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아빠에게 넷플릭스를 깔아드린 게 실수였다. 아빠는 환갑이 넘어셨음에도 신문물을 접하는 데 주저함이 없으시다. 그 모습은 나에게 귀감이 되면서도 늘 그렇지만도 않다. 정년퇴임을 하시고 산책과 책에 빠져 계시던 아빠는 최근 그 놈의 넷플릭스 앞을 떠날 줄 모르신다. 이제 와 어쩌랴. "아빠, 티비를 너무 많이 봐서 아무래도 넷플릭스 끊어야겠어요" 야속하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이제껏 불효만 차고 넘치게 해온 딸이니까. 게다가 우리집도 친정집의 넷플릭스에 연결되어 그 혜택을 톡톡이 보고있다. 그것도 남편이 아니라 내가 밀이다. 이기적인데 뻔뻔하기까지 하다.
아빠는 호기심에 걸맞게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신다. 영어권이나 일본어권, 중국어권 할 것 없이 시트콤, 드라마, 영화에 코믹, 액션, 추리를 넘나드신다. 간혹 엄마와 명화라 할 법한 고전영화를 보시면 영화의 이름을 단톡방에 올려주신다. 이번에는 <<84번가의 연인>>(1986)이다. 안소니 홉킨스 주연의 작품인데, 첫눈에도 영 따분해 보였다. 일단 넷플릭스에 찜하기 기능을 걸어놓고 나중에 보겠다는 심산으로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러다 슬로우 라이프에 눈뜨기 시작하며 영화의 취향도 슬그머니 그쪽으로 기울었다. 몇 달 전 추천받은 영화가 떠올랐다. 아차, 그게 있었지! 저장해둔 목록에 안소니 홉킨스 주연의 영화 포스터가 약간은 의기소침한 얼굴을 내밀었다. 줄거리인즉슨 처음부터 끝까지 오래된 중고책자를 중심으로 남녀 주인공이 편지를 주고받는 이야기였다. 젊어서부터 늙기까지 주고받은 일상의 편지들은 러닝타임 내내 읊혔고,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는 슬프고도 애틋한 결말은 미지근한 듯 적절하게 온기를 뎁혀주었다. 영화의 분위기는 늘상 차분했고 군데군데 위트가 있으며 남녀 주인공의 케미스트리도 과하지 않아 오히려 흥미를 돋우었다. 이쪽에서 편지를 쓰는 이는 미국의 한 무명 여류 작가로 술과 담배가 퍽이나 절친한 친구같아 보였다. 그녀는 고서점을 총괄하는 각 잡힌 차분한 영국 신사에게 원하는 고서를 구해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그들의 편지는 책을 중심으로 이어진다. 여주의 우아하고도 지적인 편지는 간혹 울화를 쏟아놓는 대범하고도 막돼먹은 편지로 바뀌고, 끝까지 별다른 반응 없는 저쪽 동네 남주의 글과 소위 적절한 티키타카를 이루며 균형과 조화를 완성해 나간다.
이 영화는 조마조마 아슬아슬할 것도 없고 웃음을 터트릴 일도 흐느껴 울 구간도 없다. 그저 잔잔한 감성과 되바라지지 않은 유머가 있을 뿐이다. 격조 높은 시나리오에 격조 있는 배우들의 콜라보라 한다면 내가 너무 격조 없는 이로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그들만의 시너지는 안정적이고 품위 있다. 별다른 내용 없음이 마음에 안착하여 발휘하는 내적 힘이란 꽤나 강렬하다. 짜릿하고 자극적인 서사가 뇌리에 꽂히는 것과는 별개의 감성이다. 마치 가벼운 함박눈이 소복이 쌓인 풍경처럼 청초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고 그 같은 풍경은 매해 겨울 다시 봐도 질리지 않는 법이다.
<<84번가의 연인>> 남주 안소니 홉킨스. 중후한 모습이 고서점의 점장 역할에 그만이다.
다음 영화는 <<이웃집 토토로>>(1988)이다. 1988년에 개봉했고 같은 해 내가 태어났으니 영화와 나는 같은 터울의 친구라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20여 년이 흐른 뒤에야 처음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 후 몇 번을 더 봤는지 모르겠다. 한적한 시골마을과 그 속 각 인물들의 어울림이 다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를 내가 왜 그토록 좋아하고 볼 때마다 눈물 흘리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온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줄거리랄 게 없이 극히 서정적인 분위기에 기대어 일상의 평범한 이야기가 복닥거리며 나열될 뿐이다. 어쩌면 지극히 평범해서, 따수워서, 깨끗해서 그저 멍 때리며 보게 되고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두 손 담가 퍼마시고 싶은 심정인지도 모른다.
왼쪽부터 사츠키, 메이, 그리고 토토로
주인공은 토토로와 한 쌍의 자매. 자매의 이름은 '사츠키'와 '메이'이다. 사츠키는 메이의 언니로 아직 초등학생밖에 되지 않았지만 동생을 마치 엄마처럼 돌본다. 몸이 약하고 병원에 자주 드나드시는 어머니를 대신해 자연스럽게 동생의 엄마, 적어도 큰언니의 역할을 자처한다. 원체 천성이 선하고 명랑한 아이인지라 이러한 '역할 대행'이 불만스럽지 않으나 스스로 도시락을 싸고 가족들의 도시락까지 챙기는 장면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지금 조카들이 딱 사츠키와 메이 나이인데 첫째가 둘째를 저리 살뜰히 돌본다면 나는 무척이나 마음이 아플 것이다. 결국 사츠키는 폭발하고 만다. 폭발이래봤자 메이에게 '바보'라고 소리치며 자리를 피해 흐느껴 우는 정도이지만.
