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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Apr 02. 2023

빈 곳을 채우는 일

서른한 살이 되고 나는 암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삶을 채우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면 기묘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무언가 빈 곳이 생기면 으레 같은 것으로, 아니면 최소한 비슷한 종류의 것으로 채워야 할 것 같지만 사람의 인생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이별을 겪은 후 괴로운 기억에 빠지지 않기 위해 헬스에 몰두하는 친구를 본 기억이 있다. 헬스는 기본적으로 자신과의 싸움의 성격이 강한,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닌가. 반면에 이별이란 것은 곁에 있던 사람이 떠나 빈 곳이 생긴 일일 텐데,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어서 헬스가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이 될 수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사람의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으니 그저 망각할 방법을 찾는 것뿐인 걸까?


클라이밍을 시작한 지 삼 개월쯤 되어간다. 별다른 다짐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올해 일월의 첫째 주에 클라이밍장에 등록을 하고 일주일에 서너 번씩 꾸준히 나가고 있다. 새해 목표에 클라이밍 꾸준히 하기라도 넣어뒀더라면 이미 목표를 하나쯤은 이루어서 자존감을 끌어올리는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언제부터인가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 일이 없어졌다. 지금보다 삶이 불안정할 때, 그러니까 이십 대 중반 정도까지는 '내가 망하지 않을 계획'이라며 수시로 목표를 설정하고는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목표는커녕 별다른 다짐도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목표라는 것은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기라도 해야 생기는 법이니, 별다른 감흥 없이 맞이하는 새해 또한 내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증거겠거니 싶다.


그런 일상 속에서도 무언가 꾸준히 하는 일이 생겼다는 것은 다행이고 행운인 일이다. 목표는 없어도 삶을 채워줄 무언가는 항상 필요하다. 요즘 내게는 클라이밍이 그 '무언가'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직장-집-직장-집'이 반복되는 하루 대신, '직장-클라이밍-집-직장-클라이밍-집'이 반복되는 하루 정도로 일상을 바꿔주었다. 암벽을 오르는 일은 멀티태스킹으로 진행할 만큼 만만하지가 않아서, 복잡한 생각을 효과적으로 잊게 만들어 준다. 역시 빈 곳을 채우는 일보다는 무언가 비어있다는 기억을 망각하는 게 좀 더 쉬운 일인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이 괴로울 때면 몸을 더 괴롭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정신적 고통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흔히 쓰이는 지나친 음주와 고강도 운동의 공통점은 몸이 괴롭다는 것 아닌가.


운이 좋게도 새로 생긴 취미에는 꽤 소질이 있는 편인 듯하다. 비슷한 시기에 레슨을 시작한 사람들 중에서는 진도가 가장 빠른 편이다. 열심히 암벽을 오르고 나면 선생님께서도 이따금 듣기 좋은 말을 해주시는데, 서른한 살이 되어도 잘한다는 칭찬은 여전히 기분이 좋다. 나이가 들수록 칭찬받을 일이 많지 않아서 어쩌면 이전에 듣던 칭찬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른이 넘어 무언가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는 일은 또 얼마나 값진 경험인지! 그래서 더 열심히 하다 보니 클라이밍은 일상에서 꽤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처음에는 스트레스로부터의 해방, 공허함을 불러오는 기억을 망각하게 해주는 정도의 역할이었다면 이제는 클라이밍을 즐기는 시간 자체로 삶의 일부를 채워나가고 있는 듯한 기분도 느낄 수 있다.


유난히 주말이 길게 느껴졌던 지난겨울 끝자락. 다시 출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삶은 되감기가 안되는데 기억은 돌아가고 싶은 날들로 가득하다. 지금까지 익숙하게 나를 채우고 있던 것들, 하지만 어느새 아득히 멀어져 버린 많은 것들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영영 되찾을 수 없는 기억의 한 조각으로 변해갈 것이다. 이런 상실감은 좀 우울하기도 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내가 느끼는 상실감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던 것들이 어느 순간에는 조금씩 구원의 손길로 변해간다. 삶에 크고 작은 빈자리가 생겨도 반드시 같은 것으로 채울 필요는 없어서, 그래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면서도 사람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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