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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사공이 Feb 04. 2021

헤어질 수 없는 것과의 동행

가, 가란 말이야!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이 멋진 남자는 청초하기 그지없는 이 여자를 향해 낙엽까지 세차게 던지며 소리친다. 널 만나고 되는 일이 하나 없다고, 제발 가라고! 그 시절 우리를 놀라게 만들었던 전설의 광고. (2% 부족할 때 마시라더니 마시고 나면 목이 20% 더 말라오던 미스터리한 음료) 그 광고 속 남자는 왜 그렇게 그녀와 헤어지고 싶었을까? 헤어질 수 없을 걸 알기에 더 애절한 이별통보 같았다. 아쉽게 끝나버린 광고의 다음 장면을 상상해본다. 결국 두 사람은 낙엽이 한참 깔린 그 길을 함께 걸어갔을까? 마지못해 돌아서는 여자의 뒤를 남자는 말없이 따라갔을까? 방금 헤어진 연인과 동행해야 하는 그 길은 또 얼마나 쓸쓸했을까...


나는 헤어질 수 없다고 확신한 것들과 몇 해째 동행하고 있다.


한 달도 안돼 못나게 자라 나오는 흰머리가 그렇고, 나이를 먹어가며 하나 둘 늘어가는 만성질환이 그렇다. 유독 검은 내 머리카락 탓에 흰머리는 가르마를 중심으로 흰 띠를 두른다.(몇 달만 이대로 방치하면 스컹크 스타일이 될 수도 있다) 한 달에 한번 미용실을 가는 것도, 집에서 독한 염색약을 셀프 도포하는 일도 정말 귀찮다. 머리에 돈과 시간을 썼지만 나의 헤어스타일은 전혀 달라지지 않으니 보람도 없다. 어느 날은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겨주는 미용사에게 흰머리가 안 나오는 약이 개발되면 너무 좋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미용사는 펄쩍 뛰며 말했다. “그러면 미용실 다 망하게요?” 나는 되물었다. “아니 왜요? 커트나 펌도 많이 하고, 새치가 없어도 염색은 하잖아요” 그러자 미용사는 내가 몰랐던 빅데이터를 공개했다. “미용실 단골고객 50% 이상이 새치 뿌리 염색이에요” 물론 미용실마다 동네마다 다르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손님들이 흰머리를 감추기 위해 정기적으로 미용실을 찾는다고 한다. 그것도 10대에서 80대까지 거의 전연령대에서.


아,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헤어지지 못하는 불편한 것과 동행하고 있구나!


아직 흰머리가 몇 가닥뿐인 친구는 흰머리가 눈에 보이는 족족 뽑는다고 했다. 직접 뽑을 수 없는 정수리와 뒤통수는 초등생 딸에게 개당 10원의 가격을 책정해 외주작업을 맡기기도 한다. 친구는 그렇게 뽑아 없앰으로써 흰머리와 단칼의 이별을 거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염색을 할 정도로 흰머리가 많은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걸 모두 뽑다간 내가 대머리, 적어도 부분 탈모가 될 것이라는 걸. 그래서 헤어지지 못하고 그저 보기 좋은 옷을 덧입혀 동행하고 있다. 언제쯤이면 백발을 인정하고 염색을 그만두게 될까? 환갑이 넘은 친정엄마도 아직 새치 염색을 하는 걸 보면 나의 이 불편한 동행은 수십 년은 족히 남은 것 같다.


예민한 성격과 한국인의 밥상 때문에 발생하는 위장장애와 역류성 식도염, 카페인 과다 섭취로 인한 불면증, 갑상선 항진증으로 인한 안병증, 삼각연골 손상으로 인한 손목 통증, 게으름으로 인한 복부비만 등 많은 만성질환과도 헤어지지 못하고 동행하고 있다. 가라고 소리쳐도 보고 어쩌면 마음만 먹으면 단칼에 이별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쉽게 헤어지지는 못할 거리는 확신이 드는 녀석들이다. 그저 동행하며 약으로 힐링으로 때때로 운동으로 다스릴 뿐이다.

인생은 어쩌면... 원치 않은 것들과 동행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떤 것들은 헤어져도 마음속에 살아 남고, 헤어지지 못하면 늘 곁에 머물며 나를 괴롭힌다. 그렇다고 그것들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진 않는다. 우두커니 멈춰서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저절로 날 떠나진 않기 때문이다. 때때로 어떤 이를 향한 분노, 미움, 두려움, 섭섭함과 같은 내 마음속 나쁜 감정들과 헤어지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럴 땐 그냥 동행하는 수밖에 없다. 서걱서걱 발자국마다 부서지는 낙엽소리에 묻어두고, 옷깃을 파고드는 서늘한 바람에 조금씩 씻겨보내며 걷다 보면, 신선한 공기가 그 자리를 채우며 마음을 가뿐하게 해 줄 때가 있다. 미용실에 다녀와 하얗던 흰머리를 가리고 나오면 그렇고, 가벼운 운동으로 체중을 단 100그램이라도 덜어내는 날이면 그렇다. 헤어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들이 수백수천 가지가 넘지만 그냥 동행하기로 마음먹고 걷다 보면,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한 2%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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