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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옥 Oct 12. 2020

늙은 아이

어른이란 말이 아깝다

몇 달 전 얘기다. 베란다 방충망에 벌레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근데 움직이질 않는 거다. 이상하다 싶어 죽은 건가 하고 가까이 가 보니 벌레가 아니고 담배꽁초였다. 담배꽁초가 방충망과 베란다 안전가드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게다가 꽁초가 닿은 방충망 주변은 불에 녹아 구멍까지 난 상태였다. 너무 놀랐고 화도 머리끝까지 났다. 어떤 인간이 란 말부터 튀어나왔다. 바로 윗집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근데 가만 생각해 보니 윗집의 윗집일 확률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어 보였다. 바로 올라가서 항의했다간 오히려 봉변을 당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느 집이든 아니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러냐며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꾹 참고 우선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그리곤 그 사진을 첨부해서 위험한 상황이었다, 실내에선 꼭 금연을 지켜달라는 문구를 넣은 경고문을 만들어 윗집 대신 관리 사무소로 향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경고문 부착에 대한 허가와 실내 금연에 대한 안내 방송을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관리 사무소 직원은 “부착물은 붙이셔도 되고요, 안내 방송은... 흠...”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해드리긴 할 텐데 별 소용은 없을 거예요. 방송해도 피는 사람은 계속 펴요.”라고 했다. 하긴 그랬다. 나도 몇 번인가 실내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는 안내 방송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요즘도 실내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이 있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직접 피해를 당하고 보니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자칫하면 화재로도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그 일은 경고문을 붙이고 안내 방송을 하는 걸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며칠 뒤 또 누군가의 항의가 있었는지 아예 아파트에서 직접 제작한 커다란 경고판이 아파트 1층에 세워졌다. 그럼 그 후는 어땠을까? 나아졌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후로도 실내 금연에 대한 안내 방송은 몇 번인가 더 있었다.      


코로나가 시작된 지도 거의 1년이 다 돼간다. 코로나가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이 되고 나서 일상 중 가장 큰 변화는 아마 마스크일 것이다. 이젠 마스크 없이는 외출이 힘들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대중교통도 이용할 수 없다. 마스크 미착용 시에는 입장 자체가 안 되는 곳도 생겨났다. 아직까지 백신이 개발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최고의 예방은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라고 한다. 그만큼 마스크 착용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외출 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답답하다는 것이다. 혼자만 답답할까 싶다만 어쨌든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고부터 크고 작은 시비들이 생겨났다. 마스크 착용을 요구받은 측이 요구한 측에게 착용을 거부하며 욕설을 퍼붓거나 심지어 폭력을 휘두른 사건들도 있었다. 공개된 CCTV 화면을 보면 한숨밖에 안 나오고 절로 혀를 차게 된다. 서로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다 같이 애쓰자는데 이게 그렇게까지 이해 못 할 일이며 그렇게까지 저항할 일인가 싶다. 또 마음 한구석에서는 저런 사람도 어른이라 할 수 있을까, 란 생각도 든다. 그래도 어디 가서는 꼬박꼬박 어른 대접을 받으려 할 텐데 말이다.


욕설이나 폭력까지 갈 것도 없다. 주변에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들은 쉽게 볼 수 있다. 집 근처 산책로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거나 턱에 걸친 상태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그늘진 다리 밑에는 항상 다리 기둥에 대고 테니스 연습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 이들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이유도 비슷하다. 운동을 하면 숨이 차서 마스크가 불편하다는 거다.      


서로 지키기로 한 약속도, 해롭거나 위험하니 금해 달라는 권고 사항도, 때론 법으로 정한 것도 이 정도는 괜찮아, 라며 쉽게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보통 그런 걸 ‘융통성’이라 부른다. 융통성의 범위도 자기 맘대로다. 기준에서 조금 벗어난 것도, 완전히 벗어난 것도 다 융통성이라 한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거나 위험 요소가 있는 경우에도 융통성이라 할 수 있는 건지 심히 의심스럽다. 이게 뭐 어때서, 나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데, 라며 사회적인 규범을 아예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치 이 세상 혼자 사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불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남의 장난감도 내가 갖고 싶으면 가지려 하고, 조용히 해야 할 곳에서도 소리치고 싶으면 소리치려 한다. 뛰면 안 되는 곳에서도 뛰고 싶으면 뛰려고 한다. 답답하면 밖에서도 신발이며 양말까지 벗으려 한다. 주변 상황, 남의 기분, 위험 요소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못한다. 오로지 자기 생각만 할 뿐이다.      


다른 사람이 겪을 피해나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발생할 위험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면 어린애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과연 어른이라 할 수 있을까? 어른이란 말 대신 늙은 아이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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