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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Jul 30. 2020

동질적인 존재로 완성되는 작지만 온전한 세계, <로마>

알폰소 쿠아론 <로마>의 경이로움에 대하여

*

존경하는 영화 <로마>에 대해 긴 글을 썼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멕시코 출신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멕시코시티 내 ‘로마’ 지역에서 보냈던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영화 <로마>(2018). 이 영화를 보고 난 첫 감상은 경이로움이었다. 1970년대 멕시코를 완벽에 가깝게 재현해낸 미술, 상징하는 바가 다소 상반되는 흑백 화면과 4K 화질의 조합이 이뤄내는 낯선 아름다움, 사방에서 들려오는 거리와 자연의 다양한 소리들. (이 영화는 보통 블록버스터나 음악 영화들이 사용하곤 하는 입체 음향 시스템으로 제작되었는데, 여느 대규모 영화 못지 않게 그 효과를 제대로 활용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그 자체로 무척 훌륭해서 영화의 일부만 떼어다가 두고두고 봐도 좋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들을 만들어내지만, 기술적 완성도가 영화의 우수성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에 이들에 대해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난 같은 감독의 기술적으로 아주 잘 만든 영화 <그래비티>(2013)에서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 관객이므로, 내가 <로마>를 보고 느낀 감탄은 달리 설명될 필요가 있다.


<로마>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장면이 있다. 영화 후반부,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는 아이들을 데리고 급작스레 바다로 여행을 떠난다. 남편이 집에 있는 자기 짐들을 가져가는 동안 자리를 피해주기 위한 여행이다. 소피아의 제안으로, 아이를 사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도 기분 전환차 동행한다. 장면은 다음이다. 여행 둘째 날 바다에서 물놀이를 하던 아이들  파코(카를로스 페랄타)와 소피(다니엘라 데메사)가 거센 파도에 그만 깊은 물에 빠진다. 그리고 이를 본 클레오가 물에 들어가 아슬하게 아이들을 구해 데리고 나온다. 이 장면이 인상적인 이유는 “멀리 가지 마"라는 반복되는 어른들의 복선 같은 말과 거대한 파도의 이미지가 결합되어 생긴 우리의 불안감 때문이기도, 수영을 못하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물에 들어간 클레오의 용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클레오가 아이들을 무사히 데리고 나오는 순간 우리의 마음엔 다행이라는 생각을 넘어선 이상하고 격한 감동이 인다.


이전에 클레오가 양수가 일찍 터지는 바람에 아이를 사산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와 반대로 이번엔 부족하기는커녕 물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클레오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다. 이러한 대비 때문에 이 장면은 마치 클레오가 아이들을 단지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낳는’ 것처럼 느껴진다. 넓은 화면을 가득 채우는 물 속에서 클레오는 다시 그런 불행을 반복하지 않겠다는듯이, 혹은 이번엔 상황이 다르니(물이 충분히 있으니 오히려) 가능한 일인 것처럼 꿋꿋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다. 뭍에 나와 주저앉은 클레오는 이 상황에 뜬금없는 고백을 한다. “전 원하지 않았어요. 그 애를 원치 않았어요.” 당초 아이를 원하지 않았으며 그 아이가 죽은 채로 세상에 나온 게 자기 탓일 수 있다는 죄책감의 고백. 파코와 소피를 죽음에서 구한 뒤 이어지는 클레오의 이 고백은 정말로 뜬금없는 것은 아닐 지다. 클레오가 파도를 헤치는 동안 죽은 아이를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영화는 이 장면으로 그녀의 죄책감을 덜어내준다.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는 경험은 두 번째 생명을 얻는 것 같은 느낌이리라. 그래서 넘치는 물 안에서 클레오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순간은 클레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특별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모습 역시 많이 언급되는 부분인데,  소피아와 아이들, 그리고 클레오는 포옹으로 합일되며 하나의 산(山)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가까운 듯하면서도 어떤 지점에선 격차를 좁히지 못하던 이들이 완전히 한몸이 되는 이 순간은 영화의 절정처럼 느껴진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이전까지의 균열과 불안과 소란이 모두 사그라지며, 비로소 ‘온전한 하나의 세계’가 이뤄진 느낌까지 든다. 이 느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얼마 동안 나는 이 결합의 의미를 사랑을 통해 인종 및 계급 차이를 극복한 것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자니 이 장면에 대한 내 감흥이 부정될 위기에 처하게 됐는데, 다음의 두 가지 사소한 의문이 떠올라서였다. 첫째, 인종에 따라 직업과 사는 동네와 그 외 여러 가지가 명백히 나뉘는 이 사회의 구조가 그대로인 이상 그 결합은 한시적이고 더 나아가 환상적인 것이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들의 결합엔 지속적이고 본질적이라는 인상이 있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둘째, 이어지는 장면에서 클레오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여느 때처럼  소피아네 가사 노동을 하는데, 그 모습이 불편하기는커녕 평화롭게 느껴진다. 앞의 결합이 계급 간 격차 극복을 의미한다면 바로 이어지는 이 모습이 불편하게 느껴져야 하지 않을까? 혹시 영화가 클레오를 신비화하는 데 성공해 우리가 불편함을 못 느끼게 된 걸까?


