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네 살 아들과 고데기

너의 우주는 어떻게 생겼을까

by 오기부기

아침에 일어나보니 흰 눈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첫째 아들은 눈 내린 풍경을 좋아한다.

"엄마 눈이 왔어-!!" 들뜬 기분으로 혼자 옷도 잘 입고 밥도 잘 먹고 등원 준비를 마친 첫째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지하주차장, "오늘은 내가 어린이집에 몇등으로 갈까?", "엄마 차에 이 버튼은 뭐야?"하며 재잘대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차 시동을 걸었다. 아이에게 별다른 리액션을 해주지 않았다.


"엄마가 몇일 전에 정신없이 차를 빼다가 기둥에 차를 긁었잖아.. 그날 엄마가 무지 속상했거든. 운전할때는 집중하지 않으면 사고가 날 수 있어. 그래서 엄마가 운전에 집중하느라 시호 말에 대답을 못해줘도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사실상 맞는 이야기이다. 차에 아이를 태운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무사고와 안전이 중요하니깐.


"나도 그때 속상했어..앞으로는 내가 지하주차장에서는 엄마한테 말을 안 걸게." 하며 착하고 의젓하게 응수하는 아들이다. 사실 차를 긁은게 아들 탓은 아닌데, 괜히 사과를 받아낸것 같아 미안했다. 밝은 도로로 나오니 아이가 다시 재잘대기 시작한다.


금방 차가 어린이집에 도착하고 아이를 내려준 후 양손에 책가방 이불가방을 들고 아이를 따라간다.

깡총깡총 뛰어가던 아이가 무릎만치 쌓인 눈을 보더니 한달음에 뛰어 눈속으로 폭 들어간다.

순간 운동화와 바지가 젖었다는 생각에 아이를 확 꺼냈다.

그리고 화를 냈다. "거기 들어가면 어떡해!! 바지랑 신발 다 젖었잖아!!"

아이는 억울한 표정이 되어 "엄마 미안해.."하며 어린이집으로 들어간다.


바지를 털어 아이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내고 신발에 붙은 눈까지 탁탁 털어낸 후 현관 앞에 눈사람처럼 서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봤다.

평소엔 그 문을 폴짝폴짝 뛰어 넘어가는 아이인데, 우두커니 서서 원장님 인사에도 반응이 없다.

"시호야 들어가자~" 고조된 목소리로 아이 흥을 돋우며 들어가지만 이미 늦은듯 하다. 아이의 걸음에는 흥이 없다.


교실앞에 다다라서 헤어짐의 시간이다.

교실문 근처에서 친구 두 명이 고데기 장난감으로 미용실 놀이를 하고 있었다.

평소 내가 사용하는 고데기에 큰 관심을 보이는 시호에게 위험하다는 이유로 절대 만지지 못하게 했었다.

아이는 고데기와 비슷하게 생긴 장난감을 찾아 혼자 미용실 놀이를 하곤 했었다.


"우와 시호가 좋아하는 고데기다!!! 시호도 미용실 손님으로 줄서야겠네~~"하며 아들의 얼굴을 보니,

대답도, 흥미로운 표정도 없다.


어린이집을 나오며 생각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솜사탕처럼 커다랗게 쌓인 하얀 눈을 보고 부풀었을 시호의 마음, 그 속으로 뛰어들어보고 싶었을 순수한 아이의 본능, 순간 처음으로 느껴봤을 폭신한 눈의 감촉..

아이의 환상과 새로운 경험 앞에서 함께 즐기며 공감해주진 못할 망정, 날카로운 말로 그 순간을 와장창 깨버린 내가 너무 미웠다.

옷이 젖으면 갈아입으면 될 일이다. 눈 속에 들어가면 옷이 젖는다는걸 아이도 경험해봐야 알 것 아닌가.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와 아직도 너무나 모자란 엄마임을 여실히 느꼈다. 그리고 내가 아이와 같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도.

나의 길은 아직도 닦이지 않았고, 비포장 도로를 정비되지 않은 차를 타고 달려가는 중이다. 고장난 내 차를 고쳐주는 이가 다름 아닌 시호일때가 꽤 많이 있다.


너무나 갖고놀고 싶어했던 고데기를 보고도 감흥이 없는 시호를 보며 생각했다. '저 아이의 우주는 뭘까?그곳에 나는 얼마나 크게,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문득 내가 시호의 하루를 열고 닫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아이의 오늘 하루를 내가 망쳤다는 생각이 든다.

미안해 아들...


오늘 하루 내가 아이로부터 빼앗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앞으로 아이의 경험하고 배울 권리와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아이의 자유를 존중하기로 다짐해본다.

엄마에게 혼나도 아무일 없었다는듯 빠르게 관심을 전환하여 그럭저럭 잘 놀며 지내겠지만, 겪었던 모든 일이 그 아이를 만들고 모든 순간의 장면들이 모여 아들의 인생이 될테니 말이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눈을 바라보며 너는 자유롭게 상상하고 느낄 자격이 있는데, 엄마가 다시는 끼어들지 않을게!
눈은 가만히 서서 바라볼때가 가장 아름답고 좋다는 거, 나의 경험을 통해 얻어진 나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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