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에세이] 김서현 바이올린 리사이틀: ‘이자이 무반주 소나타 전곡’
1. 안녕, 이자이?
"어우, 추워!"
덜 마른 머리카락 사이로 오전 9시의 차가운 기운이 확 스며들자 나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새 바람이 차갑고, 때때로 재채기가 나는 계절이 왔다. 요즘 왜 이렇게 “에취!”가 잦을까 했는데, 뜨거운 한여름의 기운이 겨우 한낮에나 머무는 시기가 된 것이다. 남몰래 찾아온 이 가을의 끝에는 이제 겨울만 남아 있으니 괜스레 여름을 되짚게 된다. 얼마나 더웠더라?
생각해보면 무더위의 기세는 강렬했지만, 의외로 짧은 괴로움만 남기고 떠났다. 그렇지 않은가? 인스타그램 카드뉴스들이 ‘이제 한국에 가을은 없을 거다’ 하고 겁을 많이도 주었는데 다행히도 지구는 아직 단풍의 기색을 한국에도 남겨주었다. 그게 참 기쁘다.
클래식을 좋아하기 전 제일 아끼던 계절은 단연 가을이었다. 지금은? 뜨끈한 어깨선 위로 추억을 한아름 얹어준 ‘여름’을 막 보내온 터라, 다가올 낙엽보다는 지나온 초록에 괜히 더 마음이 기운다.
그럼에도 산책하기 좋은 때는 역시 봄과 가을이다. 자박자박 낙엽을 밟으며 궁 산책길을 도는 재미, 코끝을 찌르는 은행 열매를 슬쩍 뛰어넘는 스릴이 있다. 따뜻한 기모 옷에 몸을 숨기고 잔뜩 웅크릴 수 있는 것도 좋다. 겨울처럼 매섭지 않고, 포근한 시원함 속에서 얇은 이불을 하나둘 챙겨 다닐 수 있는 계절이라 참 좋다.
2025년의 가을이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에 잠시 더 과거로 떠나보자. 2024년의 가을쯤이면 어떨까.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나름 게으르면서도 바쁘게 지냈던 것 같은데, 막상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럴 땐 인스타그램 스토리 보관함을 열어보면 된다. 간편하다!
확인해보니, 기가 막히게도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 하이라이트를 올려 두었다. 참… 사람 한결같네.
다음 게시물은 무엇이었을까. (아이고) 나는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의 원주 공연에 가지 못해 서글퍼하며 한참 주저리주저리 투덜거리고 있었다. (음하하) 작년의 나는 하루하루 다이나믹한 감정선을 오가고 있었구나. 공연 하나 못 갔다고 큰 엄살을 부리던 그때에 비해, 지금의 나는 조금은 성장했을까? 전—혀, 아직 그 자리 그대로다.
여름과 가을을 되짚는 이 순간에도 9월은 흐르고 있다. 슬슬, 기대와 아쉬움이 뒤섞이는 시기가 찾아온다. 왜일까. 짧은 이별이 목전이기 때문이다. 나의 클래식 스타들은 대부분 나와 또래여서, 9월이 지나면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많이들 떠나시기 때문이다. (이미 가신 분도 있고)
비단 연주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9월과 10월은 누구에게나 분주한 계절인 것 같다. 누군가는 직장에 적응하느라, 또 다른 누군가는 대학원 수업이나 진학 준비에 몰두하느라 저마다의 이유로 매우 바쁘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겠다. 불확실의 추에 매달린 채 하루하루를 건너고 있지 않은가? (대롱대롱)
지금이야 이렇게 글을 쓰며 한 번씩 안정감을 느끼지만, 아무것도 그려내지 못하던 때의 나는—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몰랐던 그때의 나는—도대체 어디에 이 불안을 기대고 있었을까.
얼마 전 영상을 하나 봤는데, 누군가가 “한국인은 불확실성을 특히 선호하지 않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엇, 그러네. 맞는 말 같다. 불안정한 상태 자체를 싫어하니, 우리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사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 불확실함을 벗어나려는 게 타고난 기질이 아니라, 결국 내가 속한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가치관이라면? 내 기질도 주어진 조건 안에서 긁어모아 스스로 빚어낸 것일 테다.
그렇게 다시 생각하니 여러 의문이 이어졌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 걸까. 당연히 내 것이라 믿었던 것들, 과연 정말 내 것이 맞는 걸까.
글쓰기만 해도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아주 미약하게나마 “너는 이걸 조금 잘하는 것 같아”라는 칭찬을 받아본 영역이 있지 않은가. 나에게는 그것이 ‘그림’이었지, 글이었던 적은 없었다.
특별히 상상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인물화를 기가 막히게 잘 그린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나이대에 또래보다는 선을 조금 더 그을 줄 알았다. 객관적으로 대단한 재능은 아니었지만, 눈앞의 사물을 조금 더 ‘엇비슷하게’ 하얀 페이지 위에 옮겨낼 수 있었다. 그래서 종종 “어, 잘한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면, 괜히 그림을 그리고, 스케치 영상을 찾아보곤 했다. 뭔가 역량이 부족하니 자기계발을 해야겠다 싶을 때도 늘 그쪽이 따라붙었다. 그나마 내게는 ‘재능’이라 부를 만한 게 그림 하나쯤 있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글’을 쓰게 되었다. 왜 시작했을까. 사실 글 자체가 원목적이 아니었다. 당장 내 눈에 담긴 걸 내려놓을 수단이 필요했고, 누군가처럼 내 손으로 무언가를 그려내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냥 그리 하고 싶었다.
어떤 형태로 담아낼 것인가? 수단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던 찰나, 그 당시 내 눈에 가장 밟히던 타인의 결과물이 한글로 이루어진 ‘글’이었다. 아, 이건가 보다! 하고 그날로 나는 글을 긋기 시작했다.
