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음 전쟁 (1917)
전곡 번역 링크
Out there, we've walked quite friendly up to Death;
전쟁통에 나가, 우리는 꽤나 친근하게 죽음에게로 걸어갔네.
sat down and eaten with him, cool and bland,
자리에 앉아 그와 함께 식사했지. 차분하고 덤덤하게.
pardoned his spilling mess-tins in our hand.
우리 손에 반합을 엎어도 좀 봐주고.
We've sniff'd the green thick odour of his breath,
우리는 그가 내뿜는 초록빛의 짙은 악취를 들이마셨네.
our eyes wept, but our courage didn't writhe.
눈에선 눈물이 났지만, 우리 용기는 뒤틀리지도 않았다네.
He's spat at us with bullets
그는 우리에게 총알을 뱉어 댔고,
and he's coughed shrapnel.
그가 기침할 때면 포탄 파편이 나왔지.
We chorused when he sang aloft;
그가 하늘 높이 노래할 때 우리도 합창해 주었고,
we whistled while he shaved us with his scythe.
그가 우릴 대낫으로 면도하는 동안 우리는 휘파람을 불었네.
Oh, Death was never enemy of ours!
아, 죽음은 한 번도 우리의 적인 적이 없었어!
We laughed at him, we leagued with him, old chum.
우린 놈을 놀리기도, 놈과 연합하기도 했네. 이 오랜 절친과.
No soldier's paid to kick against his powers.
그의 권력에 한 방 먹이라고 보수를 받는 군인은 없지.
We laughed, we laughed,
우리는 웃어 댔다네. 우리는 웃어 댔다네.
knowing that better men would come, and greater wars;
더 대단한 자들이, 더 커다란 전쟁이 올 것을 알았거든.
when each proud fighter brags
그럴 때면 자긍심에 찬 전투원마다 으스댄다고.
he wars on Death – for Life;
죽음에 맞선다면서, 생명을 지킨다면서.
not men – for flags.
사람에 맞서는 건, 국기나 지키는 건 아닌가 보지.
이것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 이번에도 제목 설정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 셈이다. The Next War에 의미는 마지막에 잘 드러나듯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건재할 참전 프로파간다를 비판하기 위해 가정된 미래를 의미한다. 따라서 단순히 “다음 전쟁”으로 갈 게 아니라 좀 더 뻔하게 예측되는 확실한 미래라는 뉘앙스를 추가하는 게 맞다고 보고 “이다음 전쟁”으로 번역했다.
이 섹션은 하나부터 열까지 죽음의 무도를 가리키지 않는 것이 없다. 황당할 정도로 캐주얼하게 묘사되는 병사들과 죽음의 관계, 유쾌한 스윙 리듬으로 구성된 브리튼의 반주, 심지어 드래그 루디먼트로 뽐내기까지 하는 스네어드럼의 기운 넘치는 비트까지. 죽음이라는 두려운 존재와 발랄하고 친근한 묘사가 이루는 어조의 불일치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골짜기를 건드린다. 번역에서도 이러한 어색하고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 수 있도록 일부러 “-네”의 살짝 고풍스러운 종결 어미에 “전쟁통”, “좀 봐주다”, “한 방 먹이다” 등의 구어적 표현을 섞어 불협화음을 연출하려고 했다.
Oh, Death was never enemy of ours!
이건 사실 원문을 잘 옮겼다기보다는 상기한 전략을 잘 써먹은 사례다. 번역이 “아, 죽음은 한 번도 우리의 적인 적이 없었어!”인데, “적인 적”은 보통 번역에서는 안 할법한 짓이다. 인접한 단어들끼리 소리가 겹쳐서 동어반복 같은 어색한 느낌이 드니까. (물론 앞의 적은 “적군”의 적이고, 뒤의 적은 “~한 적”의 적이다.) 사실 맨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썼다가 다시 읽어보니까 어색한 느낌이 들길래 수정하려고 했다가, 이걸 그대로 놔두는 것도 시의 불-편한 분위기에 부합하는 선택이 아닐까 하는 묘한 호기심과 도전 정신이 생겨서 그냥 그대로 놔둬 보았다.
he wars on Death – for Life; not men – for flags.
이것도 굉장한 명문이다. 직역하자면 “그는 [으스댄다] 생명을 위해 죽음과 싸운다고. [반면] 국기를 위해 사람과 [싸우지] 않는다고.” 물론 이건 반어법이다. 전쟁의 본질이 공허한 나라 자존심 세워주려고 사람이나 죽이는 짓이라는 소리다. 그러나 여기서 문법적으로나 구성적으로 반어법의 힌트가 되는 요소는 전혀 없다. “not men – for flags”는 그냥 대구법으로 앞의 구조를 그대로 활용하고 있을뿐더러, 접속사를 대체하는 세미콜론(;)은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조차 숨겨 버린다. 우리가 이게 반어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힌트는 “men”과 “flags”가 갖는 실질적 단어의 의미가 유일한 셈이다. 이건 마치 “아, 국민 생명을 살리기 위해 죽음과 싸우는 숭고한 일을 한단 말이지? 그렇다면 국기에나 몸 바치며 똑같은 사람에 불과한 적군 죽이는 일은 아니겠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이건 논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말이다. 전자가 성립하면 후자는 당연히 성립하지 않는다. (의도=A일 때 A≠B라면 의도≠B니까.) 그런데 뒤따르는 질문이 너무나 본질을 꿰뚫고 있어서 듣는 사람은 “당연하지!”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게 된다. “잘도 그러겠다” 식으로 과장을 통한 반어법은 일절 사용하지 않으면서, 그냥 가볍게 던지는 톤으로 너무 예리한 지점을 찌르는 방식. 과연 오언이 영국 시인은 영국 시인이구나 싶어지는 대목이다.
나 역시 이런 독기 없는 싸늘함을 표현하기 위해 다소 노력을 기울였다. 처음에 그걸 의식하면서 만든 번역이 “자긴 죽음에 맞서며 생명을 지킨다고 하겠지. 사람에 맞서며 국기를 지키는 게 아니라나.”였는데, “아니라나”가 원문에 비해 업신여기는 톤이 너무 선명하다고 보고 나중엔 “죽음에 맞선다면서, 생명을 지킨다면서. 사람에 맞선다고, 국기나 지킨다고는 말 안 하지.”라고 수정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말 안 하지”가 정답이 아니라는 걸 살짝 명시적으로 드러내 버리는 것 같아서 최종적으로는 표독함을 최대한 표백한 “죽음에 맞선다면서, 생명을 지킨다면서. 사람에 맞서는 건, 국기나 지키는 건 아닌가 보지.”가 되었다.
타협점
our eyes wept, but our courage didn't writhe.
원문은 의인화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걸 직역해서 “눈은 눈물을 흘렸지만, 우리의 용기는 몸을 뒤틀지 않았네”라고 하면 뭔가 뒷부분이 어색한 느낌이 들더라. 아마 writhe를 한국어로 번역하려면 “몸”을 목적어로 추가하지 않고 깔끔하게 만들기 어려운데 그러면 용기가 따로 몸이 있는 것처럼 묘사하다 보니 병사들 본인의 이야기처럼 안 들려서 그런 듯. 그래서 다소 모호한 수동태로 “우리 용기는 뒤틀리지도 않았다네”로 번역하긴 했는데, 좀 더 원문의 방향을 따를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그래도 어쩌랴.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