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를 찾던 밤
조지아 여행기
- 호텔 매리얼과 하우스 와인
트빌리시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도시에 짙은 어둠이 내린 밤이었다. 기차역에서 볼트(Bolt)를 이용해 택시를 불러 숙소로 향했다. 택시는 도시의 번화가를 따라 달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흔하다면 흔한 가로등이 늘어선 밤거리와 차량의 소음 같은 것들로 트빌리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는 없었다. 택시는 곧 가로등의 불빛마저 연해지는 골목길로 들어갔다. 예약한 숙소는 호텔 매리얼(Hotel Marial)이라는 이름으로, 나리칼라 요새 반대편 언덕 위의 대로변을 지나 좁은 골목을 따라 조금 걸으면 나오는 곳이었다.
차에서 내리니 밤 11시쯤이었다. 이름은 호텔이지만 실제로는 1-2인실 위주의 게스트하우스에 가까운, 2층 주택 정도의 작은 건물이어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트빌리시에 도착한 첫날이라 도시가 익숙하지 않아서, 자정이 가까워 오는 때 어두운 골목을 걷는 게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지도를 보면서 십 분쯤 헤매다 빨간 간판에 'HOTEL MARIAL'이라고 적힌 글씨를 발견했다. 안도하며 녹색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작은 정원 같은 마당이 있었다. 트빌리시에도 많은 비가 내렸던 듯, 나무에는 이슬 방울이 맺혀 있었고 테이블과 의자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정원을 살펴보고 있으니 인기척을 느꼈는지 곧 호스트가 공용실 쪽에서 나왔다. 밤늦게 도착할 것 같다고 미리 양해를 구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표현하면 다소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호스트는 친근한 동네 아주머니 같은 느낌이었고, 남편과 함께 숙소를 운영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에게 묵을 방을 안내받고 짐을 풀고 나니 시원한 맥주 생각이 간절해졌다. 무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고 비도 맞고 그러다 바투미를 떠나 여섯 시간쯤 이동한 뒤였다. 그렇게 여행지에서 고단한 하루를 보낸 끝에 마시는 맥주가 얼마나 시원한지 알기에 그대로 잠들기는 아쉬웠다. 구글지도를 살펴봤지만 근처에 문을 연 슈퍼는 없는 듯했고, 방금 막 트빌리시에 도착한 터라 낯선 동네까지 나가기는 조금 꺼려지는 늦은 밤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방을 나와 공용실로 향했다. 호스트 부부와 딸 세 사람이 무언가 정리를 하고 있는 듯했다. 공용실은 주택의 흔한 거실과 같은 형태였다. 내가 거실 한쪽에 방황하듯 서 있으니, 호스트는 무슨 일인가 싶었는지 혹시 필요한 게 있냐고 말을 걸어왔다. 한눈에 보아도 무언가 판매할 것 같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나는 일단 물어나 보기로 했다. ‘일단 물어봐라, 사람들은 생각보다 친절하다.’ 스무 살쯤 읽었던 랜디 포시의 <마지막 강의>라는 책을 나는 이 두 문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혹시 맥주 같은 걸 팔지는 않으시나요? 사러 나가기에는 시간이 늦어서요..."
그러자 그녀는 몹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지금 집에 맥주는 없다고 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고 아임 파인, 오케이 하며 굿 나잇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이 - 영어를 거의 못하는 듯했다 - 아내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고 부부 사이에 한 두 마디의 짧은 대화가 오갔다. 남자는 나를 보며 '오-' 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고는 냉장고를 열고 보라색 액체로 채워진 페트병을 가져왔다. 와인의 발상지인 조지아에서는 집집마다 사람들이 직접 만든 와인을 페트병에 담아놓고 마신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보았던 게 생각났다.
"하우스 와인."
남자는 역시나 그 와인을 본인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 했다. 어떤 표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것이 하우스 와인이고 내가 만든 것이니 가져가서 즐겨 보라는 의미는 명확히 전달되었다. 나는 목이 말랐을 뿐이었고 술을 많이 마실 생각은 아니었기에 한 잔만 따라가겠다고 했으나, 부부는 페트병 통째로 내게 건네며 '이건 네 거야' 하고 말했다.
잇츠 유얼스, 하는 정다운 권유를 뒤로 하고 내가 작은 와인 잔에 술을 따라 방으로 돌아올 때, 부부는 '겨우 그것 가지고 되겠느냐'라고 웃으며 물었다. '한국인의 술부심'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인가, 하고 잠깐 고민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웃으며 충분하다고 대답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조용한 방에서 조지아에서의 첫 와인을 맛보니,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집에서 직접 담근 것이라고 하기에는 맛이 썩 괜찮은 듯했다. 술을 마시니 음식도 먹고 싶어 졌다. 그제야 저녁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한국에서 가져온 몇 안 되는 컵라면을 하나 꺼내먹을 타이밍인 듯했다.
나는 그 소중한 컵라면을 정수기로 가져갔다. 그리고 정수기가 작동하지 않는 것도 모르고 찬물을 부었고, 이를 뒤늦게 깨닫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속상한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와 그대로 와인을 마시다가, 여행을 위해 새로 산 흰 티에 쏟아 붉은 자국을 남김으로써 그 늦은 밤의 만찬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내가 정말 가까운 사람 몇 명과만 공유하는 비밀이 있다면, 내게는 이따금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는 것이었다. 찬물에 사망한 컵라면을 보고 있자니 나의 실수를 볼 때마다 '지긋지긋하다'라고 웃으며 말하던 친구가 떠올랐다. 누가 곁에 있는 것도 아닌 혼자 하는 여행이었던 터라 그 상황을 웃으며 마무리하기는 어려운 심경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와인은 아직 반쯤 남아 있었고 라면을 대신할 감자칩도 있었다.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셔보니 당연하게도 그 맛은 그대로였다. 나는 '반 이나 남은' 와인을 마저 비우고, 흰 티에 남은 붉은 자국을 지우기 위해 손빨래를 하고는 자리에 누웠다. 몹시 피곤했었는지 금방 잠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이른 새벽에 눈을 뜨니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물론 숙취는 없었고 그와 비슷한 불쾌한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을 삼킬 듯했던 어제의 먹구름도 온데간데없었다. 호텔 매리얼의 녹색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 트빌리시 여행을 시작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