풍경을 한글로 묘사하는 일은 퍽 난감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림을 떠올려보라. 기본기가 조금만 흔들려도 금세 엉성해진다. 그래서 ‘투시’나 ‘인체 해부학’ 같은 기본기를 혼자 익히려 해봤지만, 여간 쉽지 않았고, 집중도 잘 되지 않았다.
근육을 일일이 외우고 구조를 반복해서 그려야 하는데, 얼마나 재미가 없던가. 내 마음에 비해 투자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글에는 이상하게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냥 이대로 해야 할 것 같은 느낌. 그 기운이 나를 이끌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내 안의 것들을 그려낼 수 있는 영역이 그림뿐 아니라 다른 곳에도 있구나. 벽돌 하나가 툭- 떨어지고, 그 자리에 작은 틈새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클래식 안에서 내 긴 선들은 꽤 유용한 도구였다. 운 좋게도 올해 1월, 관람했던 공연의 첫 리뷰를 쓰면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내가 건져 올린 문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바로 작년 11월, 명동성당에서 열린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의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리사이틀에서였다.
엥? 그게 무슨 곡이냐고? 말 그대로 피아노 반주 없이 바이올리니스트가 홀로 이끌어 가는 여섯 곡이다.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에서 영감을 받은, 벨기에 출신 작곡가 외젠 이자이의 작품이다. 이자이는 여섯 곡을 쓰며 각각을 특정 인물에게 헌정했다.
클래식 곡들의 배경사를 들여다보면 의외로 거창한 이유가 아닌 경우가 많다. 영감을 받아서, 지인에게 헌정하려고, 존경해서, 혹은 의뢰를 받아서 등 다양하다. 생각보다 ‘엄청난 영감으로 쓰여졌다’는 이유보다, 휴가 중 본 풍경 같은 단순하고 사실적인 계기가 더 흔하다.
나도 그렇지 않은가? 왜 리뷰를 쓰기 시작했는가?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풍경들을 기록하지 않으면 그날의 마음과 시선이 너무 쉽게 사라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저 오래도록 추억하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최초의 계기는 단순히 그뿐이었다.
그래. 외젠 이자이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는 클래식과 글쓰기—그 두 세계와 내가 친구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준 인물이었다.
당신에게 클래식은 어떤 느낌인가? ‘교양’의 영역처럼 다가오는가? 아니면 괜히 뒷걸음치게 만드는 장르인가? 나도 그 뒷걸음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어, 어렵다!”라는 말이 떠오르기 전에 이미 “어, 이거 뭐지?” 하고 물음표부터 띄워버렸기 때문이다. (최애가 선택한 레퍼토리 위주로)
어린아이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낯선 사람의 머리카락을 아무 생각 없이 만지작거리듯, 반짝이는 보석 반지를 장난감 삼아 던지며 놀듯, 나는 클래식에 다가갔다. 공연이 있었던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할 이 곡, 이자이의 무반주 6곡은 사실 전공자들에게 지옥 같은 난이도의 작품이다. 나는 이 곡을 한참 가지고 놀다가, 꽤 오랜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정말 몰랐다).
이 곡이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아차릴 재간조차 없었다. 그 무렵 내 청취 레퍼토리는 대부분 유명한 피아노 곡에 머물러 있었지 않았던가. 즐겨 듣던 건 슈만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그리고 때로는 베토벤의 ‘황제’였다.
그러다 슈만의 현악 4중주, 생상스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거치며 현악기와 인사를 나눈 뒤, 대뜸 이 여섯 곡과 마주했다. 곡 1번의 1악장 Grave를 들어보시라. 위로 솟구쳤다가, 아래로 깊이 파고들었다가, 다시 확—돌아온다.
도입부는 나를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그냥 나를 두고 구덩이부터 판다. 초심자가 듣기엔 배려가 없고, 무엇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들어내야 한다’는 사실부터 거대한 장벽처럼 다가온다.
우리가 전공생이 아니고서야 음악을 들으며 뭔가를 ‘알아내야’ 한 적이 있던가. 그것도 공연을 감상하기 위해? (고개를 젓는 중)
근데 난 그리하였다. 어떻게? 그냥 무작정 듣기로! (호호...)
그래, 여기서 내 교양 일대기가 시작된 것 같다. 어렵다고 말하면서도 이 한복판에 서 있기를 택한 걸 보면, 나도 결국 ‘파고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임을 인정하게 된다.
2024년 11월 18일. 그보다 몇 달 전, 나의 첫 이자이 청취를 위해 음원 사이트에 ‘이자이’를 검색했다. 지금은 애플 뮤직 클래식을 애용하지만 —한글로 검색 할 수 있다— 그때는 다른 음원 사이트를 써야 해서 검색이 쉽지 않았다.
아주 신중하게 스펠링을 눌러야 했다. (중요!) 조금만 틀려도 엉뚱한 곡이 나올 수 있으니... 모르는 곡을 모르는 단어로 찾는 일이 아니던가. 곡 제목은 영문으로 길게 적혀져 있었고, 그나마 식별 가능한 작품 번호(Op. 몇 번)는 한참 기다린 뒤에야 확인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검색창 제일 위에 뜬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의 음원을 눌러 재생했다. 듣자마자 육성으로 외쳤다. “으엥~?”
이쯤 되면 궁금할 것이다. 선율적으로 막 매력적인 것도 아니고, 반복 재생할 만큼 끌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좋은 곡은 이 시리즈 말고도 넘쳐나는데 왜 굳이 계속 들었을까?
그때의 나는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 분명했다. “미리 안 듣고 가면 무조건 존다!” (안 볼 수는 없다. 최애가 하니까!)
