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가 주어진 일상에서도 적절한 통제로 안도를 느끼는 편이다. 루틴을 만들어 정확히 지킬 때 얻는 행복감에 오랜 시간 익숙해졌고, 하얀 메모지에 해야 할 일들을 즐겁게 써 내려가다가도 어느샌가 하지 말아야 할 습관들로 꼼꼼히 채우기도 했다. '밀가루 먹지 말기. 자기 전에 핸드폰 보지말기. 자세 흐트러지지 않기..' 습관뿐이겠는가. 불쑥 올라오는 감정과 기분들도 통제하려 애썼다. '불안해하지 않기.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기. 징징대지 않기' 온통 '않기 아니면 말기'로 가득 찬 나를 향한 통제들. (쓰면서도 괴로운 마음이 올라온다)
회사를 잠시 벗어나 여유를 찾게 되면서 그동안 나를 통제하던 모든 것들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있다. 계획한 대로 온전히 살아내지 않아도 하루는 편안히 잘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꽤나 엄청난 노력을 통해 알아가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를 보낸 날엔 자동반사처럼 '뭐라도 해'가 바로 튀어나오던 삶의 방식을 바꿔가는 것이 영 쉽지만은 않지만, 최선을 다해 게으른 일상을 지향하는 중이다.
'앞머리를 자를까 말까. 단발할까, 그냥 기를까. 펌은 좀 나이 들어 보이려나? 염색은 머릿결 많이 상하겠지?'
무슨 머리모양 하나 바꾸는데도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나, 참 피곤하다 싶지만 '고작' 그 머리모양 하나 바꾸는데도 그 간 많은 시간을 들여왔다. 적어도 반년은 한 번 정한 머리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 앞에선 세상에서 제일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발 후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거지존과의 싸움. 염색 후 길어 나오는 머리카락이 만들어 내는 무지개떡. 이 인내심까지 수반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비장해지는지.
나름 빨리 자라나는 머리카락 덕분에 요리조리 여러 가지 헤어스타일을 많이 해 왔었다. 그래봤자 '회사원으로서 튀지 않는 차분함'을 지키는 선이긴 했다. 탈색을 해도 폭탄머리를 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우선 회사 안에서 튀기 싫고,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하기까지의 그 간 심경 변화와 사유를 여기저기서 물어올 생각을 하면 (머리의 변화 폭이 클수록 물어보는 주변은 많아진다) 적절한 선을 지키는 게 여러모로 마음이 편했다.
휴직 후엔 가만히 머리카락을 길러보았다. 속옷의 뒷 선을 넘어서까지 머리카락을 길러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 다음 머리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가득했다. 사실 오래전부터 뽀글뽀글 라면머리같은 히피펌을 해 보고 싶었지만, 늘 그 마음을 통제했다. 그 간의 통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유로운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통제를 하고 있었다. '머릿결 많이 상할 것 같은데, 혹시라도 아기 생기면 머리 관리 안될 텐데 오버하지 말고 그냥 짧게 자르자. 더운데 치렁치렁 풀고 다니면 보기만 해도 참 덥겠군. 이런 머리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안 어울릴게 분명해'
아오 정말!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왜 이렇게 많을까. 통제하던 버릇은 헤어스타일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작 머리카락인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헤어스타일 정도 밖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잔잔히 들던 순간. 미용실 언니(사실 한참 동생임ㅋㅋ)에게 예약 카톡을 했다.
"언니- 저 히피펌 하려고요! 혹시 제가 미용실 가서 갑자기 안 한다고 해도 꼭 해 주세요!!"
예약날짜가 다가오고, 가는 내내 네이버에 '히피펌스타일'을 검색하며 그 간 하고 싶던 헤어스타일을 저장했다. 도착하니 미용실 언니는 이미 잔잔한 헤어롤을 준비해 두었다. 준비해 놓은 파마약과 미용도구들을 보니 이제 와서 안 하겠다는 말이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하는 거야 뭐 어때. 아니면 조금 지내다가 볼륨매직하고 확 잘라버리면 돼' 그렇게 합리화와 미용실 언니의 밀어붙임이 더해져 머리를 뽀글뽀글 말게 되었다.
짜잔! 완성! 이게 10년 동안 하고 싶었던 헤어스타일이구나.
"yoon님, 진짜 잘 어울려요!"
늘 어떤 머리든 잘 어울린다고 해주는 미용실 언니라 객관성은 잃은 지 오래지만, 그저 생각만 해 오던 헤어스타일을 진짜 해 보다니! 기분전환을 더해 통제를 벗어난 해방감과 함께 꼬불꼬불 머리카락 속으로 공기가 들어와 그런지 무거움이 없어지고 생각보다 산뜻한 느낌이 들었다. 고작 머리카락일 뿐인데 이런 복합적인 기분을 가져다주다니.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난 뒤 만난 몇 안 되는 지인들의 피드백도 마음에 든다. '언니~ 프랑스 사람 같아! 너무 러블리해!', '언니 이번 머리 진짜 인생 머리다!', '차장님, 완전 잘 어울려요. 저도 이런 머리 하고 싶어요!' 예전 같으면 손사래를 치며 '아니야 뭔가 이상하지. 물미역 같지. 라면 같지' 하며 나를 낮춰가며 멋쩍어했을 텐데. 그 칭찬도 충분히 고마워하고 받아들였다. '그래? 고마워! 큰 마음먹고 했는데 예쁘다고 해주니 고맙네' (나 좋으라고 한 머리지만 다른사람 눈에도 예쁘다니 더 좋군)
살며 살아가며 점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니 헤어스타일만큼은 내 마음대로 하련다. 이것 만은 하지 말아야 할 이유. 안 되는 이유를 모두 무시해 버릴 나만의 고유영역과 자유영역으로 지정하기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