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토마토 행성, RoCk 바이올린

[공연 리뷰] 임동민 바이올린 리사이틀 <토마토홀 기획 시리즈>

by 유진

1. 봐봐, 이렇다니까? - '토마토에 스파이가 있다'

공연이 끝나고 친구와 함께 토마토홀을 빠져나와 한 정거장을 걸어가기로 했다.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연베이지 트윈룩으로 만난 우리는 반나절을 비슷한 기운으로 보냈지만, 해가 지고 7시 반이 지나자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나는 하늘을 동동 떠 있는 듯했고, 친구는 저녁 무렵의 하품을 “아바바—” 하고 있었다.


나야 기운이 빠질 새가 있겠는가. 좋아하는 연주가의 공연을 보고, 사진도 찍고, 눈인사를 나눈 사람들과 다음을 기약하며 로비를 나선 참인데. 친구가 빌려준 카메라에는 예쁜 추억들이 두둑히 담겼다. 사진을 얼른 핸드폰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났다. 무엇보다 길게 기다려온 ‘15일의 바이올린’이 아닌가.


아, 어느새 여름이 지나 가을이다. 인터넷에서는 11월까지가 여름이라기에 한동안 휴대용 선풍기와 나시 차림으로 지내겠거니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시원한 바람이 발치에 놓였다. 신기하다.


요즘만큼 날씨가 예측 불가능했던 적이 있었을까. 비도 이상하게 내린다. 한순간에 확 몰아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린다.


일전에 흐린 하늘에 방심해 한 정거장을 걷다, 우양산 하나로 강력한 소나기를 맞선 적도 있었다. 머리끝부터 치맛자락까지 젖은 채 지하철역에 도착했는데 빗줄기가 갑자기 뚝— 멈췄다. (장난해?) 지하철에 올라타니 나 혼자만 분홍색 생쥐 꼴이었다.


놀랍게도 오늘(17일),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와 똑같은 양상의 비가 쏟아졌다. 하필이면 그날 입었던 분홍색 반팔까지 겹쳤다. 날씨도, 옷차림도 고스란히 반복된 순간이었다. 다행히 이번엔 실내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이 옷이 불운의 상징이 될 뻔했다.


공연이 있던 15일 밤에는 다행히 비 소식이 없었다. 우리는 안심하고 한적한 길을 걸었다.


조명이 꺼지고 무대가 막을 내리면, 관객은 무엇을 해야 할까. 오늘의 연주가 어땠는지 함께 소감을 나눠봐야 하지 않겠나? 나는 동행과 함께 공연을 본 날이면, 내 감상을 먼저 풀어놓기보다 친구의 이야기를 먼저 듣곤 했다.


나는 이렇게 글로 길게 남기겠지만, 친구의 소감은 그 순간이 아니면 얻기 힘든 작은 보석함이다. 감흥이란 하루만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던가.


“어땠냐”는 질문에 친구는 짧게 답했다.

“재밌었는데? 좋은 공연이었어.”


엇, 재밌었다고? 그 말을 흘려보낼 수는 없으니 금세 한마디를 더했다. “어디가 좋았는데?”


놀랍게도 친구는 곡마다 인상 깊었던 악장을 짚어주기 시작했다. 나는 그 말을 잊지 않으려 서둘러 카카오톡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 창을 켜서 옮겨 적었다.


“첫 번째 곡은 2악장이 좋았어. 두 번째 곡은 1악장이 최고일 줄 알았는데, 끝까지 다 괜찮더라. 기술이 잔뜩 섞였는데도 개성이 더 두드러져서 재밌었어. 쉬는 시간 끝나고 있었던 세 번째 곡도 2악장이 좋았던 것 같은데, 파트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

어떤 부분은 영화 엔딩에 어울릴 것 같았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는 것 같다가, 어? 그게 아니었어. 여전히 폐허 같은 느낌이랄까. 이게 봄인지 폐허인지 헷갈렸어. 세 번째 곡 2악장에서 눈물 날 것 같은 아련함이 있었어. 그냥 좋았어! 이 이상은 없어.”


이만큼 구체적으로 악장까지 짚어가며 내 최애의 연주를 들어준 친구가 바로 내 친구다. (자랑중) 클래식 공연을 함께 즐겨준 것만으로도 기쁜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어디 어디가 좋았다”고 말해주다니! (매우 칭찬해)


친구도 좋아하는 장르가 뚜렷하다. 그의 최애는 가수 이승윤 씨. 내가 공연을 다니기 훨씬 전부터, 그는 스타만큼이나 바쁜 공연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늘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어느새 나도 똑같이 그러고 있다. (뭐지?)


나였다면 선호하지 않는 장르의 공연은 굳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공연이라면 뭐든 괜찮다’는 태도를 지녔다. 한 우물만 파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이제서야 깨달은 나와 달리, 친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보다 한 발 앞서 있었다.


나는 왜 그러지 못할까. 아마 스스로 ‘취향이 있다’는 전제를 깔고 판단을 내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직접적인 이끌림을 느끼지 못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사람이 무언가를 오래 좋아하려면 본능적인 끌림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날 공연 전에도 친구에게 물었다.

“이승윤 씨가 왜 좋아?”


대답은 간단했다.

“그냥— 이유가 있나?”


그래, 이유를 길게 논할 필요 없다. 나도 같다. 내가 왜 이 사람의 손과 현 위를 자주 보게 되었나? 별다른 이유 없이 좋으니까, 좋은 거다.


2. 왜 두 손 아래가 아니라, 날개뼈 위일까?

ⓒ 유진

늘 스스로에게 궁금한 점이 있었다. 나는 왜 두 손 아래가 아니라, 날개뼈 위의 나무를 좋아할까? 악기 종류가 얼마나 많은데. 팔을 높이 들어 올리지 않아도 바닥을 쿵쿵 울리는 드럼이 있고, 내 시야 한참 아래에서 담백하게, 혹은 툭— 하고 소리를 내주는 기타도 있다.


훨씬 더 대중적이기도 하다.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명곡들이 쌓여 있는가. 내 주변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그 세계에 주목하며 서로 공유한다. “너 걔 노래 들어봤어? 이번 신곡 어때?” 재밌는 페스티벌도 많다. 리듬에 몸을 맡긴 채 날뛰고, 흥에 맞춰 노래하며, 감성이 차오르면 함께 호흡을 내뱉는다.


그럼에도 나는 그 세계 앞에서 조금 낯을 가렸다. 곁에 앉아 “누구세요—” 묻기보다, 살짝 뒤에 서서 “당신도 대단하군요” 하고 관망했다.


