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와 희생

나도 버틸 수 있었느냐의 차이

by 오알메리네

초등학생 1학년 때의 기억이 난다

담임 선생님께서 공모전에 출시하기 위해서 미술 작품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와 나의 친구에게, 색종이로 찢은 모자이크 형식과 크레파스의 형식 중 고르라 했다.

친구는 고민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색종이로 찢은 모자이크는 손이 많이가 어려웠으니까.

친구의 표정을 보고, 나는 호기롭게 색종이로 찢은 모자이크 형식의 작품을 내겠다 약속했다.

나는 그 이후, 몇 날 며칠을 작품에 손을 대지 않다가... 밑바탕의 선들에 맞게 종이를 크게 오려 붙여 냈다.


선생님은 몹시 당황해하셨고, 그때의 나는 괜히 양보했다!라는 생각과 함께 선생님에게.. 크게 혼이 났다


이 주제에 대해서 쓰려하자 떠오른 나의 작은 추억이다.


김주환 교수의 수용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보며, 스스로에 대한 비판을 줄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강의에 한 구절이 내 귀에 맴돈다.


“저는 우연히 ~한 사람이 없어서..”


이질감이 느껴진다. 우연히 ~ 없다.


나는 우연이란 항상 부정적인 것 마주치는 것이라 줄곧 생각했나 보다.

금전적으로 여유롭지 않는 집안에 우연히 태어났다 생각했지

지지받는 딸로 우연히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연을 수용하는 관점은 부정과 긍정이라는 평가 이전에

나에게 있는 것 없는 것, 경험한 것, 그러지 못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샤워를 하면서 남편에게 열변을 토했다.

그러자 남편이 말한다.


“이 이야기를 가장 경청하는 아이가 누구인 것 같아?”


저 멀리 철로 만든 게이트 사이로, 우리를 바라보는 강아지를 가리킨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수용을 잘해요!!”라는 얼굴로 말이다.

“그런데 엄마 아빠랑 떨어지는 건 수용할 수 없어요!!”라고도 말하는 것 같았다.


아, 우리는 그래서 가족이구나.

뜬금없는 깨달음이 내게 왔다.


우리는 남녀노소 나이 성별 종과 상관없이

성인군자가 아니고선 수용할 수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다.


우리 강아지가 나와 떨어지는 걸 수용할 수 없으면

나는 기꺼이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


내가 저녁메뉴를 내가 먹고 싶은걸 꼭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면

남편은 그러지 않아도 된단다.


가족(혹은 관계)은 그런 수용의 차이를 서로 메꿔주며 유지해 나가는 것이구나.

그리고 내가 어린 시절 타인에게 베푼 양보는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던 것이었구나

그래서 희생이라 느낀 것이구나.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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