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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물 Aug 28. 2021

「Rain」(죠지)

주절주절 음악 10

「Rain」(죠지) : https://youtu.be/tS_YE-bIH9A  (원곡 : 이적 / 편곡 : 박문치)

비 오는 날엔 궁상을 떨게 된다


날씨 얘기를 자주 하게 된다. 말주변 없는 사람이 꼭 할 말 없을 때 날씨 얘기나 하고 만다던데, 딱 그짝이다. 하지만 요즘 날씨는 워낙 파란만장해서 안 짚고 가기가 어렵지 않은가. 이번 주만 해도 뒤늦게 장마 전선이 상륙해서 때아닌 비가 며칠씩 지척거리고 있으니. 지독하게 더울 때엔 제발 비 좀 내려라, 하고 기우제를 지내다시피 했는데 그게 뒤늦게 효과가 온 셈이다.


노래도 TPO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화창하게 더운 날엔 컨트리 음악을 틀고 계절이 가을로 바뀌는 시기에는 어쿠스틱 음악을 찾게 되는 식이다. 그중 비 오는 날은 1년에 몇 번 안되는 틈새시장이라서 아주 대놓고 비 오는 날을 겨냥한 노래들이 많다. 「Rain」은 수없이 많은 '비'에 대한 노래 중에서도 비가 올 때 꼭 찾아 듣게 되는 노래다. 특히 원곡 같은 고양이나 점층 없이 부슬부슬 떨어지는 비를 얌전히 바라보고 있는 듯한 이 버전을 가장 좋아한다.


비는 싫어하지 않는다. 많이들 얘기하듯 '나는 비에 닿지 않았으며 앞으로 나갈 예정도 없는 상태에서 운치를 느끼며 비를 관망하는 것'이 좋다. 빗방울과 함께 들이치는 찹찹한 바람이 좋다. 어쩐지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에는 날씨를 핑계로 종일 죄책감 없이 늘어져 있을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도 비가 오면 한켠 울적해지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만 같다. 비는 항상 과거에 두고 온 것을 떠올리게 한다. 언제 그칠지 모른다는 불확실함이 자연히 과거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일까, 비에서 보이는 필연적인 하강이나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후회나 미련 같은 감정을 불러오는 걸까. 하여튼 비가 오는 날엔 꼭 가만히 누워 궁상을 떨게 된다. 「Rain」을 들을 때도 나는 빗줄기보다도 홀로 비를 바라보며 궁상떠는 사람이 먼저 떠오른다. 풋내가 날 만큼 거칠고 직설적인 말로 '너'와 '나' 사이의 철저한 단절을 곱씹는, 결코 닿지 않는 혼잣말 같은 노래여서일까.


지나간 일이든, 나를 두고 간 사람이든, 옛것을 떠올리며 붙잡아 보려 한들 그 시도는 어디에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무엇도 바꾸지 못한다. 궁상을 떠는 건 무력을 실감하는 절차다. 할 수 없었고, 지금은 더더욱 하지 못할 일을 되씹어 질겅거리는 일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러니까, 좀 어떤가. 나 혼자 궁상 좀 떨어도. 누구도 그것에 덩달아 우울해지거나 심란해지지 않고, 심지어는 궁상을 떠는지 어쩐지 조차 알 수 없다면. 비 오는 날 하루쯤 실컷 울적하고 말아도 안 될 것 없지 않을까. 그래서, 비는 싫어하지 않는다.


나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걸


며칠 전에는 '그래서 당최 뭘 하고 사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악의를 담은 질문은 아니었다. 아마 이런 일에도 저런 일에도 미적지근하게 호응하며 대화를 끊어 먹는 나에 대한 일갈이 절반, 기나긴 방학 중에 얘깃거리가 될 법한 일이 하나도 없느냐는 진지한 호기심이 절반이었을 게다. 그리고 오랜 궁리 끝에도 나는 답하지 못했다. 그냥 이것저것… 논다고 하고 말았다. 그야 최근엔 세 끼 잘 챙겨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끝내주게 숨 쉬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는걸.


한편 같은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도 했다. 밥 먹자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인사치레로 쓰는 사람이 있다고. 밥 먹자, 만나자라는 말은 누구보다 흔쾌히 하면서도 결코 날짜와 시간을 정하지 않는. 귀한 시간에 나를 불러내준 그 친구는 전자, 불려 나온 나는 후자였다. 이번에도 그 친구는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고 나는 종종 나 같은 사람과 대화를 하면 절대 약속이 잡히지를 않는다며, 나 같은 사람이 적지 않다는 말로 스스로를 변호했다.


지금 한 번 더 변호를 해보자면, 적어도 내가 해변으로 밀려온 미역줄기처럼 무기력에 몸을 맡기고 있지는 않다고 말하고 싶다. 앞서 말했듯 세 끼 밥도 잘 챙겨 먹고, 남이 보면 뭐 하나 싶겠지만 쉴 땐 쉬고, 놀 땐 놀면서 나름 혼자서도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유독 타인과의 관계, 그를 위한 교류에 있어서는 수동적이다 못해 무기력해진다. 오는 연락을 무시하지 않고 잡히는 약속을 마다하지는 않지만 먼저 나서서 친목을 도모하지는 않는 일종의 태업. 그것이 지금 나의 상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좋은 사람으로 여길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누구나 이런 류의 두려움을 가져본 적은 있겠지만 내가 품고 있는 이 두려움은 지나치게 비대해진 것만 같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마치고 혼자가 되고 나면 충족감이나 아쉬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행여나 내가 불쾌한 말을 하진 않았을까, 막상 약속에 나와보니 그닥 재미도 없고 시간이 아깝게 여겨진 건 아닐까, 끊임없이 의심하는 반성회가 열린다. 때로는 멋대로 결론을 내버리기도 한다. 내가 왜 그랬을까, 역시 난.


'밥 먹자'라는 말은 먼저 만남을 제안한 만큼 적어도 썩 나쁘지 않은, 즐거운 시간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이상한 책임감까지 더해져서 그만치 두려운 말이 없을 정도다. 두려우니까 일단 피하게 된다. 가만히 있자. 그래서 남이 나를 싫어할 여지도 주지 말자. 그게 심해져서 요 사이엔 업데이트된 남들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확인하는 일도 이제는 하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이름이 뜰 때마다 자꾸만 '밥 먹어야 하는데', '한 번 만나긴 해야 하는데' 하고 일없는 생각만 하게 되어서.


「Rain」을 들으며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쏟아지는 비를 피하지도, 맞지도, 그렇다고 못 본 체 하지도 못하고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에게 이입을 하게 된다. 무기력한 사람이 무력한 사람에게 감히 동질감을 느껴도 되나 싶긴 하지만. 언제까지 이 무기력이 계속될지, 언제쯤 내가 이 유서 깊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저 늦은 장마를 핑계 삼아 당분간은 무기력에 젖어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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