공연을 즐기려면, 연주자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무엇을 그려내고 있는지 약간이라도 체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래 느낄 수 있는 것의 10%만 음미하게 된다. 볼 수 있는 것도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런데 사전에 충분히 성의를 보이고 가면? 하얀 도화지 위에서 연필을 들고, 붓으로 채색해야만 보이던 길목을 눈으로 직접 응시할 수 있다. 소리가 보이고, 떨림이 느껴지고, 마음이 담겨 있다. 현실적이지 않은 문장들이 기꺼이 그곳에 머문다. 이 점을 일깨워준 계기가 바로 이 이자이 무반주 소나타 전곡 리사이틀이었다.
그러니 이런 추억을 안겨준 2024년을 지나, 2025년에 다시 만난 전곡 연주는 나를 눈 반짝이게 만들었다. 시민관객단이 감상할 수 있는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지원 공연 중 하나라 혹시 배정해주실까 기대했는데, 땡이었다. (땡!)
다행히 “보고 싶은 공연이 있으면 신청할 수 있다”는 안내가 있었기에, 유일하게 비워져 있던 주말을 이용해 리사이틀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음하하)
이쯤 되니 나도 약간 자부심이 생긴다. 1년마다 이자이 무반주 소나타 전곡을 듣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있다) 그것도 공연장에서! (있다니까!)
처음 이 레퍼토리를 예습하려 유튜브에 검색해 보았을 때, 1번부터 6번까지 전곡이 통으로 담긴 버전은 찾기 어려웠다. 공연 자체도 드물었고, 몇 년에 한두 명 있을까 말까였다.
아—24년의 나는 생각했다.
‘만나기 쉽지 않구나. 무조건 예습해야 한다.’
25년의 나는 생각했다.
‘아, 또 나타났구나. 이건 뭐다? 가야 한다.’
이번 레퍼토리의 주인공은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이었다. 여러 SNS에서 그의 활약을 접했지만, 내 공연 일대기에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매체에서는 ‘정말 잘한다’는 평이 많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하는지 궁금했기에 이자이 전곡으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후기를 쓰고 있는 지금, 나는 확신한다. 2024년의 임동민, 2025년의 김서현—두 사람 모두 무시무시하다. 왜냐고? 둘 다 보통내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경극에 가까운 난곡을 임동민은 인터미션 없이 1번부터 6번까지 이어 연주했고, 김서현은 암보로 무대를 완주했다. (이게 말이 되나?)
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은 그야말로 책 한 권 분량이다. 한 시간을 훌쩍 넘는 생방송을, 누구는 첫 숨으로, 누구는 눈을 감은 채 끝까지 통과해버렸다.
이자이의 기교 앞에서도, 바흐의 뒷그림자에서도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영역이나 숨을 곳 하나 없다. 다층적 테크닉과 지구력을 지닌 자만이 끝내 걸어낼 수 있는 길이었다.
그 와중에도 연주자들은 각 곡마다 자신들의 색감을 온전히 담아낸다. 푸르거나 따뜻하거나, 같은 음표에서 시작했으나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며 나뭇가지가 뿌리를 내리듯 자신의 색채를 0초부터 마지막 잔향까지 흩뿌린다. 출발선은 같아도 도착지는 완전히 다르다. 같은 곡을 연주해도, 관객을 마주하는 방향이 같아도, 향하는 길은 전혀 다르다.
누군가는 서늘한 첫눈의 정경을, 또 누군가는 온난한 단풍의 계절을 그려낸다. 같은 음표와 동일한 지시를 받았을 텐데 팔 위에 서로 다른 선이 그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이는 수직으로 깊은 8자를 그려내고, 또 다른 이는 상반신을 뒤로 틀었다가 앞으로 돌아오며 수평으로 기다란 8자를 그린다. 어떤 이는 뒤로 멀찍이 사라지고, 또 어떤 이는 앞으로 완전히 자신을 드러낸다.
손끝이 시리도록 잦게 떨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여름의 태양빛을 쏟아내는 이도 있다. 힘을 주는 영역도, 소리를 춤추게 하는 출발점도, 자율성이 주어진 영역 안에서 이토록 자유롭다. 얼마나 재밌을까? (물론 힘들었겠지만)
색은 달랐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모두 예민한 기색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사람이 집중할 때 얼굴에 드러나는 특유의 무표정함, 그 모습이 그들의 표정에 만연했다.
얼마나 많은 무대와 연습을 거쳤겠는가. 이 시리즈는 그들에게도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도전의 영역일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임을 너도 알고, 그들도 알고, 나도 이제는 알고 있다. 그러니 내게 다시 찾아온 25년의 무반주 레퍼토리는 더욱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두 계절을 함께 나누기 전에, 이날의 연주자 김서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사실 많은 설명은 필요 없다. 이만큼 쨍한 색감과 두꺼운 유성매직 같은 소리라니!
첫 음이 이렇게 강력할 수 있나 싶었다. 애초부터 ‘솔로’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활이 현의 안쪽을 깊이 파고들 때마다 드러나는 두터운 소리는 무척 짙고, 성량도 크다.
확대된 음이 진득하게 귀에 꽂히는 순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이런 스타일도 있구나.”
색감은 시나몬빛, 통나무 위에 태양빛을 한 포대 쏟아낸 듯했다. 음에는 엄청난 기세가 담겨 있었고, 음량을 조절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이만큼 던져주고, 이만큼 숨을 내려놓는구나. 섬뜩하면서도 따뜻한 갈색의 소리를 가진 연주자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날 거암아트홀은 꽤 시원했다. 이상하게도 공연 시작 전에는 잘 느껴지지 않던 에어컨 바람이, 모두가 숨을 죽이고 한 사람이 긴 선을 그려내자 은은한 향과 함께 내 볼을 스쳤다.
제3번 ‘Ballade’ 즈음,
코끝을 스친 바람이 계절의 냄새와 겹쳐졌다.
“아—가을 냄새.”
글을 쓰다 보니 왜 ‘향기’가 아니라 ‘냄새’라고 했을까 잠시 고민했다. (왠지 ‘냄새’라 하면 이상한 '냄새'인 줄 알까봐) 하지만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가 그것이었으니, 솔직히 적어야지 별 수 있는가.