이유를 더듬어 보면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나는 호흡이 잠시 멈추는 순간에 피어나는 소리를 더 좋아한다.


쿵쿵 울리는 소리에 오늘의 상념을 잊기보다, 숨소리조차 없는 공간에서 홀로 서 있거나 여럿이 한 줄 네 줄로 다가오는 서사에 서서히 감정을 해소하는 게 재미있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날카로운’ 소리, 실낱 같은 얇은 고음이 좋다. 기타는 그런 소리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악기는 아니지 않은가.

그 이명 같은 게 뭐가 듣기 좋냐 싶겠지만, 음악 안으로 들어오면 꽤 매력적이다. 물론 거기까지 오는 데는 시행착오도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뭐지?” 싶은 순간이 여러 번 있었지만, 친해지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놓지 않고 붙들다 보니 금세 답을 얻었다. 현악기 아래서 피어난 ‘이명’ 같은 소리는 연주가의 손에서 ‘숨’이 될 수도, ‘파편’이 될 수도, ‘목소리’나 ‘호흡’으로 내려앉을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가장 전면적으로 일깨워준 사람이 바로 바이올리니스트 임동민이었다. 다른 바이올리니스트가 어떤 레퍼토리를 택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이상할 만큼 현대음악을 자주 연주했다. 익숙한 장르에 머무르기보다 굳이 난해함을 택하는 듯했다. 이유는 아마 우리처럼 단순하지 않을까? 좋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사리아호와 슈니트케를 택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카이야 사리아호의 Nocturne을 들어본 적 있는가. 그야말로 한밤의 이명 그 자체다. 내가 지난 3월 공연에서 이 곡을 들었을 때의 감정을 불러오면 이렇다.


카이야 사리아호: Nocturne for Solo Violin

작은 들이쉼과 직선의 뻗음. 하지만 야나체크와는 다르다. 야나체크가 더 밀도 있고 분명한 아랫선이라면, 이 선은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다 이내 사라진다. 잠깐 울렁이는 공기, 불규칙한 파동이 삐걱거리며 공간을 두드린다.

익숙하지 않다. 기울어진 또 다른 소리, 옆으로 파고드는 넓은 영역이 스쳐가고, 다시 사라진다. 이번에는 귀를 찢어내듯 날카롭게 소멸하며, 그 파동들이 하나로 엮여 나를 찌른다.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혼란, 침잠하는 기분. 조용히 치솟다가 나만 두고 사라지는 흐느낌.

사정없이 복잡한 마음을 결로 파고드는 둥근 선은 끊임없이 진동하며 나를 물들인다. 그러다 멀어지는 듯 물러나고, 서서히 얇아지는 소리. 퉁— 두드림. 더 멀어지고, 또다시 두드려 나를 건드린다. 마지막 여운의 두드림과 함께 찢어지는 공기의 흐름. 그 흩날림과 이별. 아, 또 나만 남았다.


이게 무슨 곡이냐고? 현대음악이다. 실험적이고 다정하지 않으며, 신경질적이다. 그런데 다 듣고 나면 어딘가 찢겨 있다. 불필요한 생각 주머니에 슬쩍 생채기가 난다.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리가 서서히—흐른다. 그 선을 따라가면 뭐가 보이냐고? 아—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제자리다. 우리가 음악을 들으면서 반드시 무언가를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물론 좋겠지만, 보통은 오히려 무언가를 잊기 위해 듣지 않던가. 심심함, 소음, 졸음 같은 것들 말이다.


이 곡이 좋은 이유는 단순하다. 나를 무시하고 지나가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붙들고 있는 생각들이 사실은 ‘나한테나 심각한 일’이라는 걸 빠르게 인지시켜준다. 어떤 일이 내게는 비극이자 희극일지라도, 다른 이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다.


무엇보다 화음부터가 다르다. 무슨 화음일까? 바이올린 한 대가 혼자 긴 선을 긋지 않았던가.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선 하나를 따라, 얇게 지직이는 공깃소리가 빽빽하게 둘러섰다. 튀어 오르는 소리가 워낙 강렬해 그렇지, 가만 그 둘레를 살펴보면 형태 없는 구름 속의 백색소음이 가득하다. 그저 듣게 되는 소리들인 거다.


가끔은 이런 선율을 듣다 보면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나 싶기도 하다. (뭐긴, 클래식을 듣는 일이겠지) 보통 클래식을 ‘듣는다’ 하면 교향곡의 장중한 풍경에 몸을 맡기거나, 협주곡의 유려한 형식 안에서 흘러가다 부드럽게 가라앉고, 힘을 내어 돌진하는 과정을 감상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던가. 그런데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을 내려놓을 즈음, 15일에 연주된 슈니트케 바이올린 소나타 1번 3악장을 감상하던 때가 떠올랐다.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던가?


그때 내 눈은 줄곧 바이올린이 어디까지 소리를 낼 수 있는지에 머물러 있었다. 음악이라는 형태 안에서 이 나무 악기가 어디까지 ‘자연’을 닮은 소리를 묘사하는지에 집중했던 것이다. 클래식이라는 장르는 원래 불친절하지 않은가.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일러주지 않는다. 그래서 매번 스스로 찾아나서는 여정이 된다.


이 음악들은 우리가 지금 필요로 한다고 믿는 역량과는 정반대의 것을 요구한다. 보다 추상적인 그림을 그려야 하는 장르다. 구체적인 현실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난 작곡가들이 남긴 형상과 의도를 오늘의 연주자가 다시 그려내는 것이다. 서정적이고, 처절하며, 광활한 날 선 아이러니를.


끊임없이 목표와 결과를 특정해 구체화하는 대신, 닿지 않는 도화지를 향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 결국 붓을 드는 일이다. 누군가는 굵은 획으로 서예를 하듯 그어내고, 누군가는 얇은 선으로 세세하게 스케치한다. 이 거대한 추상성을 담아낼 붓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내 클래식 세계에서 유일하게 구체화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여러 공연을 다닌다. 내가 가진 취향이 정말 내 취향인지, 아직 모르는 붓의 표현은 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때로는 졸기도 하면서 내 팔레트에 슬며시 색을 담아내는 재미가 있다. 결국 음악을 듣는다는 건,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보는 일이다.


