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하리 <도둑맞은 집중력 >
무언가 놓치지는 않을까 내내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우리는 '지금, 여기'의 삶을 놓치고 있다.
원래 그는 몇 시간이나 한자리에 앉아 글을 읽고 쓸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정신이 널뛰는 것 같"았다. 그는 최근에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하면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그러면 확실히 즐거워"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나는 그가 자신이 이룬 방대한 과학적 성취를 외면하고 캔디크러시사가 게임을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가 말했다. "집중력이 예전만 못 합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냥 굴복하는 겁니다. 그리고 기분이 나빠지죠."
요한 하리 <도둑맞은 집중력> 19쪽, 어크로스
세 가지 이유
<도둑맞은 집중력>의 저자인 요한 하리는 책의 프롤로그에서 '나와 이 여정을 함께해야 하는 세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개인적 차원에서 집중력 저하는 이루고 싶은 일들을 이룰 수 없게 하므로 삶을 훼손시키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정보와 산만한 주위 환경으로 인해 무언가에 오랫동안 집중하지도, 고요한 상태를 충분히 유지하지도 못하는 상황이 오랫동안 유지되면 자기를 잃어버린다.
이러한 상황이 몇 달에서 몇 년간 이어지면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하는 능력이 망가진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삶에서 길을 잃게 된다. (24쪽)
두 번째 이유는 집중력 저하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 전체의 위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기후위기와 같은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긴 시간 하나의 주제에 대해 집중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시민들이 그러한 능력을 잃음으로써 사회의 문제해결능력 또한 저하된다.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단순한 권위주의적 해결책에 쉽게 이끌리고, 그러한 해결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26쪽)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면 그것을 바꾸기 시작할 수 있다." (26쪽)
핵심은 즉, 집중력 저하는 '깊이 사고하는 능력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는 점점 깊이를 잃어가고, 깊이 사고하지 못하니 삶에서 마주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이루고 싶은 목표를 성취해 내는 능력도 함께 저하된다. 그리고 스스로 무얼 좋아하는지, 어떤 삶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아마 그런 상태로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희미해져 자주 떠올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유명한 격언을 모두가 다시 한번 되새겨 봐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스마트폰과 선택한 적도 없이 쏟아지는 정보들, 이러한 환경은 우리에게 '사는 대로 생각하라'라고 끊임없이 부추기는 것만 같다. 개인적 차원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은 이미 넘어섰다고 해도, 스스로 저항할 수 있는 만큼은 해봐야 할 때가 아닐까? ‘깊이 사고하는 능력'이 소중하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가끔 이들은 자신이 사랑했으나 그만둔 활동(예를 들면 피아노 연주 같은)을 아련하게 이야기하며 먼 곳을 바라보기도 했다. (35쪽)
너무 빠른 속도와 멀티태스킹, 그리고 몰입의 손상
처음부터 '멀티태스킹'은 뇌의 능력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작업을 처리할 수 있는 기계의 성능을 의미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인간의 뇌에는 멀티태스킹 기능이 없어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할 때 실제로 우리의 뇌는 '잦은 전환'을 경험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작업 사이를 오가면서 순간순간 뇌를 재설정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는 대가가 따르고요. (60쪽)
무언가에 집중하다가 잠깐 메시지나 SNS를 확인하는 순간 우리의 뇌는 집중력을 잃는다. 그리고 본래 하고자 했던 일에 다시 집중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깊은 집중력이나 몰입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라면 그 시간은 훨씬 길 수 있다. 지금도 사람들은 이미 많은 시간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데 쓰고 있지만, 실제 소비되는 시간은 그보다도 훨씬 많다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워치의 화면으로 끊임없이 전달되는 알림들은 과연 다 필요한 것일까? 그 잠깐의 '멀티태스킹'의 대가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나는 대부분의 알람을 꺼버렸다.
