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누구에게도 정을 주어 보지 않았어.’ 김복동 할머니가 한 인터뷰에서 토로했던 고백이었다고 한다. 꽃다운 나이에 영문도 모르고 따라나섰던 길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경험을 했었을 것이니 어찌 그러지 않았을까. 세상에 누구를 믿으며 누구와 살가운 정을 나눌 수 있었을까. 그가 살아온 세상이 얼마나 미웠을까. 그의 하루하루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랬던 그가 한 자락 소원도 풀어보지 못하고 끝내 돌아가고 말았다. 함께 아픔을 나누었던 이들에게 마지막 남긴 한 마디가 ‘끝까지 싸워주시게.’였다고 하니, 남은 우리는 모두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의 무명용사 묘지를 방문했던 서독 수상 빌리브란트(Willy Brandt)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예정에 없었던 이 돌발행동을 두고 시사지 슈피겔(Spiegel)은 ‘무릎 꿇을 필요가 없었던 그가 정작 무릎을 꿇어야 할 용기없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무릎을 꺾었다’고 적었다. 2차 대전에서 독일이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나라를 대표하여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지 않은가. 이후 독일 내부에도 여러 목소리가 있었겠지만, 유럽 각국 간 분위기는 오늘 일본을 대하는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의 생각에는 여전히 전쟁과 폭력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 입에는 “미국을 믿지 말고 로씨아에 속지 마라. 일본은 일어난다”가 아니었던가.
목포로 간 손혜원 의원 덕이었을까, 아니 탓이었을까. 도시에 일본 사람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 즐비함을 알게 되었다. 우리 지역 구룡포에도 일본 사람들이 살다 간 집들이 여러 채 보존되어 ‘근대문화역사거리’가 조성되었다. 들리기로는, 군산과 인천, 그리고 서울에도 유사한 건물들이 많다고 한다. 나전칠기가 목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몰라도 그보다는 저 일본식 옛 집들을 어찌할 것인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구룡포의 옛 모습을 우리가 되새기는 의미는 무엇인가 다시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이들 옛 공간을 그저 물리적인 존재로만 바라보고 그리움과 향수를 자아내기만 할 것인가. 아니,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으로부터 과거 일본의 기억을 다시 새기고 오늘 일본의 모습을 잘 살필 수 있도록 적절한 긴장과 경계심을 만들어 내는 장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견제와 균형은 국가 간에도 필요한 것이다.
일본 정부와 아베 수상은 일본 내 보수 여론을 결집해 가면서 ‘일본이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남북과 북미가 대화와 외교를 통하여 평화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일을 일본은 위험한 진보라고 본 모양이다. 과거 힘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면서 새롭게 일어설 기회를 만들어 갈 틈을 엿보는가 싶다. 일본 초계기가 우리 함정 주변을 낮게 비행하는 일은 보통 사람이 보아도 전에 없이 위협적이며 우리를 시험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한반도의 운명과 미래는 우리 안에서 너끈히 세워갈 것임을 반듯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일본은 우리에게 영원히 갚지 못할 무거운 빚이 있음을 분명히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들도 일본이 그리 진솔하지 못함을 자각하여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이웃이었으면 한다. 역사의 기억을 말끔히 씻을 때에 그리 될 수 있을 터이다. 역사는 상처 깊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만, 둘러보면 어두움으로부터 일어선 좋은 기억도 함께 새기고 있다. 일본에게 무릎 꿇을 용기가 없다면 독일 역사에서 배우길 바라고, 어린 소녀들에게 가한 고통을 혹 잊었다면 김복동 할머니 영전에 가 보길 바란다. 우리는 일본이 남기고 간 흔적에서 역사를 기억하여야 한다. 역사를 잊으면 미래가 없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