의문들이 풀리길 바라며 이 결합의 큰 두 축인 소피아와 클레오의 관계를 다시 차근히 살펴보려 한다. 클레오는 남자친구 페르민(호르헤 안토니오 게레로)이 사라진 뒤, 다음 장면에서 걱정 가득한 얼굴로 소피아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러 간다. 소피아는 바람난 남편 안토니오(페르난도 그레디아가)의 가출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자신의 엄마 테레사(베로니카 가르시아)와 의논하는 중이다. 할 말이 있다는 클레오를 잠시 기다리게 하고 먼저 소피아는 아이들을 불러 아빠의 출장이 길어졌다고 꾸며 말한다. 아이들이 아빠에게 편지를 쓰러 자리를 뜨고, 이어 클레오의 차례. 클레오는 임신한 것 같다는 것부터 아이 아빠가 사라졌다는 것까지 소피아에게 모든 상황을 터놓는다. 자신을 해고할 거냐는 물음에 소피아는 화들짝 놀라며 그럴 리 없다고 답한다.


무릎을 맞대고 여느 때보다 가깝게 앉아있는 이 순간은 두 사람 관계의 전환점처럼 느껴지는 대목이다. 때문에 그 좁아진 거리는 “버려진 여자들이라는 연대감"으로 표현되곤 하는데(<씨네21> 1188호에서 윤웅원 건축가는 위 장면을 “남편으로부터 버려진 자신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아니 버려진 여자들이라는 연대감으로, 소피아는 클레오의 출산 준비를 돕는다"고 표현한다), 좀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느 날 잔뜩 취해 귀가한 소피아가 다짜고짜 클레오를 붙잡고 “누가 뭐래도 우리 여자들은 혼자”라고 말하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같은 처지라는 의식이 겉으로 발화되는 유일한 이 순간은 따뜻하기는커녕 비통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심지어 같은 날 낮에 소피아는 남편의 가출에 대해 통화하는 내용을 아이가 엿들을 수 있게 두었다는 이유로 클레오를 심하게 윽박질렀다. 버려졌다는 연대감이 둘을 이어주고 있다면 안토니오에 대한 화풀이가 클레오를 향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공통된 불행이 접점이 되기는 하지만(아델라(낸시 가르시아 가르시아)가 연대의 순간에서 매번 소외되는 이유는 그녀에겐 이 접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만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기는 부족해보인다. 두 사람은 버려졌다는 사실보다 본질적인 어떤 동질성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해변 장면의 포옹에서 무결한 일체감이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이들과 이질적인 존재들을 떠올려보는 게 클레오와 소피아의 동질성을 설명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클레오가 소피아에게 임신 사실을 터놓는 장면에서 우리는 두 사람이 서로의 불행을 이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두 사람은 무엇이 안타까운 일인지, 달리 말하면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불행에 대해 같이 슬퍼할 줄 안다. 이러한 두 사람을 한 세계로 본다면 반대 편에는 이들의 불행을 이해하지 못하고(이해할 의사가 없고) 이들을 존중하지 않는 세계가 있다. 안토니오와 페르민으로 대변되는 세계. 너무 커서 자기 집 차고에도 억지로 들어가는 포드 세단 같은 세계. 비가 아니라 우박 같은 세계. 눈물 흘리지 않는 세계. 이 세계는 딱딱하고 건조한 성질로 다른 세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위협한다.