ⓒ 유진

그런 와중에 찾아온,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케치선을 가진 사람의 리사이틀이었다. 내 세상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임동민은 바이올린 위에서 가장 거침없는 사람이다. 거리낌이 없고, 지나치게 정제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푸르다. 어떻게 연주하든 소리의 방향은 늘 앞을 향한다. 물러서거나 아련한 회고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 보여줄 수 있는 표현의 다양성을 가장 거칠게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다 거쳐가는 베토벤, 브람스 같은 작곡가들을 그의 선으로 직접 들어본 적은 없다. 공연 소식이 뜰 때마다 처음 듣는 작곡가들의 이름에 “엥, 이게 누구얌?” 하며 놀라곤 했다. 고전의 형식미에 빠지기도 전에, 일단 변주부터 시작해버린다. 마지막을 화려하게 끝내는 곡들 대신, 한순간에 사그라져버리는 곡들을 먼저 접했다. 그러니 내가 바흐나 하이든의 종교적 색채가 짙은 곡을 들었을 때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금은 공연을 거듭하며 마음을 넓혔지만, 처음엔 버거웠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바이올린 위에서 자유롭게 칼춤을 추는 연주자였다. 손끝에서 뻗어나가는 소리가 닿는 영역은 늘 예측 불가능했다. 고난일지언정, 그 불확실성 위에서 가장 자유로워진다. 그의 거친 질감으로 빚어낸 해석 덕분에, 나는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스스로 명명할 수 있게 되었다.


굳이 이유를 더 말하자면 단순하다. 나보다 훨씬 예민하다. 그게 위안이 된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괴상한 춤을 오히려 아름답게 춘다. 어떠신가, 당신도 그 안에 들어가볼 의향이 있는가? 첫인사가 뾰루퉁할지라도, 몇 번 눈짓만 주면 금세 응답해주는 것이 그의 음악이다. 마음 몇 조각만 내어주면 웃어주시니, 내가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그날로 돌아가 보자. 아니, 공연이 있던 그다음 날. 16일에 주최·주관사 토마토클래식이 벌써 유튜브에 앙코르 곡 중 하나를 올려주었다. 이보다 빠를 수 있을까. 이미 다섯 번은 돌려 들었지만, 나는 또다시 재생 버튼을 누른다. 15일, 토마토에 담긴 소리를 떠올리며 이 글을 토닥여봐야 하지 않겠나?


슈니트케: 바이올린 소나타 1번
스트라빈스키: 디베르티멘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소나타 1번 f단조, Op.80



토마토? 이게 웬 토마토냐 싶겠지만, 오늘의 주관사 이름이자 공연장 명칭이다. 클래식 관련 알고리즘을 타고 다니다 보면 이 회사 이름이 종종 눈에 띈다. 이번 공연 역시 우연히 ‘티켓통’ 어플을 둘러보다가, 포스터가 뜨기도 전에 공연 정보를 먼저 접하게 됐다.


본 공연은 토마토클래식이 기획한 시리즈 [The Violin Virtuoso] 중 두 번째 무대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초청해, 그들의 음악 세계를 한 무대에 꾹 눌러 담는 기획이다. 1회 주인공은 김재영, 그리고 2회차가 바로 임동민이었다.


공연 포스터나 안내가 올라오기 한참 전, 아무 생각 없이 스크롤하다가 다음 회차 연주자로 그의 이름 석 자를 발견한 것이다. 엥? 정말 뜻밖의 소식이었다. 잠시 놀랐지만 곧 기쁨이 몰려왔다. (최애가 공연한다~~~)


클래식은 대중가요처럼 화려하게 홍보되지 않는다. 원하던 공연이 내가 모르는 사이 휙 지나가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소식을 부지런히 챙겨야 한다. 바쁘다, 바빠!


3. 외딴 토마토 행성 - '네가 알아서 해라'

토마토홀에 오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에 클래식 유튜버 탱로그와 1분 클래식 님의 듀오 콘서트에서 한 번 와본 적이 있다. 그때는 크게 의식하지 못했는데, 다시 와보니 다른 공연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낯선 기운이 확 다가왔다. 무엇일까. 소리를 담는 공간 자체가 상당히 무심하다. (긍정적인 의미로)


음향이 나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모든 소리를 선명하게 다 받아내면서도, 필터링 하나 없이 연주자를 철저히 내버려 둔다. 성당 같은 공간이라면 소리가 그림자처럼 길게 퍼져 잔향을 만들어주는데, 여긴 그렇지 않았다. 여운을 받쳐주는 대신 “우린 여기 있을 테니 네가 알아서 해라”라는 태도를 내뿜는다.


비슷한 공간을 꼽자면 긴장감이 감도는 입시장, 아니면 녹음실쯤이겠다. 다른 어떤 장치도 없이, 오직 연주의 소리만 존재할 수 있게끔 하는 느낌이었다. 예술의전당이나 롯데콘서트홀에서의 마이크가 관객에게 닿기 위함이라면, 이곳은 오히려 관객보다 ‘녹음’을 위한 목적이 더 뚜렷해 보였다. 가수가 녹음실에서 헤드셋을 끼고 노래할 때, 사운드 엔지니어나 PD가 정통으로 목소리만 듣는 것처럼.


이렇게 무심한 공연장은 처음이었다. 부정적인 무관심이 아니라, 그저 자리를 마련해두고 스태프가 물러선 채 연주자만 남겨둔 느낌이었다. 그래서 준비가 덜 된 사람이라면 실력이 단번에 탄로 날 것 같았다. 정말 에코랄 게 없다. 리버브? 없다. 관중석이 어둑해지고, 보랏빛 벽에 하얀 조명이 들이치면, 연주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


피아니스트가 음을 맞춰 반주로 받쳐주었지만, 맨 앞에서 듣기엔 그것조차 성마르게 다가왔다. 원래는 올리브유처럼 부드럽게 흐르는데 이곳에서는 건반조차 날것의 형태로 관객 앞에 떨어졌다.


특이한 공연장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첫 곡인 슈니트케 바이올린 소나타는 바쁜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복잡한 스텝을 밟지 않던가. 이 무감각한 분위기 안에서 그 불편함은 오히려 연주의 긴장과 잘 맞아떨어지리라.


연주자의 소리는 공간에 따라 다르게 들리고, 상황에 따라 또 달라지지 않은가. 이번 공연은 그런 면에서 새로운 색다름이 가득했다. 어디, 이제 지나온 7시 30분의 저녁을 떠올려볼까.


4. RoCk VioLiN - '친구 왈: 바이올린을 누가 이렇게 해(positive)?'


알프레드 슈니트케 –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 유진

I. Andante — 안단테 (느리게)

이거 봐, 시작부터 공간이 아주 무심하게, 예민하게 소리를 받아 치는 게 느껴졌다. 녹음실 안에서 숨죽여 있는 기분이 들었다. 과도한 고요함을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순간의 침묵은 꽤 괴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암전 위로 슈니트케의 긴 숨이 불안정한 색 위에 둥—얹혀졌다. 이 악장에서는 12음을 다 사용한다고 하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하나하나 알겠는가. 다만 내겐 건조한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의 도입부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림자를 다 빼고 시작하지만 달리기 시작하는 순간의 뒷그림자에는 지직임이 남아 있었다.