일주일을 지나온 지금, 9월 13일의 가을은 어땠던가 떠올려보고 있다. 지금 돌아보면 얇은 긴팔 하나면 충분한, 온화한 날씨였다. 작년 11월 성당 앞 몹시 추웠지만, 그때도 겨울 패딩이 아닌 남색 숏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두 번의 이자이는 묘하게 계절과 계절 사이, 과도기의 언저리에 찾아온 셈이다. 흥미롭다.
어때, 이제는 지나온 나만의 초겨울과 초가을을 되짚어볼 차례다. 이자이를 연주하는 이도 드물지만, 두 번을 놓치지 않고 잡아챈 나도 꽤 특이하지 않은가.
그래도 어쩌랴. 마음에 드는 건 언제나 이렇게 길게 추억하게 된다.
2. 2024년 11월, 2025년 9월.
6 Sonatas for Solo Violin, Op. 27
(Ysaÿe, Eugène)
제1번 소나타
1악장 Grave. Lento assai
겨울
시작이 날카롭다. 성당의 공기가 느껴지는 서늘함. 깊게 파고들어 단숨에 찌르는 듯한 느낌. 무심한 듯 서정적이지만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속도감 있는 연주는 단박에 집중을 불러일으킨다.
공간과 음을 기다리며 울리는, 선명하고 톤 다운된 차가움. 서서히 가라앉다가도 음을 흔드는 순간은 이 악장에 대한 이해도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가을
시작이 짙다. 공간을 압도하는 통나무의 소리. 넓고, 지체하지 않고, 영역을 넓혀가는 느낌. 텐션감과 재지함 속에서 위아래로 크게 파동치되 분주하지는 않다.
닿을 수 있는 곳은 모두 거쳐가는 신중함이 느껴진다. 공간과 음을 뒤덮으며 울리는, 선명하고 고동빛의 섬광. 서서히 숨죽이다가도 음을 뒤트는 순간은 이 악장에 대한 이해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2악장 Fugato. Molto moderato
겨울
악보가 펼쳐지며 투명하게 나타나는 소리가 인상적이다. Grave가 수직적인 흐름을 보였다면, 지금은 수평으로 음이 진동하며 흘러가는 느낌이다. 점점 커져가는 감정선 속에서도 과하지 않고, 오히려 차분하다.
앞으로 끊임없이 달려 나가면서 수갈래로 펼쳐지는 감정과 현의 소리가 여실히 드러난다. 음이 위아래를 타고 유영하다가도 과감하게 내지르고 뻗어 나가는 순간들이 있다. 정제된 날것의 느낌이다.
한편으로는 속절없이 흐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분명히 찍어 내려오는 무거운 음들이 마음에 쿵쿵 박혀온다. 사정없이 유영하는 갈래들. 다시 조금 가라앉아 노래하듯 감정이 차오른다. 깊이 찌르고 다시 소리치며, 소용돌이에 휩싸이듯 흔들리다가 잠시의 침묵 후 날카로운 선율로 마무리된다.
가을
부드럽고 서늘하게 그어지는 소리가 인상적이다. Grave가 영역을 넓혀가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파장의 길이감을 위아래로 넓게 가져가며 흘러가는 듯하다. 작아졌다가 숨을 들이쉴 때도 치닫고, 내보이지만 과하지 않고 오히려 안정적이다.
앞으로 굵은 수성펜을 그어내듯 펼쳐지는 무표정한 소리 속에서 가을의 정취가 그려진다. 음이 위아래를 휘젓다가 쨍하게 노래하는 순간들이 있다. 분명한 기세와 정돈감이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멀리 떨어져 흐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분명히 눌러 내려오는 두터운 음들이 마음을 둘러싸며 움직일 수 없게 포박한다. 다시 조금 멀리서 노래하며 시선이 높아진다. 대지를 누르고, 사람을 외치고, 기세 좋게 아우성치다가 아주 잠시 내려앉은 후, 당겨지는 러프한 긴 선의 짓눌림으로 마무리된다.
3악장 Allegretto poco scherzoso. Amabile
겨울
악보가 펼쳐진다. 깊이 찌르고 올라오는 첫 음이 마음에 남는다. 분위기는 조금 부드러워졌지만, 가볍지 않고 짙다. 높은 음들이 선명하게 짚어진다.
안정적인 템포로 음이 귀에 울려 퍼지고, 현과 공기가 일체된 듯하다. 무겁지도, 주저하지도 않고 떠다니며 빠르게 파동친다. 평화와 파스텔 그린을 떠올리게 하는 곡조.
짙어지는 감정 사이에 구름 같은 음들이 놓여 있다. 마치 떠다니듯 머무르다가 고요히 떠나는 듯한 여운이 남는다.
가을
확실히 여유를 두고 노닌다. 실타래를 굴리듯 시작하는 첫 음이 마음에 남는다.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졌지만, 가볍지 않고 은근히 농밀하다. 보다 나긋한 흐름이 형성된다.
안정적인 템포로 음이 귓가에서 춤을 추고, 현과 공기가 눈을 맞춘다. 가볍지도, 소란스럽지도 않게 낙엽길을 거닐다가 쨍하게 빗금 친다. 온정과 시나몬을 떠올리게 하는 끝음.
아래에서 부드럽게 피어오르는 분명한 색감의 음들. 높게 부유하지도, 내려앉지도 않는 그 지점에서 아득하고 가녀린 마음이 그려진다.
4악장 Finale con brio. Allegro fermo
겨울
악보가 넘겨지는 소리. 단박에 치고 들어오는 강렬한 시작. 1악장이 돌아온 듯한 느낌이다. 수직으로 내리꽂는 활의 소리. 빠른 템포와 정확한 음정 속에서 위아래로 끊임없이 찔러 오는 시원한 울림.