메이는 그야말로 철 모르는 개구쟁이다. 다섯 살 남짓 되었는데 언니가 하는 말과 행동은 족족 따라해야 성이 찬다. 원피스를 자주 입고 다니나 워낙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뛰어다니는 탓에 늘상 속바지가 시원한 해방감을 맛본다. 어느 날 메이는 우연히 숲으로 이어지는 '개구멍'을 발견한다. 말이 개구멍이지 그것은 꽤나 길고 깊게 숲의 중심부까지 닿아있었다. 거기서 메이는 숲의 정령을 만나고 집채만한 곰인지 다람쥐인지 알 수 없는 그 푸근한 생명체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숲의 정령이란 근사한 칭호에 어긋난 그 생김새는 얼핏 집채만한 곰처럼도 보이고 식성에 따라서는 다람쥐인 것도 같다. 배가 보름달처럼 불룩하여 위에 누우면 세상 그 어떤 침대보다도 푹신하다. 게다가 이 곰돌이와 다람쥐의 아수라백작 버전은 메이가 여간 귀찮게 굴지 않아도 싫은 내색 한 번 없다.(정확히 말하면 관심이 없다. 쿨하디 쿨한 숲의 정령이다.) 이미 메이는 알고 있었다, 눈앞의 거대 솜뭉치가 바로 전설 속 '토토로'라는 것을!
토토로로 말할 것 같으면 숲의 정령이라고는 하나 외국의 화려하고 오색찬란한 요정 혹은 여신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한국의 산신령처럼 개량한복에 두건을 쓰고 턱수염까지 늘어트린, 누가 봐도 평범치 않은 모양새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저 푸근하고 퉁퉁한 몸매의 소유자일 뿐. 정월대보름의 휘영청 보름달마냥 둥실둥실한 뱃살에 짧은 팔다리, 삐죽 튀어나온 발톱과 커다란 입이 그를 묘사할 수 있는 전부다. 토토로는 <<인사이드 아웃>>(2015)의 빙봉(Bingbong)처럼 상상 속 개체이고 성격도 뭉글뭉글 때로는 비죽비죽 무던하고 생뚱맞다. 츤데레 토토로는 자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한다. 씨앗이 새싹을 돋는 비결을 알려주고 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창밖 나무에 앉아 바라볼 수 있도록 고양이버스를 대절해준다.
<<이웃집 토토로>>만큼은 아니지만 두 번을 정주행한 일드(일본 드라마)가 있다.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2013)이 그것이다.(이하 '빵과 스프') 이 드라마는 어쩔 수 없이 감내하는 삶이나 옛것 그대로의 삶보다 자기 자신의 것을 추구하는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쩔 수 없이 감내하는 삶`이나 `옛것`을 구닥다리 취급하지 않고 나름의 이유와 문화가 있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은 또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정서를 가지게 될 것을 기대한다. 부러워할 것도, 따라갈 것도 없다. 각자 자신의 길을 가는 거니까.
드라마의 여주는 중년 여성으로 급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다. 책이 좋아 출판사에서 근무하였지만 책과 관련 없는 부서로 인사이동을 하게 되며 회사를 그만둔다. 그리고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가게를 물려받아 새단장을 시작한다. 인테리어를 바꾸고 메뉴를 바꾼다. 아주 단출한 메뉴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빵과 스프이다. 정확히 말하면 샌드위치와 스프. 서너 종류의 빵 중 원하는 빵을 고르면 그 빵에 그날의 샌드위치를 싸준다. 계절에 어울리는 신선한 재료로 끓인 따뜻한 스프도 겻들여 준다. 처음 가게의 변화를 노심초사 바라보던 이들도 점차 새로운 공간에서의 즐거움을 맛보며 어머니와는 또 다른 딸의 공간을 받아들인다.
이 가게의 메뉴는 빵과 스프
상상을 해보았다. 내가 앞으로 낳게 될 아이들이 어린 시절은 '토토로'의 사츠키와 메이처럼, 어른의 시기는 '빵과 스프'의 아키코처럼 자란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가 아닌, 능력이 뛰어나고 평범하고가 아닌, 마음이 건강한 아이로만 자라준다면 세상에 남 부러울 게 없을 것이다. 어쩌면 나 자신부터 그런 어른이 되어야 아이에게도 자연스러운 습득이란게 일어날 거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리 남을 부러워하거나 비교하지는 않았다. 그저 내 할일을 하고 중간이면 중간, 상위면 상위, 하위면 하위. 그렇게 결과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 물론 가끔 속이 상하거나 신경이 쓰이는 때도 있었으나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반면 나에게 없는 것도 있었다. 내 생각의 틀이 너무 확고하여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친구의 생각은 물론 어른의 생각까지도 나와 다르면 무심히 반응했다. 유감스럽게도 30년이 넘게 그런 자기애에 빠져 살았다. 어이없고 부끄러운 고백이다.
나의 자기중심성을 알았으니 이제 그만 나에게서 떠나서 남을 향해 진정한 공감이란 걸 해보고 싶다. 혹 '진정한' 공감이 너무 요원한 단계라면 '빵과 스프'의 평범한 아주머니처럼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겠다"라 반응할 줄 아는 물렁물렁한 사람이 되고 싶다. 말을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동시에 나의 생각을 지혜롭게 표현할 줄 알고. 그러다 보면 진정으로 공감하고 사랑하게 되는 단계로까지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이 건강한 그런 사람이 되면 참 좋을 것 같다. 어쩌면 슬로우 라이프가 마음을 위해 챙겨먹는 건강보조식품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