무술에 인생을 걸었다는 페르민은 모래 바람 흩날리는 벌판에서 훈련을 받는다. 사실 그는 정부 지원을 받는 무장단체에 소속되어 있던 것인데, 하필 클레오가 테레사와 함께 아기 침대를 보러 나온 날 그 무장단체가 학생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며 시내가 온통 혼비백산이 된다. (이는 1971년 멕시코에 실제 있었던 ‘성체 축일 대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내 시위 학생을 잡으러 가구점에 올라온 페르민과 클레오가 마주하기에 이르는데, 충격을 받은 클레오의 양수가 터지고 이는 결국 사산의 원인이 된다. 페르민과 그가 속한 딱딱하고 건조한 세계는 결국 한 생명, 아니 여러 생명의 물기를 말려버린다. 관련해, 클레오가 뒤늦게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위로하던 안토니오의 모습이 떠오른다. 괜찮을 거라며 클레오를 제법 잘 안심시키던 안토니오는 분만실 앞에서 말한다. “난 들어가면 안된다고 하실거야." 곧장 이어지는 담당의사의 원하면 같이 들어와도 된다는 답변에도 불구하고 그는 흥건하고 축축한 공간, 탄생의 공간, 분만실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안토니오와 페르민 없이는 완전하지 않을 것 같았던 소피아와 클레오는 도리어 이들이 등장하지 않는 순간부터 온전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것처럼 느껴진다. 생명에 관심 없는 안토니오, 페르민은 생명을 낳고 기르는 소피아, 클레오와 이질적이다. 그들이 빠져나가고 동질적인 존재들만 남은 세계는 작고 연약하더라도 보다 온전해진다. 돈이 없을지라도 위태로워 보이지는 않으며, 힘이 없더라도 오히려 그래서 자연스럽게 흐른다. 그러니까 난, 소피아와 클레오로 대표되는 여성 세계의 화합이 그간 남성 존재들에 의해 방해받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성별 구도로 일단락하려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 열망이 ‘무력’으로 짓밟히는 등 물리적 힘이 우위에 있는 세상에서, 약자의 위치에 속한 이들(여성과 아이로 대변되는)이 함께 호흡하며 진짜 중요한 가치(생명과 같은)를 지켜내는 모습을 지지하는 것이다. 생명성이 짙은 세계. 물의 세계. 당연히 영화도 오프닝부터 물의 이미지를 강조할 만큼 이 세계를 지지하고 찬미한다. 말하자면, 위협적인 동작은 잘 하면서 다리 하나로 몸을 지탱하지는 못하는 남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부드럽게’ 그것을 해내는 클레오는 누구보다 고결해보인다.


영화 후반부, 여행에 가서도 여전히 처져 있는 클레오에게 막내 아이 페페(마르코 그라프)가 말한다. “클레오, 벙어리가 됐어?” 전에 형과 싸워 의기소침해졌을 때 클레오가 자신을 달래주며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다. 이들은 앞으로도 이렇게 주고 받으며 잘 살 것 같다. 동질적인 존재들로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들은 또한 세상에 속한 하나의 개체로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도 끊임없이 호흡한다. 거리의 행진대, 동물들, 그리고 바람, 산불, 햇빛 같은 배경은 인물을 위해 멈춰있지 않고 <로마> 스스로 지지하는 세계처럼 유하게 흐르는 카메라 안에서 살아 숨쉰다. 인물들은 거길 지나갈 뿐이다. 이것이 <로마>에서 숭고미가 느껴지는 이유다. 소피아와 클레오가 이룬 어떤 하나의 세계가 폐쇄적이지 않고 활기 있는 이유기도 하다. 다른 존재들과 끊임없이 호흡하며 흘러가는 게 삶의 가장 아름다운 지점 아닐까. 나는 <로마>처럼 그 자체가 삶인 영화를 본 적 없다. 이것이 <로마>가 경이로운 이유다.



2020. 02.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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