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빨리지 않으면서도 즐길 수 있는 휴식
누군가는 시즌이 10개나 되는 미드 프렌즈(Friends)를 끊임없이 정주행하며, 다른 누군가는 이미 아는 내용이어도 무한도전 레전드 편을 보고 또 찾아본다. 추운 날씨나 연말이 되면 꼭 생각나는 영화도 있다. <로맨틱 홀리데이>나 <나홀로 집에> 같은 것들이다. 넷플릭스와 유튜브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컨텐츠가 쏟아져 나오는데도 '볼 게 없다'며 봤던 걸 또 보는 심리가 뭘까?
백색 소음, 화이트 노이즈(White Noise)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세상이 너무 시끄러울 때나 너무 조용할 때 우리는 백색 소음을 찾아 듣는다. 빗소리, 모닥불 타는 소리 등의 물리적인 백색 소음은 주변의 거슬리는 잡음을 덮어주어 우리의 집중 혹은 휴식이나 수면을 도와준다.
프렌즈나 무한도전은 우리의 뇌에 '정신적 백색 소음'이 되어, 복잡한 생각이나 불안을 덮어주는 역할을 한다. 현대인은 하루 종일 수만 가지 정보를 처리한다. 하루 일과를 마친 퇴근 후나 하교 후, 우리 뇌는 말하자면 과부하 상태이다. 이때 완전히 새로운 정보를 접하면 뇌는 다시 또 정보를 처리하느라 일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조용한 적막이 흐르면 뇌는 잡생각, 걱정, 불안한 미래, 후회 같은 '내면의 소음'으로 고통받는다. 이때, 정신적 백색 소음은 뇌가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만 자극을 주되, 에너지는 쓸 필요가 없는 적당한 중간 지점을 만들어 준다. 이미 내용을 다 알지만 좋아하는 것을 틀어놓으면, 뇌는 정보 처리를 멈추고 흐름에 몸을 맡기는 상태가 되어 휴식 모드로 전환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사회적 대리물(Social Surrogat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화면 속 익숙한 캐릭터들을 만나는 것은 실제 사람을 만날 때만큼 감정 소모가 필요하지 않으며, 그들은 마치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곁에 있어 주는 친구같은 느낌을 준다.
컨텐츠 재시청 외에 게임 스트리밍 시청, Lo-fi 음악 감상, 컬러링과 같은 반복적인 단순 노동, asmr 등도 모두 정신적 백색 소음을 제공한다.
매번 똑같은 것만 본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게으르고 성장을 거부하는 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심리학적으로 이것은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선택한 매우 효율적인 자기 조절 행위(Self-regulation)이자 건강한 도피처이다. 만약 지금 당신이 이미 내용을 다 아는 영상을 틀어놓고 딴짓을 하거나 잠이 든다면, 당신은 게으른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뇌는 생각의 전원을 끄고 싶어 한다"는 신호를 정확히 파악하고 쉬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