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디의 노블 테라피 Jul 09. 2024

안심이다. 다행이다. 감사하다. 소설이 있어서.

[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_안심이다. 다행이다. 고맙다. 감사하다...사실 나는 그리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평소 이런 생각을 자주 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마음의 회로가 존재하지 않거나 부실하게 설치된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타고난 성정이나 기질 탓인지 환경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랬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쓰잘데기없는' 걱정과 나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달고 살았다. 결말은 대부분 비슷했다. 나의 걱정과 불안과 불길한 예감은 역시 '쓰잘데기없는' 기우였음이 판명되었다. 이런 내가 싫었고 이런 나로 사는 게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이런 나에서 탈피하려고 하거나 이런 나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건 더 피곤하고 힘들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에 대한 일종의 거부반응(?)이 있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힘 내, 희망을 가져야지.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건네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경계하게 된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구나, 스스로도 믿지 않는 낙관의 말을 잘도 하는구나, 함께 견뎌줄 것도 아니면서 무책임한 응원을 하는구나. 이렇게 의심하면서 그 사람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러면서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역시 나는 심보가 비뚤어진 인간임이 틀림없다고. 하지만 이런 못된 심보도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무뎌지기는 했다. 힘에 부쳤다. 걱정과 불안에 시달리는 것도 에너지가 소비되는 일이므로. 예전보다 기운이 달려서 '명확히 쓰잘데기없는' 일은 걱정하거나 불안해 할 여력이 없어진 것이다. 아니면 쓰디쓴 삶을 통과하면서 뾰족한 마음이 마모되어 조금은 둥그스름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새롭게 생겨난,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무겁고 영원한 걱정과 불안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해버렸기 때문인지도.


아무튼 그 결과(?) 나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성향의 사람을 더욱 피하게 되었다. 예전보다는 덜 뾰족한 사람이 된 것과는 별개로. 네가 나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괜찮을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겪어온 고통을 알지도 못하면서 다 잘 될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함께 버텨줄 것도 아니면서 힘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여전히 의심하는 못된 심보는 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아무리 말해도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으니까. 견디기 힘든 허탈함과 공허감만 남을 뿐. 입을 다물고 속으로만 삭히다가 한계에 다다른 나는 출구가 절실했다. 숨이라도 내쉴 수 있는, 조금이라도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그런 출구가 간절했다.


_그게 바로 책이었다. 정확하게는 소설이 출구였다. 소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너그럽게 감싸주었다. 언제나 기꺼이. 소설은 무턱대고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거나 무책임하게 응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를 온전히 포용해주었다. 정말 그랬다. 소설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미쳐 깨닫지 못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예상할 수 있는 미래의 나. 예상할 수 없는 미래의 나. 여기서 '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나'의 자리에 '우리', '삶', '사회', '세계', '역사' 등 그 어떤 것을 대입해도 말이 되었고 , 그걸 깨달을 때마다 나는 안심이 되었고 다행이었고 고마웠고 감사했다. 천성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나도 소설을 읽을 때면 감사한 마음이 절로 솟아났다.


<사라진 것들> 같은 소설을 읽을 때면 신을 믿지 않는 나도 엎드려 감사기도라도 드리고 싶을 정도로 감사함이 넘쳐흘렀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최근에는 이런 일이 의례처럼 되어버렸다. 밤중에 자다가 깨어(...)창문을 단속하고 잠금장치를 더 단단히 채우는 이런 일. 이것이 우리가 들어온 새로운 세상, 우리가 꾸기 시작한 새로운 꿈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 꿈에 균열이 생기는 때가 있었다. 과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는, 그 다른 삶이 살짝 윙크를 보내는 때가 있었다. 내 휴대전화에서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는 미치의 문자처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친구? 연한 파란색 문자 안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너 어디로 간 거야?"(p.24)


"이게 나라니 믿어지니? 마야는 썼다.(...)그 옛날에는 이렇게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p.63)


"지금까지 여러 달을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 기다려온 것만 같았다. 이 회색지대를 부유하면서 어떤 미래가 올지 모르는 채로 모든 결과를 조마조마 걱정하고, 혼자 있는 순간에는 요즘 우리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어떤 느낌을 견디면서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엄청나게 허약하며, 갑작스럽고 불가해한 방식으로 우리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었다."(p.92)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지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p.127)


"하지만 그때는 거기 살면서 일하던 사람들이 거의 사라진 후였어요. 남은 건 유령도시뿐이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도 난 그런 생각은 하기 싫어요." 히메나가 말했다. "그냥 영화 속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 싶어요."

"왜?"

"왜냐면," 그녀는 말했다. "영화의 끝부분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직은 모른다고요. 그 사람들이 더 좋은 삶을 찾을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잖아." 나는 말했다.

"알아요." 히메나가 대답했다. "하지만 영화 끝부분에서는, 그러니까 아직 아무도 그걸 모르잖아요."(p.282)


_하지만 소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감사기도를 하다가도 문득 이런 의문이 들게끔 하기 때문이다. "사라진 것들"이 있다면 남은 것도 있지 않을까? 남은 건 뭘까, 생각하다가 새삼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되면 목덜미가 선득할 정도로 아찔해진다. 그럼에도 계속될 일상이 남았다고. 끝까지 가야지만 끝이 나는 삶이 남아 있다고.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어야 한다고. 계속 살아내야 한다고. 잔인하지만 명백한 사실 또한 소설에 있다. 


그래서 나는 안심이 된다. 다행이다. 고맙고 감사하다. 소설이 있어서. 소설을 존재하게 해주는 소설가들이 있어서. 

매거진의 이전글 "쓰게 될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