막 치닫는다기보다는 사방으로 뻗쳐나간다. 점령은 아니지만, 비명을 닮은 소리들이 내 귓바퀴 아래로 면처럼 다가온다. 비명이다, 비명. 소리를 한껏 지른 뒤의 딸꾹질도 있고… 듣기 좋은 방향으로다가...


II. Allegretto — 알레그레토 (조금 빠르게)

앙칼지게 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칼날 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오랜만에 듣는 질감이었다. 천장 바로 아래 상한선을 딱 그어놓고, 매 순간 손가락이 높이 점프했다가 급격히 내려온다. 이 악장에는 특유의 리듬감을 기대하는 구간이 있었는데, 갔다가 돌아오고 또 갔다가 돌아오는 반복이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몰아쳤다.


한 번씩 짙게 도드라지는 선이 있었지만, 겉을 두텁게 덮기보다 얇은 결로 넓게 긁고 지나갔다. 피치카토로 잠시 숨을 고르지만, 여전히 불안정하게 떠도는 소리. 상관없다. 애초에 현대음악에서 편안함을 기대하는 게 모순이 아닌가.


얽히고설킨 선들이 끊임없이 둥글게 말리며 괴롭히는 시간. 체계는 연주자가 책임지고, 우리는 그저 헤매면 될 뿐이다. 끊임없이 고와 저를 오가고,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아우성치다 아리아로 흘러가는—따라가기 벅찬 흐름이 있다.


그럼에도 좋은 건, 활이 현의 뒷면을 스칠 때마다 순간순간 챙겨지는 두터운 울림이다. 피아노마저 홀로 영역을 세우며 불규칙한 리듬을 타자, 잠시 조용하던 바이올린이 다시 불편한 소리를 내뱉는다.


왜 이 음에 익숙해졌을까. 악장 제목조차 모르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 곡이 슈니트케의 바이올린 소나타 일부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묘하다. 뭐, 행하는 자는 친절히 설명해주지 않으니 나는 뒤뚱거리며 좇아갈 수밖에 없었다.


소리에 짓눌리진 않았지만, 마라톤 주자처럼 전속력으로 달리며 눈조차 깜빡이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불현듯 고요가 파고들어왔다.


III. Largo — 라르고 (아주 느리게, 장엄하게)

내가 이래서 이 음악을 놓을 수가 없다. 다시금 되새겨보는 악장이었다. 갑자기 툭 사라져버린 듯한 것이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한다. 연주자의 팔을 주목해야 한다. 그 숨자락을 아스라히 내려놓는 길이다.


모양새는 이명의 흐름과 퍽 닮았다. 끊길 듯 끊기지 않는 긴 호흡을 놓치지 않고 이어야 한다. 아직 끊기지 않았다. 숨을 참아야 한다. 연주자가 팔을 살짝 움직이며 파동을 그릴 때까지. 그러다 피아노의 안정된 음 안에서 조금씩 숨을 내뱉는다. 서서히, 그 속도를 따라가면 된다.


한순간에 벌컥 토해낼 수도 있지만, 그러면 안 된다. 한 발자국씩 내려놓으며 짙어지는 그림자를 하나씩 밟아야 한다. 그러다 연주자가 그 안에 하얀 빛을 조금씩 들이친다. 그림자만큼의 크기로, 동그랗고 은은한 모습이다.


숨이 편해진 자리에는 다시 몇 번의 들이쉼과 내쉼이 이전보다 짧게 이어진다. 숨이 가빠지니 울음이 흐르는 사람이 있고, 감정이 치닫는 이도 있다. 고개를 떨굴 것인가, 시선을 드높일 것인가. 바이올린은 수도 없이 많은 길을 제시한다.


아우성을 쳐라. 욕짓거리를 내뱉어라. 울부짖어라. 선을 그어라. 마구 찔러라. 찢어버려라. 다 버려버리라. 그러다 갑자기 손을 꽉 잡는 사람이 있다. 상처에 갈라지고 핏줄이 드러나는 손가락들이 있다.


한바탕의 소동 후에 찾아오는 고요가 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바이올린이 한 걸음씩, 나보다 조금 더 앞서 계단을 오른다. 높이 오르다 숨을 확 들이쉬더니 휘파람을 분다. 무엇을 말하려 이토록 참아왔던가.


잊지 말자, 긴 숨이다. 세어봐도 좋겠다. 세 글자에 하나씩 담긴다. 읽어볼까?


이대로 그대로 머물러 이렇게 그렇게
머물러 괜찮아 그렇게 이렇게 괜찮아
잊어버려 아 괜찮아 아 괜찮아 ———


IV. Allegretto scherzando — 알레그레토 스케르찬도 (조금 빠르고 장난스럽게)

투박하게 떨어지는 피아노 위로 바이올린이 다시 춤춘다. 잊지 말자, 현대음악이다. 다정함은 잠시뿐, 이제 위험한 춤이 시작된다. 박치로는 절대 따라갈 수 없는 리듬이다.


한 음마다 그어내는 소리의 구슬이 달라 듣는 맛이 있다. ‘라쿠카라차’를 외치는 각 '라'마다, '쿠'마다 힘이 다르다. 파도를 그어내듯 반복한다. 리드미컬하게 타올라라. 자잘한 스텝도 밟아야 한다.


번개가 번쩍 드러났다가 곧 짓이겨야 하는 고난의 길이 펼쳐진다. 재미는 있는데, 도대체 이 ‘독특한 박자’와 ‘삐걱거림’의 종류는 몇 개나 되는건지 알 수가 없다. 소리가 치닫다가 확 내려꽂히고, 바쁘게 흔들리다 대각선으로 긁히고, 먼지를 털 듯 흩날리다가, 다시 상승 곡선으로 매서운 칼질을 한다.


이쯤 되면 스스로 묻게 된다. 내가 지금 좋아하는 건 ‘클래식’인가, ‘락’을 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인가, 아니면 이런 음표가 빽빽이 들어찬 ‘현대음악’ 자체인가. 이토록 치밀한 번잡함을 만들어낸 슈니트케 앞에서 나는 입덕부정기를 겪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 순간 나는 ‘듣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볼거리가 너무 많았다. 생각해보라. 나무 악기로 Rock and Roll을 한다니까?


