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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윤 Aug 16. 2023

더워도 너무 더운 이 여름의 책캉스

휴직 24, 25주 차 기록




"엄마- 내가 이상한 건지 날씨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다. 이번 여름 진짜 덥노. 거의 동남아 수준이고. 뜨거운 건 둘째치고 습도가 완전 미쳤는데?"

"니 나이 더 들어봐라- 지금보다 더운 거랑 추운 거 더 못 참는다"

(강렬한 부산 사투리의 통화내용을 담지 못하여 아쉽)


한 여름에도 얇은 긴 옷은 항상 가방 한 구석에 둘둘 말아 가지고 다녔고, 땀을 뻘뻘 흘리는 친구들을 보면서도 저렇게까지 더울까 싶을 정도로 더위를 안 타는 편이었다. '겨울이 좋아? 여름이 좋아?'는 질문엔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당연히 여름. 추운 거 절대 못 참아'라고 답을 하던 나였는데, 올해 여름은 정말 이건 아니다 싶다. 진짜 엄마 말처럼 나이가 들어갈수록 체질이 변한다는데 그래서인가 싶다가도, 날씨 어플에 최고기온 36-34-35가 반복되며 구름 한 점 없는 쨍쨍한 해와 함께 한주 내내 적혀있는 걸 보면 나만 이런 건 아니겠지 싶다. 내리쬐는 땡볕은 누구를 만나고 싶은 마음도, 사부작거릴 용기조차도 사라지게 만들었다.


남편이 출근하며 '에어컨 켜고 시원하게 있어'라고 다정하게 말해주지만 무급 휴직자는 전기세가 두렵다. (환경론자까지는 아니지만 에어컨 사용이 지구를 더 덥게 만들고, 그 더위로 인해 다시 에어컨을 켜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하니 그것도 좀 어째 마음에 걸린다.) 아침 요가 수업 후, 땀을 쫙 내고 집에 오면 당장이라도 에어컨 전원 버튼을 켜고 싶지만 에어컨 켜는 시작 시간을 30분이라도 늦추고 싶은 나는 '여기가 한증막이다. 고온 습식 사우나다'라고 전기세와의 싸움에서 정신승리를 하며 조금 더 스트레칭을 한 뒤에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한다.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면 더위가 덜 느껴지니 처음엔 26도로 에어컨을 켰다가 소심하게 27, 28도로 올려가며 최대한 잔잔히 켜 둔다. (사실 너무 뜨거운 날은 전기세고 지구온난화고 뭐고 없다. 선풍기까지 풀가동이다. 내가 살고 봐야지. 하 너무 덥다.)


샤워 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솔솔 나오는 거실. 리클라이너 쇼파를 최대한 평평한 각도로 만들어 기대어 (아니 누워있는 수준) 있으면 진심 호캉스가 따로 없다. 나에겐 열 카페 열 풀빌라 부럽지 않은 공간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 별 일이 없으면 월급날은 곧장 서점으로 향했다. 비록 은행 어플 속에서 숫자로만 볼 수 있지 만져볼 수는 없는 월급이지만, 이것저것 빠져나가고 나면 얼마 남지는 않는 월급이겠지만,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보고 또 살 수 있는 기분 좋은 날이었다. (물론 욕심만큼 다 살 순 없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책 냄새를 맡는 것도, 자잘자잘한 문구류와 필기구를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점점 사회생활 연차가 쌓이며 그런 낭만은 많이 사라졌다. 언젠가부턴 서점에 들러도 빈 손으로 집에 오는 날이 많았다. 새롭게 읽어보고 싶은 책도, 사서 집에 두고 싶을 정도인 책도 점점 별로 없었다. 연습장에 써가며 읽기도 했을 만큼 진심이었던 자기계발서는 '글 쓴 사람도 진짜 자기가 말한 대로 살고 있나?'로, 공감능력을 극대화 해 주었던 에세이들은 '그만 징징거리자. 결국 내가 그렇게 안 살아내면 다 소용없단 것 아냐?'로, 머리 위에 그림을 그려가며 읽던 소설은 '현실에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인데 이런 거 읽어서 뭐 하나'로, 쏟아지는 경제나 부동산 서적은 '회사원 돈 버는 건 거기서 거기 일거고, 나머진 어차피 다 운이잖아!'로 변해 버렸다.


아마 내 마음의 여유가 없던 탓이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듀얼모드가 잘 안 되는 편인데 머릿속이 온통 '일일일일'로 꽉 차 있으니 책이 눈에 들어올 리가 있었을까. 정말 그렇게 점점 독서량이 줄어들다가 휴직 직전 1~2년 간은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 접힌 모서리만을 다시 발췌해서 읽는 수준이었다. (나는 좋아하는 구절이 있으면 책 귀퉁이를 접는다. 책에 가상의 가로선을 그어 위쪽에 좋아하는 글귀가 있으면 위쪽 모서리를, 아래쪽에 있으면 아래쪽 모서리를 접는다. 그리고 다시 보고 싶을 땐 접힌 부분만 찾아서 읽는다.)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다시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휴직 23주 차를 맞이하는 지금,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요즘엔 지역 내의 도서관들이 참 잘 되어있다. 내가 빌려보고 싶은 책이 근처 도서관에 없으면, '상호대차 서비스'를 이용해서 내가 다니는 도서관까지 가져다주기도 한다. 빌린 책은 모서리를 접을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두거나 연습장에 써 두면 된다), 책장에 모셔만 두고 읽지 않은 책, 다시 보고 싶은 책까지. 그렇게 읽다 보니 휴직 후 읽은 책이 지금까지 40여 권은 된다. 한 주에 1~2권씩은 읽고 있는 것 같다. '읽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아닌 '읽고 싶은' 마음으로.


어린 시절부터 책이 나에게 항상 주었던 건 편안한 안정감이었다.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은 내가 여유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고, 책을 읽고 있을 때만큼은 딴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기에 불안한 느낌이 들 때면 더 책과 서점을 찾았다. 확실한 조언이나 공감을 얻고 싶을 때도, 내 감정이 해소되지 않을 때도, 무언가를 알고 싶을 때도, 책 냄새를 맡고 싶을 때도. 나는 책을 찾아왔다.


'더워서 못 나가겠다'는 대 명제를 방패막 삼아 이번 주도 책과 함께한다. 읽을 책 두 권을 미리 탁자에 가져다 두고, 컷팅수박을 한 국자 푸욱 떠서 밥그릇에 담아 옆에 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수박 한 공기와 책이 함께하니 편안하다.


이 여름, 나의 책캉스. 넘기는 책장 소리가 참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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