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음악 14
「노를 저어라」(페퍼톤스) : https://youtu.be/eS_cfoCNp6k
요번 명절도 본가에 내려가 용돈을 타 왔다. 10만원. 내 용돈 벌이는 한다는 나의 말은 이번에도 무기력하게 튕겨 나오고, 지켜보던 형이 그럴 거면 자기나 달라길래 얼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10만원. 복권도 10만원까지만 팔던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쓸 수 있는 돈의 심정적 한계치는 10만원인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손자에게 용돈을 쥐어주는 마음을 욕보이는 것 같아 금방 관둔다. 10만원. 이젠 집안에서 용돈을 타는 사람은 나뿐이 남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된 지가 벌써 1년째인데 참 새삼스럽다.
그래서 조급하냐면, 아주 피가 바싹 마르게 조급하다. '우리 집은 다 잘 풀렸으니, 너도 잘 풀릴거야.'라는 가족들의 따수운 조언을 듣고도 다 잘 풀리는 집안의 안 풀린 존재가 되어서 광야의 회전초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상상을 하게 될 만큼. 마음을 조급하게 먹는다고, 그 조급함으로 무얼 할 수 있는 게 아닌데도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도리가 없지 싶다.
학기가 시작한 뒤로 불현듯 짙은 불안에 사로잡히는 때가 많다. 무언가 해야 할 일을 잊어서도, 잊은 것 같아서도 아니다. 해야 할 일도 다 마쳤고 특별히 할 일도 더 없어서 노닥거려도 될 시간에 노닥거리고 있을 뿐인데 대뜸 죄책감과 불안감 사이의 그 어떤 감정이 밀려든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분이냐 하면, '이때 놀지 말고 할걸'의 '이때'가 지금이지는 않을까 하는 불길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분 좋은 휴식을 방해하는 이 마음은 곧 나의 하루에 대한 의심이다. 내가 보내는 이 하루가 어떤 방면으로도 나의 성장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니까 나는 나름 한다곤 하는데 그건 대 자기 위안에 그칠 뿐 실상은 아무런 진전도 없는 건 아닐까. 본격적으로 무언가에 착수한 것도 아니면서 나는 자청해서 불안해만 하고 있다.
그래서인가 부쩍 찾게 되는 게 이 노래, 「노를 저어라」이다. 바다 한가운데를 떠가는 뗏목을 상상해본다. (가사에서도 대놓고 '돛대'를 올리라 하지만, 돛이 달린 어엿한 배가 아니라 꼭 뗏목이어야 한다.) 나는 노를 직접 저어본 적은 없기에, 머릿속으로 상상해볼 수밖에 없다. 한 번의 노질로 이 뗏목은 얼마나 나아갈까. 전후좌우, 어디를 보아도 온통 물이고 바다인 그곳에서는 내가 얼마만큼 나아간 건지 알 수 없을 게다. 어디가 끝인지, 얼마나 저어야 끝을 마주할 수 있는지 마찬가지로 알 수 없다. 그곳은 계산, 어림짐작, 이런 것들이 무용한 공간이다.
어째, 이 상상은 낭만적인가? 전혀. 낭만이고 자시고 사실상 조난 상황일 뿐이다. 그러나 「노를 저어라」의 목소리는 온통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언젠가는 바다를 지나 목표에 닿을 수 있다는, 보이지도 않는 그곳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만 같은 부동의 믿음. 그 믿음은 기약 없이 노를 젓는 그들의 상황을 낭만적으로까지 느끼게 해 준다.
한 번은 나의 노력이 쌓이는 곳간이 있어서, 하루치의 노력과 성과가 고스란히 눈으로 볼 수 있는 무언가가 되어 차곡차곡 쌓이는 상상을 한 적도 있다. 10의 노력을 한 날에는 10만큼이, 100의 노력을 한 날에는 100만큼이. 그러다가 그 곳간을 가득 채우면, 와! 축하한다. 염원하던 무엇인가를 달성했다…라는 식이다. 얼마나 명료하고 편리한가. 그리고 얼마나 불행하고 따분한가.
언제 끝이 도래할지를 안다는 것은 그 '언제'가 오기 전까진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끝을 알고 얼마나 남았는지를 헤아리는 것은 자주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직장에 출근해서 시계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만큼 직장을 지옥같이 여기는 사람이 없듯이. 또 그것은 목표까지의 남은 여정을 죄 따분하게 만든다. 읽던 책의 끝이 궁금하다고 책장을 넘겨 결말을 미리 읽는다면, 넘겨진 부분은 결국 읽히지 않고 버려지기 마련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여정은 사실 험난하고 괴로울 때가 더 많다. 험난한 길과도 싸워야 하지만 이 방향이 맞는가라는 의심과도 싸워야 한다. 필요한 것은 근거 없는 확신이다. 끝이 올 것을 믿고 노를 젓고 있는 나를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이 헛되이 될지, 응분의 보상을 받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지치고 멍들어 힘겨울'수록 '더 크게 소리치'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길을 해쳐가는 사람의 원동력이 됨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