임동민은 내가 본 연주자 중 가장 뛰놀고, 복잡하며, 형식미보다는 소리의 거친 질감을 드러내는 곡을 즐기는 연주자였다. 그러니 이런 레퍼토리가… (말잇못).


매력적인 건, 한참 정신없이 날뛰다가도 불쑥 고즈넉하게 아름다워지는 선율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지킬 앤 하이드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소리는 이명보다는 훨씬 두껍고, 겉선은 매끄럽지 못하다. 앞선을 깔다가 뭐가 있었냐는 듯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피아노가 무겁게 채운다. 그러면 바이올린은 천천히 ‘라쿠카라차’를 짚어낸다. 타이밍을 예측할 수 없으니 재미는 끝이 없다. 질린다는 개념이 없는 세상 같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디베르티멘토

ⓒ 유진

이 곡은 작년 11월, 하콘 무대에서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가 마지막 레퍼토리로 선보였던 곡이었다. 얼마나 신났던가. 공연 영상이 남아 있었던 터라, 과거와 지금을 겹쳐 보며 어디에서 힘을 주고 어떤 부분에 표현을 달리하는지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내가 기억하던 감정선을 그대로 이어갈까, 아니면 전혀 다른 스케치를 그려낼까. 이번에는 악장별로 키워드를 붙여가며 들었다. 1악장은 폭풍우 치는 밤, 2악장은 소년의 약혼식 잔치, 3악장은 유혹, 4악장은 사랑의 춤, 2인무였다. 그렇다면 이번 무대에서 그는 이 풍경을 어떻게 그려냈을까.


I. Sinfonia — 신포니아 (서곡)

일단 이 공연장이 워낙 성마르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생질감의 무대 위에 위태롭게 올라서니, 작년보다 ‘폭풍’의 기세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깊이 파동을 내려놓는다기보다, 그 자리에서 회오리칠 수 있는 것들을 주워 모으는 듯했다.


잔잔한 바람결마저 서늘하다. 늦가을이 지나 초겨울을 데려오는 풍경일까. 어쩐지 쓸쓸하고 기세는 차가워졌다. 오랜만에 작년의 임동민의 소리를 다시 마주하는 기분도 들었다.


7월에는 소리의 굵기를 여러 방향으로 가지고 놀았다면, 이날은 조금 더 ‘날을 세워’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채 끊임없이 밀어붙였다. 어디서 정지 버튼을 눌러야 할지 모를 정도로, 기세 좋게 달려나갔다.


특히 ‘아이를 훔치는 폭풍우 속 요정’을 묘사하는 데 더 힘을 준 듯했다. 소년을 훔치고 도망가야 하지 않겠는가. 길목마다 그 풍경이 깔린다. 급히 날아다니는 요정이 삐걱거릴 때도 있고, 신이 난 자가 있다면 우는 자도 있다.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애끓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다 다시 요정의 시점으로 돌아온다. 대각선으로 쨍— 소리를 그어내는 순간은 도대체 어떻게 빚어낸 것일까. 스트라빈스키든 연주자든, 둘 다 관객을 가만두지 않는다. 명화를 빠르고 디테일하게 그려내라 다그치는 사람이나, 그걸 체감상 1.2배속으로 재촉해버리는 사람이나. 결국, 다 똑같다!


제대로 신이 난 것이다. 아이를 훔치든 말든! 폭풍처럼 속도감에 전면으로 들이받히며 바쁘게 몰아치더니, 단숨에—휙, 2악장으로 넘어가 버렸다.


II. Danses suisses — 스위스 춤곡

장난기 10방울, 병정 같은 발걸음 5방울, 애절함 7방울을 섞어낸 도입부다. 끝자락에 떨어진 7방울이 길게 이어질 듯하면 장난기가 불쑥 고개를 들고, 다시 병정 같은 발걸음이 길목을 잇는다. 결국 축하의 날을 그리는 장면 아니던가.


토이스토리 캐릭터들이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씩씩하게 걷다니. 현대 작곡가들이 꼭 그렇다. 웃음보다는 익살스럽고, 아련해질 틈을 주지 않고 어느새 괴상해져버린다.


점점 타오르고 신이 날 지점마다 반드시 빡-빡- 소리를 그어내고, 바닥을 꿍- 하고 찍게 만든다. 누가 결혼식에서 병정처럼 걷냐고? (여기 있네!) 그러면서도 꼭 한 줄씩 예쁜 소리를 끼워 넣는다. 포인트가 될 수밖에 없다.


바닥을 쿵- 하고 찍은 만큼, 오른편 상단에는 유리 구슬이 길게 반짝인다. 피아노와 호흡을 맞추며 나아간다. 웨딩은 웨딩이라는 거지. 그럼 장난은 이제 좀 그만쳐~ (왜 저래!)


발걸음에는 술에 취한 듯한 어질거림도 섞여 있다. 얼마나 마신 거냐! 그만큼 신이 난 것이다. 신부의 두 번의 쓸어내림이 아니었다면,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III. Scherzo — 스케르초 (익살스러운 빠른 악장)

요정이 소년을 꾀어내는 장면일까. 나는 상상을 얹으며 자잘한 파동을 바라본다. 아까보다 높은 자리에서 날갯짓하며 여럿을 놀려댄다. “너 이렇게 못하지? 못 따라오지?”


한참 그렇게 놀리다 불쑥 목가적인 장면을 꺼내놓는다. 이렇게 갑작스러울 수가 있나 싶지만, 곡 자체가 원래 그렇다. 연주자의 색감 또한 차가워서, 마냥 따뜻한 풍경은 아니었다.


오늘의 흐름은 끌려다니는 자가 아니라, 끝내 놀림을 주도하는 자의 소리에 맞춰져 있었다.


IV. Pas de deux — 파드되 (2인무)

2인무. 발레 공연에서 가장 시선이 머무는 장면이자, 바이올린 선율에 귀가 쫑긋해지는 악장이다. 작년 11월, 나는 이게 두 사람의 춤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들었다. 그때의 내게 묻고 싶다. 넌 그때 도대체 뭘 듣고 있었니.


연주자의 손길을 보고 있었나, 표정을 응시하고 있었나. 뭐가 중요하랴. 지금 여기서 ‘이런’ 춤이 펼쳐지고 있는데. 은연중에 서정적인 사랑의 춤을 기대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임동민은 단순한 감정을 내세우기보다 잔향·그림자·끝선 같은 곁가지에 이름표를 달아준다. 소리는 가장 차갑지만, 다루는 감정은 오히려 가장 많다. 이러니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드러나는 마음보다 속에서 피어나 스쳐가는 싸늘한 풍경이 있다. 가녀리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한 마음을 살짝 훔쳐내다 보면 어느새 들뜬다. 이 악장에서는 7월에 만났던 소리들이 다시 찾아왔다.