공기를 타고 퍼져 나가는 거대한 울림. 빠르게 달리다가도 기다렸다가 음을 강하게 내리꽂는다. 귓가에 박혀오는 강렬함. 고조되는 감정이 느껴지지만, 여전히 서늘하다. 격정적인 파도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느낌. 멍해지는 기분과 단박에 음을 마무리하는 강단이 인상적이었다.
가을
단박이라 말하기도 무섭게 이미 시작되어 버린 순간. 방금 전 초가을은 어디로 갔는가. 낙엽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느낌. 쿡-쿡- 바닥을 찍고 하늘로 닿아버리는 활의 소리. 높아지는 지점의 두께감. 꼭짓점마다 분명하고 개운하게 터져 나오는 바람 소리.
공기를 통과하는 매서운 울림. 지독할 만큼 온 영역을 다 채우다가 음을 대각선으로 꽂아버리는 연주. 귓가에 박혀오는 음색의 선명도. 텐션감이 강하게 느껴져 뜨겁게 타오른다. 격정적인 불바다 속에서 아우성칠 수밖에 없는 느낌. 멍해지는 시선과 끝까지 힘을 잃지 않는 강단이 인상적이었다.
제2번 소나타
1악장 Obsession. Prélude. Poco vivace
겨울
튜닝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앙칼지게,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멜로디. 마치 이중인격처럼 돌변했다가 치고 들어오기를 반복한다. 빠르게 흐르면서도 선명히 박혀 오는 음들. 고요히 기저에 가라앉아 찌르다가 단박에 위로 솟구쳐 달려드는 순간들.
그 사이에도 음은 흐르고 또 흐르며 점차 강렬해진다. 감정 하나도 허투루 지나가지 않는다. 한순간도 같은 느낌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놓을 수 없는 긴장감과 서정성 사이에서 크고 작게 흔들리다, 극적이고 예고 없이 찾아온 끝맺음.
가을
생글거리며 웃다가 쩅- 하게 치고 들어오는 멜로디. 마치 언제 웃었냐는 듯 무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꺄르르- 소리를 내는 양상이 반복된다. 여유를 가지면서도 빠르게 위아래를 찍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음들. 살며시 기저에 자리 잡아 같은 춤을 추다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고는 또 영역을 가지고 마구 놀다, 다시 위쪽을 괴롭히기 시작하는 순간들.
선 하나를 그을 때도 그 변곡점의 둘레를 이렇게 진하게 가져갈 수 있는가. 소리 하나도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 한순간도 소리를 가만두지 않다가, 극적이고 예고 없이 찾아온 정적.
2악장 Malinconia. Poco lento
겨울
다시 악보가 넘어간다. 기저에 가라앉아 조금은 멀리서 시작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내면의 소리가 흘러나오는 듯하다. 주제 테마를 살려내는 감정. 차가운 음색 속에서 특유의 고요함이 느껴진다.
개인의 감정보다는 공간 속에서 전해지는 외로움이 두드러졌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고요한 아우성 속에 감춰진 슬픔. 푸른빛 달빛이 비치는 방 안에서 차분히 앉아, 초점 없는 시선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한 사람이 떠오른다. 혼자 있기에 더 짙게 다가오는 고요. 질끈 눈을 감는 뒷모습이 그려진다.
가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우는 사람의 표정이 그려진다. 길게 이어지는 눈물 줄기. 그 비애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는 오묘한 얼굴. 따뜻한 음색 속에서 특유의 서정성이 스며든다.
공간의 감정보다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뜨거운 눈물이 있다. 굳이 말을 내뱉지 않아도 가볍게 헐떡이는 숨결. 응시할 풍경은 사라지고, 소녀의 얼굴이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온다. 혼자 있기에, 흘려냈기에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개운함과 고독이 섞인 표정이 그려진다.
3악장 Danse des ombres. Sarabande (lento)
겨울
악보가 넘겨진다. 가벼운 피치카토. 통통 울려오는, 기분 좋은 하프 같은 음들. 마치 무도회가 시작되기 전 사람들의 미묘한 들뜬 감정이 소리로 표현된 듯하다. 전주가 펼쳐지고, 조심스레 발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노란 조명 아래 사람들이 춤추며 움직이는 그림자. 난로 속에서 장작불이 타닥이며 타오르는 평화로운 분위기. 음이 수평과 수직을 자유롭게 오가며, 가볍게 스텝을 밟듯 공간을 유영한다. 가볍고도 날렵한 발걸음 같다.
순식간에 고조되는 감정선. 다시 깊게 찌르고 내려오는 소리. 깊이 짚으면서도 울리는 그 소리가 특히 좋다. 충분히 기다려주며 나타난, 찰나의 정지와 함께 마무리된다.
가을
진득한 피치카토. 댕댕 울려오는, 기분 좋은 우쿨렐레 같은 음들. 마치 마을 축제가 시작되기 전 주민들의 아침 풍경이 소리로 표현된 듯하다. 온 세상이 주황빛이지 않은가. 낙엽이 바람결에 사박거리며 흩날리는 광경. 음들이 서로 얽히며 춤추는 듯하다. 가볍게 왈츠를 연습하듯 공간을 떠다니는 음들. 진중하지만 마냥 무겁지 않은 발걸음 같다.
새초롬한 음색. 날카롭게 공간을 채우는 소리선들. 끝자락의 길이는 어찌나 디테일하게 은색 바늘을 드러내는지. 기다란 하얀 조명 아래 긴 춤을 추기 시작하는 그림자. 현대 무용수의 발걸음을 따라다니는 것만 같다.
4악장 Les furies. Allegro furioso
겨울
누군가의 가벼운 분노가 순식간에 짙어지는 듯한 기분. 하나의 말실수로 마음이 깊이 까매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같다. 이번엔 사선으로 찔러 오는 소리들. 푹푹 찌르는 듯한, 신경질적인 감정들이 여러 갈래로 마구 스며든다.
