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플라트네프 피아노 독주회, 2019년 6월 27일, 예술의 전당
무대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객석의 소음이 일순 멈추나 싶더니 박수소리로 쏟아진다. 누군가 걸어나온다. 백발의 노장이다. 하얀 머리와 대조를 이루는 검은 수트는 빈틈없이 검고 빈틈없이 소박하다. 천천히 걸으며 넓은 객석도, 합창석도, 구석구석 하나하나 빠짐없이 끄덕끄덕 목례와 함께 잔잔한 눈빛을 선물한다. 옅은 미소도 함께일 것이다.
베토벤 론도 다 장조, Op. 51, No. 1
소나타 바 단조, No. 23, Op. 57, "열정"
리스트 Harmonies poetiques et religieuses, S. 173, No. 7 "Funerailles"
Valses oubliee No. 1, S. 215
순례의 해 2권, '이탈리아,' S. 161, No. 5 Sonetto
Schlaflos! Frage und Antwort, S. 203
Three Concert Etudes, S. 144, No. 2, "La leggerezza"
Unstern! Sinistre, Disastro, S. 208
Two Concert Etudes, S. 145,
Nuages gris, S. 199
Hungarian Rhapsody No. 11, S. 244
Trauervorspiel Trauermarsch, S. 206, No. 2, Trauermarsch
론도가 시작한다. 순간, 중력이 사라지고 시간이 궤도를 이탈한다. 이렇게 자유로울 수 없고 이렇게 엄격할 수가 없다. 그럴 수 없이 포근하면서도 코끝이 찡하다.
신비롭다!
내가 알고 있던 것, 아니, 최소한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을 전혀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텅 빈 광대한 허공에서 움직이는 먼지 하나만큼도 되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위압적이지 않다. 천천히 걸어나오던 그 걸음처럼, 천천히 끄덕이던 그 목례처럼......
몽환적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현실적인 눈길이다. 현실 속에서 내가 보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짧은 생각으로 넘겨짚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앙상하고 초라한 것들이었는지, 현실적이라 생각했던 내가 도리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어리석은지 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신비롭다. 말랑말랑하고 촉촉하면서 뽀송뽀송한 무엇이 메마른 대지를 적시듯 내 속의 무언가를 살아나게 한다. 어딘지 모를 곳으로 거세게 휩쓸려 가고 있던 것을 가만히 끌어당겨 멈추게 한다.
그 세계로부터 바라보는 소나타 "열정"! 감히 범부의 눈으로 어찌 가늠이 되겠는가. 역시 놀라움 그 자체다. 작품은 고요하고 고요한 그곳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떤 방향성도 없는,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기 이전의, 말 그대로 고요 자체의 고요이다. 열정 소나타 1악장에 으례 따라붙는 태풍의 눈과 같은 적막함, 숨 막히는 고요, 긴장의 잉태와 같은 기존의 개념이 참으로 인간적이고 왜소한 것이었구나 하게 된다. 이 고요로부터 수직으로 분출된 에너지는 온 세상을 다 덮어버린다. 마치 빅뱅의 그것처럼.
리스트의 곡들은 아주 많이 알려진 것들과 아주 드물게 연주되는 곡들이 번갈아 가며 등장한다. 애조를 띤 달콤한 선율에서부터 인상주의적인 음계, 회화적 색채, 20세기 표현주의를 방불케 하는 반음계적 화음 들이 무대를 화려하게 수놓는다.
플라트네프의 음악은 그의 음악 외에 어떤 수단으로도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말한다.
음악은
오직 음악일 뿐이다.
음악은 인간 문명의 유산이지만
인간을 훌쩍 뛰어넘는다.
음악에 깃든 고요 속의 힘은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
태고의 힘이며
세계를 움직이는 바로 그 내밀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