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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킵고잉 Nov 15. 2021

89화_신박한 정리

엄마는 원래 아주 깔끔한 성격이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다면, 적당한 것을 살 바에야 아예 안사신다. 그래서 부모님 집에는 오래된 물건이 많다. 당장 엄마가 일상복으로 입고 계신 옷도 30년은 된 옷이다.


이렇게 말하면 엄마가 미니멀리스트인 것 같지만, 현실은 완벽한 그 반대라고 할 수 있겠다. 사지도 않지만, 버리지도 않기 때문. 오랜 세월과 어두워지는 시력, 아껴쓰는 습관이 시너지를 일으키자, 집안 구석 구석 누가 돈을 주고 가져가래도 가져가지 않을 물건들이 창궐하는데, 버릴라 치면 "놔~둬~~, 언젠간 다 쓸 일이 있다니까" 이러시는데, 장담컨데 이 물건 앞으로도 10년간 쓸 일이 없다.


나: "이 물건이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았잖아??"

엄마: "아 글쎄, 놔~둬~~"


신박한 정리는 엄마가 서랍장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시작되었다. 뭐 적당한 걸로 하나 사드리면 되니까 문제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땐 몰랐다. 곧 우주적 스케일의 문제에 봉착할 것이라는 사실을...


서랍장은 샀는데, 서랍장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서랍장이 들어가야 할 자리엔 이미 반 백 년는 족히 되보이는 물건들이 흡사 거기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한치의 이질감도 없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들이 뭐였냐면, 엄마가 젊은 날 잠깐 했었던 양말사업의 잔재인 30년 된 양말 한 트럭, 엄마 아빠 두 분이 다 못드실 것 같은 양의 쌀, 동네 사람들이 다 먹어도 남을 것 같은 양의 깨와 콩 (이것들은 모두 삼다수 패트병에 자기복제라도 한 것처럼 나눠져 있다), 농협과 각종 은행이 준 철 지난 달력들 모음, 정체를 알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보자기 모음 (왜 모으실까..), 세상의 모든 비닐봉지를 다 수거한 듯한 비닐봉지 모음, 엄마가 입은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로맨틱한 디자인의 앞치마들, 금방이라도 해체될 것 같은 선풍기, 큰 교잣상 4개, 군용담요 및 각종 무릎덮개 모음, 이제는 찾아볼 일 없는 영한사전, 갑자기 튀어나오는 20세기 브랜드 미찌코 런던과 써지오 바렌테 옷, 20년 전 잃어버린줄 알았던 모자… 이 모든 것들이 게임오버 직전의 테트리스처럼 차곡 차곡 쌓여 있었다.


결국 그 거대한 산더미를 하나 하나 해체하여 버리는 것에서부터 신박한 정리는 시작한다. 하루 종일 정리하고, 묶고, 나르는 중노동. 엄마에게 곤도 마리에의 '설레지않으면 버려라' 원칙을 설명해주었다. 물건을 꼭 안고 설레는지 물어보고, 설레지않으면 '고마웠어~' 하고 버리라고 했다. 엄마는 다 설렌단다. 허허허...


그런데 물건들을 파뒹기다 보니 정말 설레는 물건들이 나온다. 유치원 때 졸업앨범도 나오고, 중, 고등학교 졸업앨범도 나온다. 나의 첫 회사 월급 봉투에 100만원 찍힌 월급명세서도 나오고, 지금은 중학생이 된 조카가 아기 때 쓴 삐뚤삐뚤한 편지도 나온다. 엄마의 젊었을 적 사진도 나오고, 나의 어린 시절 사진도 나오고, 엄마가 직접 떠서 입혀주신 손뜨게 스웨터도, 조끼도 나온다.


짐을 싸다가 편지 보고 울고, 다시 짐을 싸다가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고 또 운다. 테트리스 조각들을 하나 하나 떼어낼 때마다 조각에 새겨져있는 엄마의 젊음과 우리의 어린 시절에 눈물 찔끔, 웃음 조금을 보태어 모두 모두 버려 버렸다.


부모님이 외출했을 때를 기회로, 대부분의 물건들을 집중적으로 버렸다. 저녁이 되어 서울행 고속버스에 이 한몸 뉘이고 나서야 휴식이 찾아왔다.


이렇게, 엄마 창고방의 신박한 정리 대장정이 마무리되었다. 아빠가 수고했다며 10만원을 주셨다. 참고로 아빠, 신박한 정리팀의 일당은 100만원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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