한 번의 불꽃이 피어오르고, 고요히 타오르다가 번뜩이며, 다시 고요해지고, 또다시 번뜩인다. 끝없이 반복되는 무한의 갈래 속에서 종잡을 수 없는 내면의 양가적 감정들이 마구 흔들린다. 고뇌에 휩싸이는 음과 한 사람. 순식간에 타올라 결국 저질러 버린 하나의 행동. 그로 인해 펼쳐지는 비극적 결과. 그리고 미쳐버린 그림자가 그려진다.
가을
누군가의 신경질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와 버리는 기분. 겉잡을 수 없는 흐름을 거대하게 그려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하다. 어쩜 이렇게 사선으로 돌아오는 영역마다 서로 다른 세기를 줄 수 있을까.
길게 그어진 칼날이 광광— 바닥을 가른다. 저 멀리 있는데도 색감이 이토록 쨍-할 수 있는가.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르는 사이, 이미 눈앞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
끝없이 반복되는 무한의 갈래 속, 형용할 수 없는 소리의 파동들에 마구 흔들린다. 순식간에 내질렀다가, 금세 되돌아올 듯하다가, 결국 내던져 버리는 무언가. 그로 인해 펼쳐지는 혼돈의 결과. 그리고 광기 섞인 빛줄기만 가득하다.
제3번 소나타 “Ballade”. Lento molto sostenuto
겨울
차분하게 시작되며 차갑게 울려오는 소리. 그리고 잠시 사라진다. 아래쪽에서 시작해 위로 서서히 퍼져 가는 감정. 기꺼이 아래에서 기다리며 마음의 고동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 번져 오는 것들 사이로 서서히 다가오는 소리. 차갑게 찔러 오지만 그 안에 짙은 복잡성이 묻어난다. 마치 갈등을 겪고 있는 두 사람의 ‘발라드’를 듣는 듯한 기분. 감정을 타고 흐르는 연주. 화려하지만 동시에 창백해지는 소리. 고요히 갈등하며 지나가는 선율이 점차 고조된다.
수면 아래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치지만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점점 다가오는 파동. 차갑게 치고 들어오는 느낌이지만 그 선을 지켜내려는 절제가 있다. 그러나 점점 참을 수 없게 타오르며 치고 들어오는 매서운 선율. 짙은 서정성이 가득한 음색이 인상적이다. 음을 찍고 내려와 화려하게, 그리고 빠르게 진동하는 듯한 기분을 자아내는 연주였다.
가을
나지막하게 시작되며 드넓게 울려 퍼지는 소리. 그리고 계속 그 자리에 머문다. 이미 사방을 드리운 소리들. 나를 완전히 내려다보는 기세가 있다. 선명하게 찔러옴과 동시에 작렬하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마치 아무도 없는 빈 홀에서 가쁜 탱고를 추는 댄서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감정을 좌지우지하는 연주. 뜨겁게 타오르는 소리. 거칠게 정면을 응시하는 선율이다.
수면 위에서 끊임없이 가쁜 숨을 내쉬며 기세를 넓혀 간다. 점령해 나가는 소리선. 푸른빛을 띠는 불꽃이지만 그 선만큼은 지켜내는 통제감. 일순간 가라앉는 정적. 다시 제자리에서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하는 선율. 갑자기 하늘로 날아오를 듯 아득해지는 음색이 인상적이다. 흐르고 또 흐르며, 특유의 박자감으로 공간을 때려 잡는 연주였다.
제4번 소나타
1악장 Allemanda. Lento maestoso
겨울
무거운 시작과 짙은 서정성. 그 속에서 짚어 가며 흘러오는 음색. ‘드라마’에 몰입하게 만드는 선율. 대놓고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리는 한 여자의 슬픔을 보여주는 듯한 절제미가 느껴진다.
짙게 이어지는 감정선. 분명하게 들려오며 확실히 전달되는 이야기. 조용히 가라앉으며 써 내려가는 마지막 편지, 혹은 유언이 연상된다. 이 이상 찾을 수 없는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흘리는 차가운 눈물. 담담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결심하는 한 사람의 짧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세밀하고 예리한 곡조가 천천히 흘러나오며 숨죽이듯 노래하다가도, 넓고 크게 울려오는 순간들. 무겁지만 한없이 내려앉지는 않고 음을 유지시키는 느낌. 그런 가운데 더욱 깊이 파고들며 울리는 음들이 인상적이었다.
가을
볼드체의 Z가 낮게 깔리며 고개를 든다. 또 한 번, 낮은 소리와 드높임. 다시 한 번. 앞으로 갈수록 크기가 커지는 음색들. ‘소리’ 자체에 몰입하게 만드는 선율. 솔직히 마음속 고난을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는 장악력이 느껴진다.
분명히 누르는 감정선. 장악하며 지나가는, 확실히 눌러 박히는 이야기. 의자에 주저앉아 써 내려가는 마지막 이별가. 혹은 손짓이 연상된다. 아득하게라도 붙잡으려 손을 높게 뻗어 보는 사람의 떨리는 몸짓. 좌절하는 얼굴로 ‘무언가’를 잊어 보려 애쓰는 한 사람의 짙은 절규가 느껴진다.
가로로 넓게 흐르는 곡조가 빠르게 흘러나오며 기세를 더욱 강하게 밀어붙인다. 무겁지 않지만 분명한 감정선이 선율을 지탱하는 느낌. 그 가운데 나지막이 숨죽이며 모습을 드러내는 음들이 인상적이었다.
2악장 Sarabande. Quasi lento
겨울
피치카토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시작. 가볍게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는 느낌. 소리와 공기가 서로 다르게 겹쳐지며 입체감을 형성한다.
음이 둥글게 파동 치다가 잠시 빨라졌다가, 다시 원래 템포로 돌아오는 흐름. 가볍게 위로 유영하는 듯한 느낌이 재미있고, 동시에 마음을 한결 누그러뜨린다. 마지막 부분, 종달새를 닮은 소리와 이어지는 피치카토가 특히 매력적이다. 좋은 소리다.