아래로 파동을 주며 굵어지는 흐름을 지켜보는 맛이 컸다. 그러다 순식간에 리본을 당기듯 흐름을 거머쥔다. 이날의 2인무는 두 사람의 대화라기보다, 혼자만의 독백 같았다.


함께 있어도 외롭고, 둘이 있어도 통하지 않는 마음이 길게 남는다. 춤이 끝나는 건지, 곡이 바뀌는 건지—후반부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단숨에 바뀌어버린다. 이 들뜬 기운을 나는 아직도 하나의 말로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재지하다.’


밀당하듯 춤을 추지만, 몸치인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지직이지는 않지만, 아까의 유리 구슬 같은 소리를 피아노와 섞어낸다. 이미 1.2배속 같던 속도를 조금 더 끌어올리며 소리를 긁어낸다. 정말로 긁는다.


내가 지금 듣는 게 클래식일까, 아니면 단순히 소리의 변화를 따라가는 일일까. 무표정한 공연장 안에 있으니 그 감각이 더 선명하다. 화면으로 본다면 또 다르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초 1열에 앉은 내 시선은 달랐다. 활을 긋는 사람과 그 소리를 마치 헤드셋으로 정통으로 꽂아 듣는 듯한 생생함. 내 앞에서 독무 영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지막은 또 어땠는가.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차착—거림이 몇 번이나 나를 흔들어놓더니, 아랫곡선을 좌앙— 긋고는 단숨에 사라져버렸다. (아오, 욕심쟁이 연주가. 바빠도 챙길 건 다 챙기고 가버리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작품 80

ⓒ 유진

I. Andante assai — 안단테 아싸이 (매우 느리게)

피아노가 이렇게 장중하면서도 노골적으로 들릴 수 있나 싶었다. 토마토홀 무대에 서는 연주자라면 각오해야 한다. 여기서는 표출되는 모든 것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바이올린이 얼마나 예민한 악기인가. 활을 긋는 대로, 그대로 ‘당신’이 비친다.


조명 또한 하얗고 직선적이다. 임동민의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1번을 오래 기다려온 터라 ‘흐름’을 느껴보려 했지만, 소리의 노출도가 너무 크다 보니 순간순간 당황스러웠다. 현 아래에서 결이 떨리고, 울먹이기 직전의 형체가 흠칫 드러난다.


일부러 정돈되지 않은 음을 내는 것도 어렵다. 그러나 이 무대에서는 흐름에 맞는 ‘불편한 소리’를, 필요한 ‘지직임’을 그대로 관객의 귓가에 날려야 한다. 음 하나하나가 툭, 툭, 눈앞에 놓일 즈음, 피아노가 저음으로 화살표를 그려 넣는다.


스트라빈스키가 빠르고 높게 뛰놀았다면, 프로코피예프는 거의 ‘베이스’다. 노는 영역 자체가 다르다. 같은 현대음악 안에서도 이렇게 색이 분명히 갈린다.


나는 이 악장에서 ‘숲’을 그리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의외로 잡힌 건 ‘소리선’ 하나였다. 아까의 발칙함은 자취를 감추고, 정적이 지배한다. 악장마다 숨을 고르고, 작곡가마다 다른 얼굴을 가져야 하는데… 투박하게 던져지는 소리 아래서 이 악장은 마무리되었다.


II. Allegro brusco — 알레그로 브루스코 (빠르고 거칠게)

그냥. 툭, 툭, 툭.이다. 간드러질 틈도 없고, 쾅도 아니고, 쿵도 아닌 툭툭. 던져지다가 어느 순간 분위기가 타오른다. 기억하라, 이 소리는 아랫선에서 시작된다. 훨씬 깊은 기저의 안정감을 두고 출발하지만, 통제가 안 될 듯한 기운이 가득하다. 어디서 꺾여 나올지 예측조차 어렵다.


그걸 이렇게까지 ‘날’로 다루는 연주자다. 음이 살아내느라 힘겹다. 내가 이래서 좋아한다. 바이올린이 서서히 번뜩이는 소리를 낼 때가 있다. 옆으로 빗겨치는 소리, 이게 바로 공간음향이 아니고 무엇인가.


겨우 2악장인데 벌써 박박 긋고, 영역 안에서 서정성을 드러내며 성가신 소리를 드높인다. 관객을 스쳐 지나가듯, 연주자를 괴롭히며 몰아붙인다. 현대음악은 정체를 알 수 없는데도, 묘하게 사람을 ‘응시’하게 만든다.


도대체 왜 이러나 싶은데, 나보다 훨씬 다채롭고 요란해서 좋다. 이렇게 괴롭히다가도 서서히 예쁜 미소를 보여준다. 물론 그 입꼬리는 매우 사악하다. 칼춤이 시작되는 순간 체력을 몽땅 갉아먹는 속도감이 몰려온다.


내가 바이올린 공연을 보러 와서 사이퍼를 듣고 있다니. (미치겠다) 임동민은 내가 본 연주자 중 손가락이 가장 바쁜 사람이다. 진짜… 락보이맨. (아니, 활털이 다섯 번은 끊어졌다니까요?)


ⓒ 유진

III. Andante — 안단테 (느리게)

아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심장은 쿵쿵 뛰어 죽을 듯한데, 왜 작곡가들은 폭주한 감정을 정돈할 틈도 주지 않고 홀로 저 멀리 아련하게 가 버리는 걸까. 숨은 헉헉대는데, 내 시선보다 아래에서 안개가 드리워진다.


연주자 본인도 날뛴 감정을 꾹 눌러 담은 채, 바이올린과 얼굴을 맞댄다. 몇 번의 숨을 내주어야 이런 소리가 가능할까. 좋은 소리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살아 있다’는 느낌을 전해준다면 그게 좋은 소리 아닐까.


