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게 걸었던, 폭우가 내리던 남해
여행의 즐거움은 갑자기 찾아온다
남해 여행기 #1
내일로를 세 차례나 다녀오면서 국내여행에는 어느 정도 도가 텄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부산에서 가까운 남해를 제대로 여행해 본 적이 없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디로 떠나볼까 지도를 펼쳐놓고 고민하던 어느 여름날, 평소의 여행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이유 없이 남해를 목적지로 정했다. 보고 느낄 점은 세상 어디든 있는 법이고 여행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의 길을 걷던 순간마저도 추억이 되는지라, 항상 목적지보다는 그저 잠깐이나마 일상을 떠난다는 사실 하나로도 떠날 이유로는 충분했던 듯싶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불면증과 여행을 앞둔 날의 설렘, 그리고 한 여름의 열대야까지, 밤을 새우기 위한 치명적인 세 박자가 갖추어진 그날 밤은 일 초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부산에서 남해까지는 버스로 두 시간쯤 걸리기에 아침 6시의 고속버스에서 그나마 눈을 붙였고, 남해터미널에서 다시 버스를 타면서 조금 더 수면을 보충하니 여행을 하기에 무리는 없었다. 그렇게 잦은 여행에도 전날엔 꼭 잠을 설치고 이동수단에 타고나서야 잠이 드는 것은 이제 당연한 일이 된 듯하다. 그렇게 시작된 남해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는 독일마을이었다.
남해 독일마을은 1960년대 이후 독일로 파견되었던 광부와 간호사 분들이 한국으로 돌아온 뒤의 정착생활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독일 교포 정착마을'이다. 어려웠던 시기에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파독민들이 기여한 바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이곳에 있는 듯, 파독전시관을 비롯해서 독일에 다녀온 어떤 분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까지도 한 곳에 세워져 있다. 주황색 지붕에 아기자기한 집들이 눈에 띄는 마을 전체에 따뜻하고 잔잔한 분위기가 흐른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내려다 보이는 남해의 풍경에 사로잡혀 몇 번이고 멈춰 서기도 하고 아예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장엄한 산과 바다, 그 앞의 아기자기한 마을과 작은 도로가 조화로운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독일마을 꼭대기에 있는 남해파독전시관은 월요일이라 휴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올라가 봤다. 그리고 실제로 휴무란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 뭐, 괜찮다. 이곳 남해 삼동면은 독일마을이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방조 어부림과 해오름예술촌 등 남해에서 꽤 이름 있는 관광지들이 모여있는 곳이라 게스트 하우스 입실 전까지 이곳에 머무르려 했던 일정을 변경할 필요는 없었다. 전시관 입장이 불가하다고 해서 독일마을의 운치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니 다시 걸으며 조금 더 이곳을 느껴본다. 그리곤 내려다봤던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기 위해 바다 가까이로 걸음을 옮긴다.
걷다 보니 어느덧 마을 안으로 들어와 있었고 우연히 마을회관을 마주쳐서 그 이름도 알게 되었다. 남해 바다와 물건리의 방조 어부림 앞에 위치한 물건마을이다. 위에선 풍경이었던 마을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마음이 들떴다. 원래 여행 중엔 쉽게 들뜨곤 하는데, 어쩌면 푸르고 넓은 바다와 해안에 위치한 녹색 빛의 수림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곳 남해 삼동면, 일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이토록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니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여행은 지치고 힘들 때 잠깐의 도피, 혹은 회복의 수단으로 적격이지만 남해에 와보니 이를 위해 반드시 먼 곳으로 떠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에 확신이 든다.
날씨도 무척 더운데 여행만 오면 왜 자꾸 걷고 싶은 고집이 생기는 걸까. 여행 짝꿍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또 함께 걷는 걸 좋아하니 짝꿍 아니겠는가. 독일마을을 오르고 내렸던 순간부터 끊임없이 삼동면을 걷기 시작했다. 방조어부림에 이어 독일마을 반대편의 해오름 예술촌에 들렀다가 다시 독일마을 방면을 지나서 숙소가 있는 시내까지 두 시간 가량을 걸었다. 덥고 힘들고 배고팠지만 분명 그 여행길 위에서의 기억과 감정들은 여느 관광 명소에서의 그것 못지않게 오래 남을 것임이 분명하다.
옥상의 해먹에 누워 맞이하는 오후가 일품인 남해의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해서 잠시 쉬다가 또다시 밖으로 나왔다. 석양이 지는 시간에 맞추어 죽방렴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바다 위로 멋드러지게 놓인 기다란 다리를 지나 사유지인 작은 섬으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남해 최고의 일몰포인트가 있다. 삼십 분쯤 바닷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곧 무거운 분위기가 짙게 가라앉더니 세상에는 아름다운 붉은빛 대신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다 위로 노을이 지는 풍경을 참 좋아해서 여행지에 유명한 일몰 명소는 꼭 찾아다니곤 하는데 참으로 자주 운이 없다. 여행에서 노을을 좇아 다니노라면, 이따금씩 세상사 내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다반사라는 점을 몸소 느끼게 된다.
비가 어중간하게 내리면 짜증이 나는 경우가 많은데, 하늘에 구멍 난 듯 미친 듯이 쏟아지는 폭우를 우산도 없이 맞으니 되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남해를 온종일 걸으며 흘린 땀과 함께, 그동안 쌓인 피로와 불안 같이 나를 괴롭히던 것들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다. 비가 그치고 또다시 여행이 끝나면 일상은 시작되겠지만 여행의 한 순간만큼이라도 쏟아지는 빗물에 머리를 비워본다. 두꺼운 빗방울과 때로는 천둥 번개까지 내려치는 그 해 질 녘에 아찔한 줄도 모르고 바다 위의 다리를 달려서 건너는 순간에, 알 수 없는 쾌감이 차오른다.
새벽부터 시작된 남해 여행은 독일 마을을 오르고, 바다와 숲을 지나, 아스팔트 도로 위의 뜨거운 태양 아래 몇 시간을 걷고, 마지막으로 노을을 보러 갔다가 대신 폭우를 맞고 돌아오니 하루가 다 갔다. 샤워로 노곤함을 씻어내고 게스트 하우스의 휴게실에서 마지막 일정을 시작했다. 컵라면에 맥주. 이런 하루 끝의 맥주는 모든 피로를 씻겨내다 못해 증발시키고, 자리가 끝날 때쯤엔 다시 극대화시켜 깊은 잠에 빠지게 만들곤 했다. 그렇게 남해의 첫날밤이 지나면, 분명 다시 걸을 힘이 생겨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