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 천선란
콜리에게 알려줘야겠다. 인간에게는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속내를 알 수 있는 기능이 아예 없다. 다들 있다고 착각하는 것뿐이다.
천선란 <천 개의 파랑> 329쪽, 허블
소설 <천 개의 파랑>을 읽고 처음 든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우리는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말을 미처 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용기가 없어서 일수도, 낯간지러워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일 수도,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알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혹은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다 셀 수 없이 많은 계절이 흐른 뒤 깨닫고는 한다. 어떤 말은 상대방이 곁에 있었을 때 분명히 전해줘야 하는 것이라고. 시간이 흐르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는 말이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은 잘못 조립된 로봇(콜리)과 저마다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세 사람, 자매인 연재와 은혜 그리고 엄마인 보경의 이야기다. 소방관이었던 보경의 남편이 화재 현장에서 죽게 되고, 어려운 처지가 된 가족은 각자 하지 못한 말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간다. 걷지 못하는 은혜는 지나친 위로는 불필요하다는 것을, 학교를 그만두는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혼자 남은 엄마와 몸이 불편한 언니 사이에서 관심을 바라지 않게 된 연재는 일찍이 침묵을 선택했다. 그리고 보경은 남편을 잃은 아픔에 대해서도, 돈 때문에 은혜의 다리를 고쳐주지 못한 것과 로봇에 대한 연재의 재능을 살려주지 못한 일에 대한 미안함도, 그 어느 하나도 마음껏 말할 수 없어 모든 슬픔을 가슴 깊이 묻어버렸다.
콜리라는 로봇은 경마장의 기수로 만들어졌으나 칩 하나가 '학습 휴머노이드 용'으로 잘못 들어가는 결함 - 하지만 실제로 결함이 있는 존재는 관절이 상한 경주마를 안락사시키는 인간이었다 - 을 안고 탄생했다. 그래서 콜리는 사람들의 말을 학습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탐구하며, 기수 로봇으로서는 불가능한 주체적인 선택을 내리며 '살아'간다. 보경은 콜리에게 자신의 삶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놓는다. 보경의 이야기는 학습하는 로봇인 콜리의 성정을 구성하고, 연재와 은혜는 경주마 투데이를 구하기 위해 콜리와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 시간을 통해 세 사람의 전하지 못한 마음들은 조금씩 이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결국 세 사람은 하지 못했던 말을 조금씩 나누고, 한 걸음씩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연재가 깨달았듯, 세상 모든 사람에게 이해받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세상에 한 사람쯤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듯이,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가치 있는 일이다. 특히나 그 사람이 나를 위해 삶의 일부분을 헌신한 대상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그 이해가 결코 완전할 수 없음을 알지만 상대방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려는 마음과 행동을 우리는 '애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삶의 대부분의 행복이 그러한 애정에서 비롯된다.
미처 말하지 못한, 그리고 이제는 전할 수 없게 된 이야기들을 떠올려 본다. 현실에도 콜리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학습을 바탕으로 또 누군가에게 따뜻한 이야기를 건네는 존재가 세상에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것 같다. 건네지 못한 말들은 모두 사라져서 끝내 닿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그렇다면 너무 서러운 일이니까. 이렇게 멀쩡히 살아가는 순간에도 하지 못한 말들은 쌓이고 쌓여서 커다란 그리움이 되니까.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참 따뜻하고도 슬픈 이야기다. 하늘이 높은 맑은 가을날, <천 개의 파랑>을 덮고 거리로 나오면 한참 동안 위를 올려다보게 된다. 마치 콜리가 마지막 순간에 떠올린 단어들, 그리움, 따뜻함, 서글픔 같은 말들이 천 개의 파랑이 되어 하늘을 떠다니는 것만 같다.
슬픔을 겪은 많은 사람들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사실은 모두 멈춰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지구에 고여버린 시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 시간들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겠네요." 콜리가 보경을 향해 조금 더 몸을 틀었다.
"멈춘 상태에서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많은 힘이 필요하니까요. 당신이 말했던 그리움을 이기는 방법과 같지 않을까요?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2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