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뇌가 설계한 '자아'라는 가짜 서사로부터 나를 구출하는 법
옛날 어느 왕국의 궁전에 스스로 글을 쓴다고 믿는 '황금 깃펜'이 하나 있었습니다.
문장이 유려하게 흘러갈 때마다 깃펜은 오만하게 생각했습니다.
"역시 나는 위대해. 이런 문장을 써내다니! 이 종이 위의 세계는 모두 내가 설계한 것이야."
어느 날, 깃펜의 주인인 왕은 생각에 잠겨 잠시 깃펜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순간 깃펜은 극심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움직임이 멈춤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 사라질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깃펜은 필사적으로 바르르 떨며 종이 위에 잉크 얼룩을 남겼습니다.
그리고는 얼른 이렇게 해석하며 스스로를 안심시켰습니다.
"이 얼룩은 심오한 여백을 표현하기 위한 나의 고도의 전략이다."
사실 깃펜을 쥐고 문장을 만드는 것은 왕의 손이었고, 그 문장의 영감은 왕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깃펜은 왕의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왕의 손끝이 움직인 궤적을 바라보며, 그것이 자신의 의지였다고 뒤늦게 이름을 붙일 뿐이었습니다.
지금 당신의 머릿속에서 들리는 그 목소리는 '왕'의 것인가요,
아니면 주인이 아니면서 주인 행세를 하려는 '깃펜'의 것인가요?
우리의 뇌는 비유하자면
현실이라는 데이터를 처리하는 운영체제이다.
뇌의 일차적 목표는
진리 탐구가 아니다.
생존이다.
만약 뇌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면,
너무나 불규칙한 혼돈 그 자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뇌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이를 해석하고 판단하여
패턴을 찾는다.
그리고 과거의 패턴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그 예측에 맞게
새로운 정보를 편집한다.
뇌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Michael S. Gazzaniga)의 말에 따르면,
뇌는 세상을 '관찰'하는 기구가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대해 뒤늦게
'이유를 지어내는 해석기'이다.
서문 이야기 속의
왕은 진짜 '나'이며
언어 안팎(안+밖)에서 행위하는 존재이다.
깃펜은 좌뇌이며,
언어 영역의 최고 경영자이다.
잉크 얼룩은 위협을 느낄 때 좌뇌가 필사적으로 만들어 내는
패턴이나 스트레스를 말한다.
좌뇌는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각을 유발한다.
위협을 느낄 때 좌뇌는
더욱 필사적으로
패턴을 찾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 뇌는
'불확실성'을
생존의 최대 위협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 곳에서도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내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을 주려 한다.
1)
"어제 내가 한 말 때문에 화났나? 그래서 답장이 늦나?"
"이제 내가 질렸나? 그래서 읽고 그냥 무시하나?"
연인이나 친구의 답장이 조금만 늦어지면
좌뇌는 평소보다 더 가동된다.
상대의 침묵이라는
그 공백을 견디는 시간은
좌뇌에게 있어서
사형이 내려진 것과 같아서
설령 비극적일지라도
'결론'을 내리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2)
"빨간 펜으로 이름을 써서 성적이 떨어졌어"
"이 넥타이를 매면 항상 계약이 성사돼"
중요한 시험이나 경기를 앞두고
우리는 극도의 긴장상태에 놓인다.
이런 통제할 수 없는 미래의 위험 앞에서,
좌뇌는
주변의 사소한 공통점을 찾아내고
징크스라는 '가짜 규칙'을 만들어
스스로에게 행동 지침을 부여한다.
3)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건 거대 배후 때문이야"
경제 위기나 전염병이 닥치면
언제나 음모론이 득세한다.
이는 복잡한 세상의 변수들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때,
감당하지 못할
무작위한 혼돈 속에 있는 것보다
'악당의 계획'이라도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좌뇌에게는 더 안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4)
"내가 배가 아픈 게 혹시 암의 전조 증상이 아닐까?"
몸에 작은 변화가 생겼을 때에도
좌뇌는 공포를 느낀다.
이는 우리를 '검색의 늪'에
밀어 넣는다.
이렇듯
좌뇌는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어떻게든
전체 그림을 완성하려는
좌뇌만의 목표에
우리를 희생시킨다.
문화권에 따라
더 우뇌적 사고를 하는지
좌뇌적 사고를 하는지
그 경향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차이들은
시간에 대한 태도에
뚜렷하게 반영된다.
시간을 벗어난
몰입으로 꽉 찬 인생은
아마 놀이같이 보일 것이다.
주로 예술 활동이나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할 때는
행위가
언어 영역 밖에서 일어난다.
이때는 우뇌가
활성화되어
우리는
생각을 꺼두고
행위에 몰입한다.
똑같은 예술 활동이라도
문화 사이에 차이점이 존재하기도 하는데,
일본의 음악은
좌뇌 양식과 뚜렷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미국에서는
그 반대이며,
자신이 비발디 같이 구조화된 음악을 선호하는지
드뷔시 같은 인상주의적 음악을 좋아하는지에 따라
좌뇌적 사고가 우세한지
우뇌적 사고가 우세한지
판별해 볼 수 있다.
우뇌는 별로 욕심이 없다.
그러나 좌뇌는
마음의 주인으로서의
우위를 뺏기지 않으려 하기에,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머릿속 목소리를
진짜 나라고 착각하는 순간이 길어지고
내가 좌뇌라는 도구를 쓰는 게 아니라
도구가 나를 쓰게 된다.
운동이나 예술 활동 중에도
혹은 그 이후에 곧바로
"역시 나야"
"내가 굉장한 일을 해냈어" 등의
생각이 따라올 때가 있다.
좌뇌의 목소리를
들어주면 들어줄수록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해석과 판단을 덧붙이고
타인과 환경에 대해서도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게 된다.
점점 더 많은
생각을 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방어하려는 경향은
자아라는 이미지를 유지하려는
좌뇌의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또, 과도한 사고는
뇌가 열심히 쓰이니
쉽게
내가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좌뇌의 행위를 자각하면,
좌뇌가 만드는 이야기,
감정,
스트레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그 고통을 감소시킬 수 있다.
신기하게도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행위는
섹스, 마약, 설탕과
동일한 뇌 부위의 활성화를 일으키는
쾌락의 하나이다.
듣기가
말하기보다
어려운
과학적인 이유이다.
인간의 뇌는
평생 동안 얼마든지 유연하게 바뀔 수 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두 가지는
'유전자적 숙명주의'와
'유아기 숙명주의'이다.
이 두 가지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성취를 방해한다.
생존에 목맨 좌뇌가 속삭이는
이야기와 거짓 패턴 찾기의 하나인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 때문에
우리는 살면서
많은 기회를 놓친다.
성공은
타고난 운명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다.
사람의 지능 또한
환경과 의지에 따라
바뀐다.
환경이 사람의 뇌를
성공에 유리하도록
강화하기도 하고
불리하도록
약화시키기도 한다.
내 뇌를 알면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알아야 다른 사람을 알 수 있다.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우주에 대해 이해하는
중요한 발걸음이
된다는 데에
요즘의 많은 과학자와
세상을 이끄는 리더들이
공감하고 있다.
그래서 수 편에 걸쳐
우리의 뇌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도록
시도해 보기도 전에
포기하거나
좌절에 익숙해진
수많은 '나'에게
진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