가을
피치카토를 누릴 수 있는 시작. 소리가 생글거리며 종을 두드리듯 분위기를 들어 올리는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마음이 고즈넉해지는 느낌. 소리가 공기를 다정하게 감싸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음이 기다랗게 넓게 펼쳐지다 주황빛 줄기를 서로 다르게 휘어 감기 시작하는 흐름. 가볍게 타고 흘러갔다가 되돌아오며, 그 펼쳐지는 기세가 능숙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마지막 부분, 맑은 기색을 머금은 소리와 이어지는 피치카토가 특히 매력적이다. 좋은 소리다.
3악장 Finale. Presto ma non troppo
겨울
“팍!” 음을 찍으며 순식간에 흘러가는 시작. 빠르게 흐르면서도 성당의 특성 덕에 음이 울리며 퍼져 나가는 소리가 느껴진다. 그 울림이 눈과 귀를 동시에 사로잡는 기분을 준다. 다른 곡보다 유달리 강하게 전해지는 울림이다.
재간스러운 박자와 속도감이 돋보인다.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 바이올린의 소리를 최대한 표현하려는 의도가 그대로 전달된다. 중간에 글리산도처럼 미끄러져 오는 음들이 선명하게 마음에 남는다.
이 빠른 속도에서 정확한 음을 표현한다는 것이 놀랍다. 에너지가 넘치는 연주. 이런 것을 이렇게 쉽게 들어도 되는 걸까…
가을
“팍!” 음을 찍으며 순식간에 달려가는 시작. 저 멀리 떠나버리면서도 아트홀의 특성 덕에 음이 놓치지 않고 다 잡히는 양상이 느껴진다. 그 밀집된 소리가 귀를 단번에 사로잡는다. 다른 곡보다 유달리 강하게 다가오는 음색이다.
특유의 박자감과 힘을 주는 포인트가 돋보인다.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모두 내보인다는 진심이 느껴지고, 바이올린의 소리를 최대한 담아내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머리가 쨍할 정도로 강렬한 색채감이 마음에 남는다.
이 빠른 속도에서 이 정도의 텐션을 담아낸다는 것이 놀랍다. 기세가 가득한 연주. 이런 것을 이렇게 쉽게 들어도 되는 걸까…
제5번 소나타
1악장 L’aurore. Lento assai
겨울
새벽녘이 드리우며 느껴지는 차분하고도 서늘한 바람 같은 시작. 같은 피치카토라도 이렇게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니 놀랍다. 이전엔 하프 같았다면, 이번엔 기타 소리를 듣는 듯하다. 이전보다 한결 가라앉은 기운이 있다.
음색은 분명하고, 음을 서서히 줄였다가 확 커지게 만드는 순간들이 인상적이다. 기다려주다가 당기고, 다시 확 늘리고, 두드리며 이리저리 가지고 노는 듯한 느낌. 마치 고무줄놀이를 하듯, 바이올린을 가지고 노는 악사의 모습이 겹쳐진다. 장난스럽게 가지고 노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음들은 지독히도 선명하다. 확 피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다시 반복되다 아침이 끝내 떠오르는 순간이 연상된다.
가을
노을빛이 드리우며 느껴지는, 분명하고도 다정한 바람 같은 시작. 그 기운과 딱 맞춰 드리워지는 피치카토와 안개 같은 울림. 기다란 고무줄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가지고 노는 악사. 이전에도 지금도 가득한, 이 강력한 톤.
음색은 통나무를 닮아 있고, 들이치는 빛의 기세는 어찌나 강렬한지. 현대 무용을 바라보는 기분도 든다. 아래를 찍고 위로 치솟는 순간의 길목에 눈을 뗄 수 없다. 이 짙은 선율의 새벽을 맞이한다면, 하루를 진득하게 시작할 수 있을지도.
2악장 Danse rustique. Allegro giocoso molto moderato
겨울
시작부터 장난스러운 느낌이 확연하다. 분명히 찍고 들어오는 음들이 좋다. 장난스럽지만 지나치게 짓궂지 않고, 적당한 균형을 유지하는 점이 매력적이다. 경쾌하고 전진하는 활기가 있다. 동시에 확실히 음을 표현하는 무게감도 느껴진다.
음이 가볍게 지저귀듯 하면서도, 악장마다 다른 표현을 살려내 듣는 즐거움을 준다. 작게 숨죽였다가 “톡!” 찍고, 다시 간질이다가, 서서히 커지며 세밀하게 변하는 음들. 그리고 확 퍼져 나오는 피치카토에서 느껴지는 경쾌함이 특히 매력적이다.
성당에서 들려온 버전은 가장 즉흥적이고 본능적이며 속도감 있는 피치카토였음을 확신한다. 그 순간에 나타난 감정과 영감이 공간 속에 스며드는 느낌을 준다. 피어나는 것을 조금의 주저도 없이 내보이는 자신감과 매서운 질주는 부럽기까지 하다. 마무리마저도 주저 없이 깔끔하고 강렬했다.
가을
기운을 이어 받은 장난스러운 시작이다. 확 도장을 찍기보다는 진하게 이어가는 음들이 좋다. 유쾌하지만 가볍기만 하지 않고, 적당한 균형을 유지하는 점이 매력적이다. 내딛고 짚어가는 재미가 있다. 동시에 소리를 긁어나가는 포인트도 여전하다.
흥얼거리며 휘파람을 부는 듯하면서도, 악장마다 자기만의 스타일을 굳건히 드러내니 듣는 즐거움을 준다. 살짝 뒤로 물러나 웅크려 있다가 “톡-” 찍고, 다시 간질이다가, 충실히 머물 수 있는 구간에서 자잘하게 변주하는 음들. 올 듯 말 듯 밀고 당기며 음을 가지고 노는 순간들.
