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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의 노블 테라피 May 02. 2024

"그가 정말로 비난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우연"

[네메시스], 필립 로스

_"마이클스 씨가 말했다.(...)"왜 앨런이 폴리오에 걸린 거요? 왜 그 애가 병에 걸려 죽어야 했던 거요?(...)어떻게 하면 좋겠소? 우리가 뭘 했어야 하는 거요?(...)그런데 그 애가 왜 죽은 거요? 이게 어디가 공정한 거요?(...)왜 비극은 늘 그것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덮치는 거요?"

"저도 답을 모르겠습니다." 캔터 선생님이 대답했다.

"왜 내가 아니라 그 애인 거요?"

캔터 선생님은 그런 질문에는 전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어깨만 으쓱할 뿐이다.""(p.52)


_'그런 질문'을 하지 않은 날이 내게는 단 하루도 없다. 8년전 여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질문의 대상은 대개 나 자신이다. 딸아이가 아프기 시작한 초기에는 답이 있는 것 같았다. 임신 기간 중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일까. 산후도우미가 새벽까지 잠을 안 자는 아이를 재운다고 강하게 흔드는 것을 자다 깨서 목격한 적이 있는데, 그래서일지도 몰라. 아니야, 병원에서 유전자 때문이라잖아. 부모의 유전자가 결합하는 과정에서 그런 돌연변이가 나올 수 있다고 하잖아. 그러면 결혼을 잘못한 걸까. 아니 모계 쪽 유전자에 잠재 요인이 있다고 하잖아. 내가 문제였네. 나는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 결혼은 하더라도 아이는 낳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내게 그런 유전 인자가 있었는지 몰랐잖아, 알 수가 없었잖아.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 그래도 결국 내가 문제였어. 그동안 내가 저지른 잘못들 때문에 이렇게 벌을 받는 거야.


__이런 '왜'라는 자문자답은 고통스럽고 집요하다. 감당하기 힘든 불행을 겪고, 그 또한 삶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를 낳는다. "벌어진 일에서 필연성을 찾아야만" 한다.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받아들일 수 있게끔 설명할 이유가 필요하고, 끊임없이 왜냐고 물어야만 한다. "왜? 왜? 그것이 의미 없고, 우연이고, 터무니없고, 비극적이라는 말로는 만족하지 못한다."(p.266) 스스로를 심판하고 죄를 묻는다. 죄없는 타인에게 죄를 묻고, 마침내 신에게까지 죄를 묻게 된다. 독실하진 않아도 한때 견진성사까지 받은 천주교 신자였던 나는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었다.


"왜 하느님이 앨런 마이클스의 부모의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았을까? 그분들도 틀림없이 기도를 했을 텐데.(...)그 사람들 다 좋은 사람들이야.(...)왜 하느님이 그분들을 위해서는 개입하지 않았을까?"(p.172)


"하느님 이야기를 하자면, 인디언 힐 같은 천국에서 하느님을 좋게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1944년 여름 뉴어크에서는-혹은 유럽이나 태평양에서는-그렇지 않았다."(p.179)


"사람의 운은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 누구의 인생이든 우연이며, 수태부터 시작하여 우연-예기치 않은 것의 압제-이 전부다. 나는 캔터 선생이 자신이 하느님이라 부르던 존재를 비난했을 때 그가 정말로 비난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우연이라고 생각한다."(p.243)


_대신 나는 책을 얻었다. 신과 종교와 믿음을 잃었지만 책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원래 "그런 질문에는 전혀 답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애초에 그런 질문은 공허함만 남긴다는 것을 알았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고, 일어날 일은 일어나며, 그런 것에 이유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의 삶 저변에는 예측 불가능한 "우연"의 강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벌어진 일의 의미"를 제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뿐임을 알았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것, 다시 말해 수용이라는 것은 너무도 어렵고 두려워서, 어쩌면 평생에 걸쳐 매순간 애써야 하는 과업이라는 것도 알았다. 적어도 '나'라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말이다.


네메시스(nemesis)는 응당 받아야 할 벌, 피할 수 없는 벌, 천벌을 뜻하는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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