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서울 본사로 올라오기 전 까진 부산에 있는 지역본부에서 쭉 근무를 했었다. 그 본부 사무실 가까이에 부산에서 아주 유명한 로또가게가 있었는데 (검색해 보니 지금 기준으로 1등이 46번, 2등이 195번이 당첨되었다고 한다 ㄷㄷ) 점심시간에 어쩌다 그 근처에서 밥을 먹게 되는 날이면 로또를 사려고 뱀처럼 똬리를 길게 튼 사람들을 보며 '저렇게 많이 저기서 사니까 당첨도 많이 되는 거겠지' 하며 웃으며 지나치곤 했다.
지금은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지만, (뭔가 회사에서 열받는 일이 있었던 건지, 로또만 되면 이 놈의 회사 바로 그만둔다 생각하며 식식거렸던 감정만 기억에 남아있다.) 그 명당 로또가게에서 반드시 로또를 사야겠다는 생각에 '오빠, 오늘 저녁에 나 무조건 칼퇴! 데이트하기 전에 로또부터 사자'라고 그 당시 남친(지금의 남편)에게 주저 없이 카톡을 보냈었다.
그렇게 로또를 사러 가는 길, 당시 서른세 살이었던 남편은 살면서 로또를 단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니 그게 가능한가. '진짜 살면서 단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다고? 왜? 도대체?' 너무 신기해서 몇 번씩이나 되물으며 그 명당 로또가게에 도착했다. 로또 숫자를 고를 수 있는 종이와 검정 사인펜을 하나 꺼내 들고 자동 3개와 심혈을 기울인 열두 개의 숫자들을 골라 수동 2개까지 완성했다. 둘이서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숫자를 고르면서도 킥킥거리며 즐겁게 길고 긴 줄에 함께 서 있던 그때, 남편이 내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했다.
"yoon, 여기 서 있는 사람들 표정 가만히 잘 봐봐. 지금 우리만 웃고 있는 거 보여?"
그랬다. 정말 주변을 둘러보니 그 긴 줄 속에서 우리만 조용히 수다를 떨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여태껏 로또를 사면서도 당첨이 되면 좋겠지만, 나에게 그런 벼락 행운은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뽑기 운이 지지리도 없는 내가 숫자 3개라도 맞아서 5등이라도 되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함께), 당첨이 되지 않더라도 아쉽기야 하겠지만 크게 상관이 없긴 했다. 그런데 내 뒤도, 내 앞도 비장하다 못해 마치 '1등 당첨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결연에 차 있는 것 같은 어두운 표정들의 사람들 속에서 조금은 무서운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유로 복권을 구입하는 분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유난히 그 날의 내 주변이 그랬던 것) 그 때, 남편이 왜 로또를 사지 않는지를 직감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남편은 로또 1등에 당첨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괜찮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표정들을 보고 난 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나는 꽤 오랫동안 로또를 거의 사지 않았다. (로또 사야겠다고 말은 하지만 정말로 사러 간 적도 거의 없었다.) 처음 서울에 올라오면서 서울은 집도 왜 이렇게 비싸냐고 로또라도 해야겠다 싶어 한 번, 2년이 지나 무리하고 또 무리해서 집을 알아보며 제발 1등 됐으면 좋겠다 생각에 한 번, 회사 진짜 열받아서 더는 못 다니겠다고 후배랑 종로5가 명당 로또가게까지 걸어가서 산 게 한 번. 내 돈으로 로또를 산 기억은 정말 간절함으로 가득했던 이 세 번 정도 밖엔 없다. (물론 세 번 다 꽝이다. 다음 기회에ㅜ)
하지만 요즘 다시 슬슬 로또를 사기 시작했다. 평소엔 현금을 잘 들고 다니지 않는데, 수선 맡긴 옷을 찾으며 거스름돈으로 받은 5천 원 한 장이 화근이었다. 별생각 없이 '로또나 사 볼까' 했는데 그 복권이 5천 원에 당첨되어 교환하고, 그 새로운 복권이 또 5천 원에 당첨돼서 세 번째 일주일 희망 연장권을 교환하러 가는 길엔 다시 끝없는 행복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빠. 두 번 연속으로 당첨이 됐다는 건 하늘의 계시라니까. 난 로또 1등 되면 오빠한테만 말하고 농협본점이 서대문이니까 거기까지 걸어갈 거야. 마지막 서민체험 만끽하고 조금 더 걸어서 회사 사표까지 깔끔하게 내고 올게. 그리고 부모님, 시부모님 건강검진 제일 비싼 걸로 해 드릴 거야. 그러고 나서는 좀 더 천천히 생각해 볼게 " (쓰면서도 즐겁다ㅋㅋ)
남편은 '넌 벌써 상상만으로도 1억 정도 행복 한 것 같다. 5천 원 들여서 그렇게까지 행복회로 돌릴 거면 가성비 괜찮은 것 같은데?' 라며 웃기도 했다. 결국 세 번째 로또가 모두 꽝인걸 확인하고서야 행복한 상상도 끝이 났다. (역시 다 잃어야 끝이 나는군.)
착하고 따뜻한 남편이다
며칠 전 남편이 보낸 따뜻한 카톡에 마음이 뭉클했다.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과 행운이 본인에게 올 리도 없지만, 1등에 당첨되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다는 남편. 지금처럼 조금씩 나아지는 하루하루면 충분하다는 남편. 착하고 (내 눈에 만큼은) 멋진 남편이 옆에서 든든히 지켜주고 있는 내 삶이 이미 당첨된 로또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