도 도축장을 연상시킬 정도로 살육이 만연한 전쟁터의 이미지까지 있다. 그래서 이런 층위를 다 살려서 번역하려고 했는데, 영어 화자가 원문에서 느낄 수준만큼 생경하고 섬뜩한 조합을 궁리해 보자니 어디 풍자의 민족 아니랄까 봐 웬만한 건 이미 누가 다 발견해서 선점을 해 놨고, 그렇다고 “도축장”울 직접 사용하면 원문의 선명하지만 여전히 암시적인 표현에 비해 너무 명백한 언급이 되다 보니 세련되게 날 선 맛이 팍 죽어서 처음엔 나도 선례 방식을 따라 "가축처럼 죽어 가는"을 선택해야 했다.
근데 그런 밍밍한 냉소는 도저히 마음에 안 들어서 계속 신경이 쏠려 있다 보니 데드라인 일주일? 5일? 정도 남은 시점에 불현듯 “소 잡듯 죽어 나가는”이 떠오르더라. 발상과 거의 동시에, 구체적으로 따져 보기도 전에 ‘이거면 조건 전부에 제대로 먹히겠는데?’라는 직관적 확신과 만족감이 들었고. 실제로도 체크해 보니, “개 잡듯”도 관용 표현으로서는 드물게 상당히 폭력적인 이미지인데 “소 잡듯”은 뇌리에 박힐 정도로 충분히 생소하기까지 하고 (“소 잡다”는 있는 말이지만 그걸 비유로 “소 잡듯”이라고 쓰는 사례는 못 본 것 같음), 추가로 사람에 따라서는 개에서 소로 상향된 스케일이 주는 어감 차이 때문에 들어오는 냉소의 펀치가 더 묵직하게 느껴질 잠재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cattle의 가장 기본 의미인 소가 얻어걸려 의미적으로도 정확한 건 덤) 거기에 죽음의 만연함을 강조하기 위해 “죽어 가는”을 “죽어 나가는”으로 시도했던 것과 “소 잡다”가 시너지까지 일으켜 절대다수는 겨우 소 하나 잡는 게 아니라 오언이 의도한,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소가 줄줄이 매달려 나오는 기계식 도축장을 연상할 거라고 보고 최종 번역으로 낙점했다.
Only the stutt'ring rifles' rapid rattle / can patter out their hasty orisons.
나는 언어유희를 한국어로도 살릴 수 있다면 살리는 것을 엄청 좋아하는 편이다. 뭐니 뭐니 해도 성취감이 장난 아니니까. (괜히 초월 번역이라 불리는 게 아니지.) 여기서 patter는 명백히 중의적인 선택으로, 드르륵 총소리(rattle)의 의미로도, 성의 없는 마구잡이 기도의 의미로도 빈틈없이 작동하는 단어이다. (영어 해설에 따르면 pray의 어원과 연결된 제3의 층위가 있다고는 하는데, 이건 한국인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아 굳이 고려하지 않았다.) 이에 대응되는 한국어 단어를 찾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총포를 냅다 쏘다”와 “말 따위를 되는대로 지껄이다”라는 의미를 모두 가진 “갈기다”로 깔끔하게 언어유희를 구현해 낼 수 있었다.
No mockeries for them from prayers or bells
여기서 for의 사용 역시 중의적이다. prayers or bells에서 오는 위령의 수신자가 전사자들이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수혜자로서 그들이 mockeries를 선물 받게 된다는 비아냥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기존 번역들을 대부분 전자의 의미만 살리고 후자의 의미는 거의 반영하지 않았더라. 나는 후자의 층위도 분명히 반영해야 한다고 보았으나, 한국어에서 다의성을 통해 세련된 번역을 만들기에는 적절한 어휘가 없어 다소 명시적이긴 해도 “기도나 종소리에서 위령 삼아 보내오는 조롱”으로 번역했다.
each slow dusk a drawing-down of blinds
a drawing-down of blinds는 문화적 특수성이 강해 한국인은 고사하고 일부 영어권 사람들에게도 생소할 수 있는 레퍼런스다. 그렇기에 각주를 달아야 한다는 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막에는 각주를 포함하기 어려우니 각주 없이도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는 의역의 필요성 또한 느꼈다. (후에 TIMF는 번역으로 자막 대신 출력물 형태를 고집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공연 진행과 동시에 각주까지 읽기엔 정보량이 많은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여전히 의역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유지했다.) “갈기다” 만큼 쉽게 떠오른 것은 아니지만, 어둠과 결부된 애도의 표현을 고민해 보니 소등이 생각나더라. 물론 오늘날의 소등은 가정 단위로 이루어졌던 영국의 소규모 의식에 비하면 평소 화려한 조명을 틀 정도로 규모 있는 시설에서 이루어진다는 차이가 있지만,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성대한 애도보다는 소박하고 진지한 추모”라는 주제 의식에 비추어 보면 행위 자체는 거창한 조명을 끄고 작위성이 극히 절제된 어둠 속에서 비극을 반추하는 일이란 점에서 원문의 맥락과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생각된다.
their flowers the tenderness of silent minds
여기서 the tenderness of silent minds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참으로 애매하다. 처음에는 브리튼의 자작자연 음반 부클릿을 참조했는데, 거기 실린 독일어 번역이 die Zärtlichkeit der Schweigenden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Schweigenden라고 하면 “침묵하는 자들”, 즉 방관자들을 연상하기 딱 좋은 단어 선정이다. 계속되는 비극 앞에 학습된 무기력으로 전쟁을 비판하기보다는 방관자로 남은 사람을 말하는 거겠지. 이 해석이 꽤 말이 되는 게, 그다음 시 「But I was Looking at the Permanent Stars」에 등장하는 시어 old despondency resigned가 정확히 같은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tenderness는 자연스레 그들을 체념에서 일으켜 세우는 도덕적 감수성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에 대해 추가적으로 조사하던 중 나는 의외의 사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오언의 시는 원래 silent minds가 아니라 patient minds를 사용하고 있었다. patient라고 하면 웬만해서는 부정적 의미가 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건 브리튼의 재해석인가?
더 깊이 조사해 본 결과, 더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원래 오언이 선택한 단어는 silent인데, 그를 시의 세계로 이끈 선배 문인 시그프리드 서순이 교정을 봐준 결과가 patient라는 것이다. 오언이 이 교정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건 그의 silent가 patient와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는 말일 테다. 그리고, 서순은 나처럼 silent를 불의에 대한 침묵으로 오해할 것을 고려하여 수정을 제안한 거겠지. 이를 받아들이면, 시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정신 사납게 떠들어 대는 교회의 추도와 대비되는, 할 수 있는 의식이 없어도 마음속에 애틋한 감정을 품고 견디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해석으로 교체하기에는 여전히 찜찜한 구석이 있다. 브리튼은 왜 오언의 원고 버전으로 회귀했는가? 단순히 음악가로서의 청각적 시어 선호가 반영된 것인가? 그의 의도가 오언이 구상한 것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해석의 방향을 판가름할 중요한 문제이지만, 확인할 방법은 그가 이 선택에 대해 해설한 내용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만약 있다면!) 그러나 개인적 작업이 아니라 외주라는 점에서 그렇게까지 파고들 시간은 많지 않았고, 결국 더 확실한 원작자의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해 그쪽을 선택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안전한 선택이었을 뿐, 답이라는 법까진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