우리가 집단적으로 "주의력 자원의 더욱 빠른 소진"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내가 프로빈스타운에서 어떤 경험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내 주의력 자원의 범위 내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내가 실제 처리하고, 생각하고, 숙고할 수 있는 만큼의 정보만 받아들였다.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나는 정보의 소방 호스를 잠갔다. 그 대신 내가 선택한 속도로 물을 홀짝이고 있었다. (53쪽)
멀티태스킹은 일의 능률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몰입의 경험을 어렵게 만든다. 몰입은 하고 있는 일에 너무 푹 빠진 나머지 모든 자아 감각을 잃은 상태, 시간이 사라진 듯한 상태, 경험 그 자체의 흐름을 탄 상태를 뜻한다. (85쪽) 요한 하리는 몰입의 즐거움이 잊히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너무 잦은 멀티태스킹의 부작용이기도 하다. 몰입이라는 것은 가장 높은 집중력의 형태를 의미하는데, 뇌를 빠른 속도로 전환시키면서 몰입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몰입은 보다 긍정적인 즐거움을 선사한다. 몇 시간 동안 집중해서 본인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일에 몰두한 결과로 얻는 기쁨과, 같은 시간 동안 엄지손가락을 위로 올리면서 짧은 영상을 시청하면서 얻은 즐거움이 같은 차원에 속할 리 없다. 몰입이 내 몸을 이완하고 정신을 열어주는 듯했는데, 아마도 내가 최선을 다했음을 자각했기 때문일 것이다.(93쪽) 저자는 하루의 초반에 몰입을 세 시간 정도 하면 나머지 시간을 이완된 상태로 더 여유롭게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다만 몰입의 경험은 나쁜 요소를 제거하는 것만으로 찾아오지는 않는다. <도둑맞은 집중력>에서는 몰입을 위해 필요한 세 단계를 제시했다. 명확하게 정의된 목표를 선택하고,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능력의 한계에 가깝지만 능력을 벗어나지는 않는 일을 하는 것이다. 필요한 이상적인 목표는 마지막으로 오른 산보다 약간 더 높고 어려운 산이다.(88쪽) 한마디로 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이룰 수 있는 - 혹은 그렇게 믿을 수 있는 - 의미 있고도 구체적인 목표가 필요한 것이다.
토요일 아침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
몰입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휴대폰도 보지 않고 집중해서 두 시간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 빠져들었던 어느 주말 아침이 떠올랐다. <가면산장 살인사건>이라는 책이었는데, 독서모임을 함께하는 지인이 갑작스레 빌려준 책이었다. 추리소설을 읽은 지 오래되기도 했고 요즘 읽는 책과는 결이 좀 달라서 다소 시큰둥하게 받아 들고 집으로 가져왔다.
나 또한 독서를 몇 시간 동안 이어서 하는 능력이 많이 손상되어 있었기에, 초반부는 며칠에 걸쳐서 나눠서 - 요즘은 독서를 하면 늘 '무언가 손상됐다'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 읽게 됐다. 그런데 소설의 전개가 워낙 흡인력이 강해서, 절반 정도 되는 분량을 주말 아침에 한 자리에서 다 읽게 된 것이었다. 책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무슨 연락이 와있는지, 어떤 알림이 뜨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소설의 결말은 다소 슬픈 구석이 있었지만 책을 덮고 왠지 기분이 상쾌해져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도 하루 내내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몰입의 즐거움'을 경험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두 시간짜리 영화도 중간에 다른 것을 하지 않고 집중해서 보는 일이 드물었다.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몰입했을 때, 잠시나마 일상 속의 '나'는 사라지고 하나의 작품에 온전히 집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즐거움 또한 유튜브의 '쇼츠'나 인스타그램의 '릴스'를 연달아 보면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나는 뇌 과학도 심리학도 모르기 때문에 거기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란 어렵지만, 이것은 경험적으로 분명한 일이다.
요한 하리가 하루의 시작에 몰입을 세 시간 정도 경험하면 더 열린 태도로 여유 있게 하루를 보낼 수 있다고 한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눈을 뜨고도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휴대폰을 한 시간 이상 들여다본 아침과 깊은 집중을 경험한 독서로 시작한 아침은, 이어지는 하루에 확연한 차이를 만든다. 그러니 토요일을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에게 몰입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두 시간쯤 독서를 해도 좋고, 축구나 수영 등 좋아하는 스포츠를 즐기는 방법도 괜찮을 것이다.
무언가에 중독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선택한 행동으로 의식적인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몰입할 수 있는 긍정적인 목표,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 긍정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당장은 너무 거창한 일로 느껴진다면, 이렇게 작은 변화부터 시작해 나가는 것은 어떨까?
요즘 이틀에 한 번 정도는 야외 러닝을 한다. '디지털 디톡스'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일부러 스마트폰은 두고 나간다. 산책로가 있는 태화강까지 걸어가는 시간, 유산소 운동으로 러닝을 하는 시간, 그리고 다시 걸어서 돌아오는 시간까지 하면 보통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가 걸린다.
스마트폰과 떨어져서 시간이 좀 흐르고, 끝없이 이어지는 태화강을 따라 달리고 있으면 그런 기분이 든다. 마치 뇌에 랜선이 연결되어 있다가 뽑혀서, 비로소 자유로운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이렇게 간단한 경험만으로도 확실한 사실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들과 나를 분리시키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조금씩 늘려가야 한다.
하지만 삶을 보람되고 가치 있는 경험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이러한 '분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면 삶은 비어 있을 뿐이다. 요한 하리는 자신의 삶을 '진공 상태'로 만들었던 프로빈스타운에서 소설을 집필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인생의 끝에서 떠올리게 될 것은 SNS에서 받은 '하트'의 수가 아니라 '몰입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나를 몰입하게 만드는 가?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선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를 차단하고, 뇌가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내가 무얼 원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대답은 모니터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