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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Aug 04. 2021

"머리 자르면
이제 남자로 자라나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 그리고 미래로 보내는 대답

손녀 서우는 아직도 동생의 성별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마 아기일 때는 성별이 정해지지 않았다가 자라면서 남자나 여자가 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 몇 번이나 서우에게 여동생이 생겼다고 말을 해줬는데도 머리가 짧은 6개월 동생의 모습을 보면 이것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게 헷갈려할 때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서우는 남자든 여자든 동생이 생겨서 좋겠네”라고 말해주곤 한다. 


한여름이 되자 서우 동생의 머리에 땀띠가 한가득 났다. 간지러워서 긁으니 아기 두피에 손톱 자국 모양의 상처가 눈에 거슬릴 정도까지 생겼다. 보다 못한 서우의 아빠가 이제 막 귀를 덮기 시작한 짧은 머리를 더 짧게 잘라냈다. 바가지머리 같은 느낌도 나서 귀엽고 속도 시원했다. 


눈치 빠른 서우도 동생의 머리를 보고 뭔가 달라진 걸 느꼈을 것 같아서 표정을 살폈다. 서우는 씩 웃더니 “동생 머리가 짧아졌으니까 이제 남자로 자라나요?”라고 물었다. 서우 머리에서 ‘머리가 짧다 = 남자 머리’라는 공식이 생겨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닌 것이 유치원 다니는 친구들 중에서 여자 친구들은 모두 머리가 길고, 남자 친구들은 모두 머리가 짧으니 자연스레 머리에 박힌 이미지일 것이다. 


서우는 늘 처음이 중요한 아이였다. 처음 가본 바다, 처음 먹어본 사탕, 처음 갖게 된 자전거, 처음으로 본 애니메이션 등은 늘 서우의 기준점이 됐다. 어른들보다도 더 엄격해서 한번 정해진 기준과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대번에 알고 지적했다. 


“할머니, 지난 번에는 치과에 갔다가 아이스크림 먹어도 된다고 해서 여기에서 사 먹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왜 안 되는 거예요?”


마법의 단어 ‘지난 번에는’의 기준점을 처음부터 잘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할머니의 본능으로 이번에도 바로 그 중요한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았다. '짧은 건 남자 머리'라는 서우의 다섯 살 버전 공식은 앞으로도 수도 없이 깨질테고, 본인이 스스로 그 공식을 깰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다만 너무 혼란스러워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응, 서우야. 그런데 머리가 짧다고 해서 모두 남자인 것은 아니야. 머리가 긴 남자도 있는 걸? 그리고 반대로 머리가 짧은 여자도 있고 말이야.”


“그러면 서우 동생은 머리가 짧은 여자에요?”


“그렇지. 나중에 더 시간이 지나면 머리가 자라겠지만 지금처럼 머리가 답답하거나 땀띠가 날 때는 누구든 머리를 짧게 자를 수 있단다.”


이 대화를 나누고 난 뒤 2020 도쿄 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 안산 선수의 숏컷이 이슈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할머니의 본능적인 타이밍 감지 능력을 스스로 칭찬했다. 조만간 서우에게 안산 선수의 경기 장면을 다시 보여줘야지. 그리고 말해줘야지. 열심히 활 쏘기를 연습한 언니가 용감하게 활을 쏘아서 1등이 되었다고. 당연히 머리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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