‘푸른 숨’을 도닥여줄수록 좋다. 여기에 가쁜 호흡까지 더해지면? 내 것이 된다. 슬프지도, 무념무상도, 아득하지도 않은, 그저 고달픈 초록빛 치정을 푸르게 그려내니 어찌 몰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나보다 훨씬 앞서 있지도 않다. 나아갈 때는 뒤돌아보지 않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옆자리를 내어준다. 말을 걸지 못하더라도, 거리감만 유지한다면 그의 세계에 드리워진 음악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사실 본인조차 알지 못하는 영역일지 모른다. 긋는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장담할 수 없다. 이 모든 결과물은 영상이나 기록으로 붙잡아 두지 않으면 금세 사라진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붙잡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이고)


조금만 벗어나도 불편해질 소리들이 이렇게 “나 살아 있소” 하고 외치는데, 외면할 수 있겠는가. 드리워진 대로 삼켜질 수밖에 없다. 음반과 같은 곡인데도 소리는 다르다. 표현과 힘의 초점이 다르다.


후반부에 “하나, 둘, 셋, 넷…” 반복하는 지점이 있다. 끝으로 갈수록 힘을 주는 방식도 달라진다. 정없을 정도로 파동치는 나지막함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매번 마디마다 작은 경극을 펼친다.


ⓒ 유진


IV. Allegrissimo — 알레그리시모 (매우 빠르게)

솔직히 말해, 이 악장이 시작될 때 “어, 벌써 끝이 다 와가?” 싶었다. 전체 흐름은 못 따라가고, 소리 표현에 시선 하나, 지직임에 시선 둘, 튕김에 시선 열을 두다 보니 큰 그림을 놓쳤다.


예습을 얼마나 했는데 이럴 수 있나 싶지만, 진짜 그랬다. 갑자기 속도가 내달리기에 “악! 벌써 마지막이야?” 하고 깨달았다.


첫 음은 놀라웠다. 생기를 100% 무장한 채 등장했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이전 악장에서 보지 못했던 ‘청량함’은 뭐지? 방금까지는 슬리데린의 초록 같았다면, 지금은 초록매실을 몇 방울 탄 듯했다. 약간 밝은 노란기가 섞였다.


건조한 반짝임도 나름 좋았다. 이만큼 알아서 하라며 공간과 마이크를 내던져 준 공연장은 처음이다. 원래 방임이 더 무섭지 않은가. 신이 나서 이 악장에서 마구 날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소리로 락킹하는 연주자를 구경하느라 바빴다.


난리가 났다. 이 연주자 앞에서는 ‘지루함’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 그냥 없으니까. 숨 가쁘게 따라가기도 벅찼다. 내가 왜 이런 글쓰기 패턴을 가지게 됐겠는가. 습관이 그렇다. 눈앞의 뮤즈가 늘 이런 곡만 하니까, 나도 음표 하나하나를 박아 넣듯 글자를 눌러 적는다.


한숨에 하나, 두숨에 둘, 밀려난다. 방금까지 날뛰더니 또 혼자 저 멀리 가 있다. 이상하게 이 연주자의 레퍼토리 끝자락은 늘 혼자 남겨짐이다. 화려한 장식 같은 건 없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서서히 아무 음도 없었던 제자리로 돌아간다.


어디로 가야 한다는 안내도 없다. 그저 연주자가 그 길로 가면 따라갈 수밖에. 가신다… 서서히 파동치며 사라지셨다. (멍…) 끝났다. (아니, 안 끝났다. 앙코르는 듣고 가야지…)


앙코르.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로망스 (영화 '등에' 모음곡 중)

마주하는 앙코르마다 내가 아는 곡이면 얼마나 좋을까. 내 뒤쪽에서 “어머, 이 곡은?” 하는 기운이 전해지는데, 정작 나는 그 말을 못 한다. 아니, 같은 말은 할 수 있겠다. “어머— 이 곡은? (제목이 뭘까?)”


다만 확실한 건, 임동민은 힘든 길을 걸어온 다음에는 꼭 ‘토닥’여주는 시간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배려 있다. (끄덕끄덕) 지난번에는 프랑시스 풀랑크의 〈사랑의 길〉과 마누엘 퐁세의 〈작은 별〉이었는데, 이번에는 쇼스타코비치의 〈로망스〉였다. 영화 〈등에〉를 위해 쓰인 곡으로, 황량한 선율 속에서 올해 내가 만났던 익숙한 소리들이 몇 가지 겹쳐 다시 찾아왔다.


‘로망스’란 뭘까. 사전을 보니 ‘로맨스(romance)’의 비표준어라고 한다. 이거 봐라. 같은 사랑도, 그 안의 이야기도 정해진 규칙 밖에서 논해낸다. 이러니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니 진짜로)


앙코르. 알프레드 슈니트케 – 폴카

낭만이 채 논해지기도 전에 장난기가 불쑥 돌아왔다. 이런— 가만히 있을 틈을 안 주신다. ‘폴카’가 뭔지 궁금해 찾아보니, ‘19세기 초 보헤미아 지방에서 시작해 전 유럽에 퍼진 2/4박자의 경쾌한 춤곡’이라 한다. 내가 언제 또 이렇게 유럽 전역에 퍼진 춤을 직접 듣겠는가.


음하하— 낭만에 취하기도 전에 곧장 “일어나! 일어나! 점프! 점프!”를 교양 있게 당해버려 웃음이 터졌다. 이렇게 긴 길을 걸어왔는데도 끝내 쉴 틈을 주지 않고 채워낸다. 이래서 내 글쓰기 패턴이 이런 걸지도 모른다. (남탓하기!)


ⓒ 유진


5. 아직 안 끝났다. – ‘바라밤바라밤’

ⓒ 유진

하— 진짜 꽉 찼다. 토마토 하나가 제대로 영글었다. 아니, 하나라고 해야 할까? 얇은 에코백 주머니 하나쯤은 두둑하게 채워 넣을 만큼 가득했다. 얼마나 바빴을까 싶으면서도, 이게 연주자들의 기본치인가 싶다.


레퍼토리는 숨이 턱 끝까지 치닫지 않았던가. 네 악장 중 숨을 고를 수 있는 구간은 한두 곳에 불과했다. 사실 연주자들은 빠른 흐름을 타는 것보다 오히려 아주 작은, 숨결 같은 소리를 내는 게 더 어렵다고 하지 않던가. 나에게야 휴식처럼 느껴졌지만, 그들에게는 오히려 더 치열한 숨 고르기였으리라.


공연이 끝나고, 토마토를 양손에 몇 개씩 들고 로비로 나왔다. 관객들과, 이제는 눈인사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삼삼오오 모여 오늘의 ‘수확자’를 기다렸다.


아— 인사는 해야지. 연주가가 관객들과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며 (사진도 찍어드리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사인 받아야지)


오늘의 주역은 어김없이 사인지를 들고 선 내게 “맨날 받으시잖아요—”라고 말하셨다. 허참내, 본인께서 팬의 마음을 어찌 아시겠는가. 오늘의 사인과 내일의 사인은 분명 다르다구요(+_+). 괜히 스탬프 투어가 있는 게 아니랍니다?


