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의 서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희 Jan 07. 2018

끝나지 않는 아픔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반레

 동남아시아 여행을 앞두고 첫 번째 여행지인 베트남에 대해 알고 싶어서 베트남 작가 '반레'의 장편 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을 구매했다. 지금까지 접해 온 외국문학은 대부분 미국이나 프랑스 위주의 선진국 작품이었는데, 베트남 문학을 접해봄으로써 또 다른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책을 읽으며, 그 전쟁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이 조금씩 뒤틀리는 것을 느껴야 했다. 나는 책을 읽는 와중에도 수시로 검색을 통해 팩트를 확인해야 했고, 지금은 정말로 다른 기분으로 그 전쟁을 떠올리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역사적 사실에 대한 언급은 조심스럽고 확신이 서질 않기에 쉽게 얘기할 순 없을 것 같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여행과 더 많은 공부를 통해 보다 깊은 통찰에 이르기를 바란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이 미국을 포함한 열강의 침략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침략국에는 한국도 포함되어있다.





악의 없는 묘사의 전쟁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은 자전적 소설이다. 저자인 '반레'는 1966년 17세의 나이로 입대하여 종전까지 군인으로 미국에 맞서싸웠다. 당시의 베트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항불전쟁)으로 프랑스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자신들을 또다시 침략한 외세가 증오스러웠을 것이다. 또한 그 전쟁으로 엄청나게 많은 가족과 친구를 잃어야 했기에, 나는 이 참전용사 작가에게 지금까지도 분노가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혹시라도 책을 읽으며 편파적인 묘사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을 주의하며 책을 읽어 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반레의 소설에는 적군에 대한 악의적인 묘사가 없다. 적어도 이 한 권은 그렇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은 그저 전쟁이 얼마나 비참하게 인간의 삶을 빼앗는가를 보여주고, 그들이 폭격기 아래서 겪어야 했던 감정을 전달할 뿐이다. 단지 베트남의 청년들이 어떻게 전우들을 폐허가 된 국토에 묻어야 했는지, 땅과 마찬가지로 점점 폐허가 되어가는 가슴속에 사랑하는 이들을 어떻게 묻어야 했는지를 생생히 전달할 뿐이다.


 소설의 중반부에, 폭격으로 동굴이 무너져 그 안에 갇힌 동료들을 구해줄 수 없던 군인들이 끝내 울음을 터뜨리던 장면이 아련히 마음에 남는다. 커다란 바위 건너 동굴 속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살려달라는 목소리, 그들은 아직 제대로 싸워본 적도 없는 어린 여성 대원들이었다. 주인공 '빈'과 그의 전우들이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애쓰다 방법이 없자 울음을 터뜨리고 절규하는 모습이, 그리고 그 안에서 너무나 허무하게 죽어가야 했던 소녀들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졌다.


 빈은 눈이 붉게 충혈될 만큼 온몸으로 바위를 끌어안고 힘을 썼다. 감정에 복받친 몇몇 소대원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소리에 모두들 따라 울었다. 그들은 불가항력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울었다. 눈앞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구해줄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분노했던 순간은 군의관 '바오'가 그의 여인 '꾸애지'를 죽이는 장면이었다. 자신의 승진이 어려워질 것을 염려한 바오는 꾸애지가 임신을 하자 독극물을 주사해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비열하고 잔혹하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타락한 인간의 전형이다. 그러나 꾸애지는 오히려 황천강에서 오히려 군법회의에서 처형당한 바오의 과욕을 안타까워한다.


원한 때문에 복수를 꿈꾸지는 않아요.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원한은 인간의 영혼을 불구로 만들 뿐이죠. 원한은 단지 인생을 질식시킬 뿐이에요.


 꾸애지의 이 대사는 책의 표지에 나와 있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이 문장이 반레가 전쟁에 대한 원한을 표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음이 잘 나타나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죽인 원수마저 증오하지 않는 꾸애지를 통해, 전쟁 앞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해자이자 한없이 약한 존재라는 것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이 소설에서 작가가 증오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전쟁이다.


살아 남은 자들의 할 일

 '반레'라는 필명은 작가가 전쟁 중에 사망한 친구의 이름이라고 한다. 시인이 꿈이었던 친구의 이름으로 작가는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책의 초반부에 주인공 '빈'에게 마을의 한 어른이 "죽은 이들은 우리가 그들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을 모르겠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반레는 살아남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이 있는 듯하다.


 책의 말미에 황천강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빈(주인공)은 자신의 전우들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무참히 죽어간 이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그의 전우였던 '팝'뿐이다. 그 모습을 보고 빈은 망각의 죽을 먹고 환생하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그곳에서는 지금도 누군가의 넋이 환생을 거부하며 지나간 슬픔을 기억하기 위해 황천의 강을 떠돌고 있을 것만 같다.



 환생을 해서 더 나은 삶을 누리게 되는 걸 더는 바라지 않게 되었어요. 저는 결코 망각의 죽을 먹지 않을 거예요. 가족과 고향, 절친한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을 잊고, 제가 살아온 날들을 잊고, 인간의 삶에서 제가 받았던 그 아름다운 정감들을 모두 잊으면서까지 얻고 싶은 것은 없어요.


 '잊지 않겠다'는 것은 작가의 다짐이기도 하다. 빈과 마찬가지로, 반레는 오늘까지도 수많은 죽은 벗들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그는 오로지 전쟁에 관한 시와 소설만을 쓰는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나는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은 내 친구들의 얘기를 하고 가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책을 읽고 이 정도로 마음이 무거워졌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비통한 감정을 느꼈다. 비교를 하자면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아픔을 생생히 전달한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두 소설에 공통적으로 담겨있는 이야기가 단순한 허구의 소설이 아니라 역사 속에 실재했던 아픔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슬픔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읽은 후에 굉장히 무거운 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일이라고 하기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그들이 묻혀있다. 그들의 슬픔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책을 읽고 비통한 감정을 느끼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외면하며 살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에서 빈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처럼, 사람이 되는 첫째 도리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자유주의에 대한 환멸과 21세기가 맞이한 기술적 도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