아트홀에서 들려온 버전은 이전의 짙음을 환기시키는 기분 좋은 피치카토였음을 확신한다. 발이 제대로 풀린 듯 순식간에 흘러가버리는 음들을 붙잡을 여력이 없다. 주저함 따윈 하나도 없으니 지켜보는 내가 절로 신이 난다. 마무리마저도 아주 깔끔했다.
제6번 소나타 Allegro giusto non troppo vivo
겨울
마지막 곡이라는 사실만으로, 연주를 듣기 전부터 끝이 다가왔음을 체감한다. 음악만을 온전히 들을 수 없는 상태. ‘아쉬움’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돈다. 6번 소나타는 연주자님이 가장 익숙하게 연주하시는 곡이었는지, 악보도 보지 않고 연주하셨다. 이전 악장의 질주가 남아 있어 또 한 번 원초적인 연주가 터져 나왔다. 매섭게 달리다가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연주는 이제 무서울 지경이다. (갑작스럽게 돌변하니 말이다.)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들의 표현법이 경이롭다. 마치 각 음마다 울려 퍼지는 방식이 제각각 다른 듯하다. 이 곡은 단순한 연주가 아니라, 바이올린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직접 꺼내는 듯하다. “나는 이런 소리를 낼 수 있어.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어. 나는 이런 존재야.” 하고 말하는 듯이.
연주를 들으며, 내가 느껴온 모든 표현과 감정의 여파가 이 곡 안에서 조금씩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서정적이면서도 화려하고, 마냥 감정적이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이 곡은 속도감 있게 음을 짚어내며 본능적으로 깊이 파고든다. 그리고 날카롭고 짙게 마무리되는 순간, 연주자님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을
마지막 곡이다. 시간이 이만큼 흘렀음을 비로소 체감한다. 음악만을 온전히 들을 수 없는 상태. 시작 부분, 아주 잠깐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음을 앞으로 가져다 놓는 그 포인트가 기억에 남는다. 짧은 순간 안에서도 자유자재로 음을 가지고 노는 모습이 이제는 무서울 지경이다. (언제 흩어져버릴지 모르니)
곳곳에서 다뤄지는 표현법이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이토록 악보 안에 개성을 담아낼 수 있는가? 이 가을의 바이올린 역시 자신만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나는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어. 이 정도까지 다뤄질 수 있어. 나는 이런 존재야.” 라고 말하는 듯하다.
연주를 들으며, 내가 지나온 모든 표현들이 이 곡 안에서 총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농밀하면서도 선명하고, 작렬하는 노을빛 같으면서도 서늘한 온기를 머금은 이 곡은 연주자님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마지막, 앵콜
겨울
앵콜 곡은 1번 소나타의 3악장 Allegretto poco scherzoso. Amabile이었다. 당시에는 왜 앵콜로 같은 곡을 선택하셨을까 하는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성당에서 그 순간 피어나는 그 ‘울림’을 관객과 다시 한 번 나누기 위해 선택하신 게 아닐까. 너무 난해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곡이면서도 그 여운을 함께 느낄 수 있었던 선택처럼 다가왔다.
음이 현을 타며 나타나는 그 파동의 여운을 짙게, 또렷하게 다시 한 번 나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또한, 이 난곡의 마지막을 첫 부분의 서정성과 함께 기억하게 만든 선택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 곡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공연이 끝났다고 해서 완전한 ‘온점’으로 마무리되지 않고, 끝없는 ‘물음표’로 추억을 남길 수 있었던 것 같다.
가을
앵콜 곡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바이올린 편곡)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가느다란 잔떨림들에 순간적으로 ‘오, 뭐지?’ 하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동안은 주로 큰 영역 안에서 음을 다루는 모습들을 많이 봐왔는데, 이번에는 이렇게까지 자잘하게 손끝을 컨트롤해내는 역량까지 모두 보여주는 것 같아, ‘정말 이 무대를 좋아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두터운 소리였다. 그 밀도를 거듭 쌓다가 마지막엔 얇고 가볍되, 분명하게 이별했다. 그 대비가 더욱 인상 깊었다.
3. 안녕, 이자이!
어때, 두 번의 이자이를 지나온 소감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럼 이렇게 대답하겠다. “어우, 힘들었는데?”
친근감을 느낀다 했지, 그의 전곡에 정통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들어낸 나도, 해낸 그들도 참으로 대단한 계절을 지나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연주자들에게 이런 ‘전곡 연주’는 어떤 느낌일까. 성취감일까, 아니면 작곡가와 온전히 공명했다는 기분일까. 일개 관객으로서 느끼는 건… 사실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 해낸 이들보다 더 큰 감흥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 버텨낸 시간들의 보상은 곧바로 오지 않는다. 대신 예상치 못한 순간, 선물처럼 다가온다. 오케스트라 공연의 앵콜에서, 혹은 다른 리사이틀 프로그램 속에서 불쑥 찾아올 때다. 그때 눈이 번뜩이며 “이자이다!” 하고, 남들보다 조금 더 기쁘게 듣게 된다. 안녕? 우리 예전에 인사했잖아. 기억나? 하며 혼자 너스레를 떨 수 있는 것이다.
이쯤 되니 궁금해진다. 나에게 이자이 무반주 전곡을 들려줄 다음 이는 누구일까. 어떤 향을 가진, 어떤 계절의 연주자일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금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깊이, 그들의 소리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내 마음은 워낙 변덕스러워 확신할 수 없지만 그때의 내가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아져 있기를 바라고 있다. 부족하기만 한 나는 늘 여기 있다. 무릎 뒤에 두 손을 끼운 채 상체를 조금 들어 올리고 무대를 바라볼 뿐이다. 그렇게 시간을 쌓아가다 보면 또 다른 계절이 찾아오겠지.
이자이 씨. 우리가 또 다른 날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훗날이 길게도 궁금해지는 9월 21일의 밤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렇게 인사해야겠다.
안녕, 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