이번에도 나는 작은 질문 하나를 적어놓고, 오늘의 연주자에게 또 하나의 수고를 부탁드렸다.


Q. 오늘 제일 마음에 든 곡의 악장은?

(놀랍게도 질문을 보자마자 거침없이 답을 적어주셨다.)

A. Schnittke 3rd.


Q. 왜 마음에 드세요?

A. 뭔가 오늘 느낌이 그래요...ㅎ

그렇다면, 첫 번째 곡이었던 슈니트케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의 3악장을 되돌아볼까?


III. Largo — 라르고 (아주 느리게, 장엄하게)

내가 이래서 이 음악을 놓을 수가 없다. 다시금 되새겨보는 악장이었다. 갑자기 툭 사라져버린 듯한 것이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한다. 연주자의 팔을 주목해야 한다. 그 숨자락을 아스라히 내려놓는 길이다.

모양새는 이명의 흐름과 퍽 닮았다. 끊길 듯 끊기지 않는 긴 호흡을 놓치지 않고 이어야 한다. 아직 끊기지 않았다. 숨을 참아야 한다. 연주자가 팔을 살짝 움직이며 파동을 그릴 때까지. 그러다 피아노의 안정된 음 안에서 조금씩 숨을 내뱉는다. 서서히, 그 속도를 따라가면 된다.

한순간에 벌컥 토해낼 수도 있지만, 그러면 안 된다. 한 발자국씩 내려놓으며 짙어지는 그림자를 하나씩 밟아야 한다. 그러다 연주자가 그 안에 하얀 빛을 조금씩 들이친다. 그림자만큼의 크기로, 동그랗고 은은한 모습이다.

숨이 편해진 자리에는 다시 몇 번의 들이쉼과 내쉼이 이전보다 짧게 이어진다. 숨이 가빠지니 울음이 흐르는 사람이 있고, 감정이 치닫는 이도 있다. 고개를 떨굴 것인가, 시선을 드높일 것인가. 바이올린은 수도 없이 많은 길을 제시한다.

아우성을 쳐라. 욕짓거리를 내뱉어라. 울부짖어라. 선을 그어라. 마구 찔러라. 찢어버려라. 다 버려버리라. 그러다 갑자기 손을 꽉 잡는 사람이 있다. 상처에 갈라지고 핏줄이 드러나는 손가락들이 있다.

한바탕의 소동 후에 찾아오는 고요가 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바이올린이 한 걸음씩, 나보다 조금 더 앞서 계단을 오른다. 높이 오르다 숨을 확 들이쉬더니 휘파람을 분다. 무엇을 말하려 이토록 참아왔던가.

잊지 말자, 긴 숨이다. 세어봐도 좋겠다. 세 글자에 하나씩 담긴다. 읽어볼까?

이대로 그대로 머물러 이렇게 그렇게
머물러 괜찮아 그렇게 이렇게 괜찮아
잊어버려 아 괜찮아 아 괜찮아 ———


이제 보니 오늘 내가 써 내려간 긴 기억 중 가장—어떻게 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문장들이었다. 분명 내가 자판을 눌렀지만, 어떻게 이 길까지 내려왔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만큼 잠시 다른 공간에 다녀온 게 아닐까.


3악장은 어떠했더라. 정말—이 성마른 공간에 탁, 숨이 멎을 듯이, 사라질 듯이 내려앉은 길목이었다. 높게 들어 올린 바이올린과 짚어가는 손가락의 오고감을 기억한다.


이 기억이 언제까지 남아 있을까. 벌써 야금야금 사라지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하다. 지나간 어제는 카메라 셔터만큼 빠르게 휘발된다.


나는 특별히 기대하고 있다고 못을 박아두고, 그 지점이 다가오면 스스로를 긴장시킨다. “기억하자. 기억해보자.” 어떻게 기억하는지도 모르면서 굳이 도장을 찍어두면, 내 뇌가 번쩍—장면 하나쯤은 내게 되돌려준다. “너 이때 되게 좋아했잖아?” 하면서.


이렇듯 스스로 ‘좋다’고 각인한 장면은 연주자와 같은 영역 안에서, 그러나 다른 시간 속에서 공명한다. 이야기의 끝이 없는 것이다. 어제의 기쁨은 오늘의 누군가에게 또 다른 만족으로 피어난다. 이 절묘한 교차가 늘 재미있다. 그래서 이 곁을 놓치 못하고 있다.


ⓒ 유진


아, 어느새 여름을 지나 가을이다. 그렇지 않은가? 9월 중순을 건너고 있는 나는 여러 정돈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그만큼 다양한 ‘안녕’들도 가득하다. 어찌 이러나.


그 느낌 아시는가? 당장 현실적으로 해야 할 일들은 하나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지금 당장의 나를 타오르게 하는 일들, 이끌림에 의해 행해지는 것들은 모두 이루어지고 있다.


하고 싶은 것만 해서는 안 되는데, 결국 하고 있다. 현재의 나는 한없이 자비롭고, 미래의 나에겐 끝없이 이기적이다.


어찌 살려고 이래? 하면서도 내 탓만 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바이올린으로 락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안 따라가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순전히 내 잘못은 아니다. 왜 남탓하냐고? 원래 다 그런 거다~ (능청)


익숙한 패턴 아닌가. 남 얘기를 하다가도 결국 내 곁으로 돌아온다. 타인을 응시하다가도 그 안에서 나를 본다. 너의 반짝임을 주목하며 내 시선 앞에 거대한 미소를 세워둔다.


나의 MBTI 중 내향성과 외향성은 늘 51 대 49를 가리켰다. 내향이 근소하게 앞서 있었고, 외향 지수는 늘 4로 시작했다. 그래서 첫인사를 어떻게 나누는지에 따라 내가 낯을 가릴지 말지가 결정된다.


사소한 순간에 사회적 캐릭터가 갈려버리니, 나는 요새 비기를 쓰기 시작했다. 뭐냐고? 거대한 칭찬이다. 어쩔 수 없다. 나를 반짝이며 바라봐줄 사람을 찾아 이곳저곳을 누빌 수밖에.


내 최애는 소리와 미소로 오늘도 번쩍거리고 있으니, 나는 또 담아낼 수밖에 없다. 그래, 그저 그뿐이다.


누가 나에게 묻기를, 공연을 왜 보냐고?

그냥, 여름이 가기 전에 토마토 하나 더 챙겨두려는 거다.

어떤가, 함께 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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