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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비앙카, 우리의 뒤죽박죽을 위하여!

[책 리뷰]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by 유진

* 이 글은 도서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올파이어의 작품이 나를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보다 나 자신의 행보를 닮아서였다.

비앙카 보스커의 작품이 나를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보다 나 자신의 행보를 닮아서였다.


1. 과장 조금 보태서, 내가 쓴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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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고? 난 네가 스파이다.”


책이 도착한 날은 9월 6일 토요일이었다. 배송 시간을 확인해 보니, 내가 헤이리 챔버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예술의전당 음악당 로비로 향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결국 와버렸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으하하...' 웃었다.


최근에 공연을 몇 개나 봤던가. 그리고 당장 봐야 할 공연은 또 몇 개인가. 앞뒤로만 해도 공연이 세 개씩 줄지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게 내 9월의 풍경이다. 그런데 아트인사이트는 기가 막히게도 책 한 권을 꺼내들어 은근히 물어온다. “이 책, 되게 재밌다?”


솔직히, 소리 읽기도 벅찬 와중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이 책이 궁금했을까. 소개글을 읽는 순간,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아— 책도 보게 생겼네.”


저자는 어느 날 잊고 있던 어린 시절 할머니의 수채화 한 장을 떠올리게 되면서, 무뎌진 감각을 일깨우고 새로운 감동을 되찾고 싶다는 순수한 예술적 열망에 사로잡힌다.

이 열망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 한눈에 알아보기조차 어려운 현대 미술을 '미치도록 이해하고 싶다'는 탐구욕으로 발전한다.

그녀는 마침내 이 철옹성 같은 '순수 예술계'에 제 발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기로 결심한다(업계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꺼져라."라고 응답했지만).

이 책은 아름답고 고상하지만 동시에 모호하고 난해하며, 종종 기묘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고급 예술'이라는 신세계를 온몸으로 겪어낸 현장감 가득한 탐험기다.

또한 보는 이로 하여금 '이것도 예술이야…?'라는 의문을 품게 하는 현대 미술에 눈을 뜨기 위해 수년간 부단히 애를 쓴 저자(또는 일반 대중, 지나가는 행인, 관람객 1인)의 회고록이다.


과장 세 번쯤 보태면, 내가 쓴 줄 알았다. 책을 다 읽고 돌아온 지금도, 과장 열 번쯤 보태 여전히 내가 쓴 것만 같다. 읽는 내내 뒷목을 잡을 뻔했다. (안 잡았다) 도대체, 저자와 통했다는 이런 ‘근거 있는’ 자신감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답은 이미 ‘들어가며’에 나와 있었다.


난 예술이 왜 중요한지, 중요한 문제가 맞긴 한지, 팽팽하게 잡아당긴 천 위에 바위 모양으로 묻힌 물감 자국—보통 ‘회화’라고 부른다—을 고요히 바라보는 시간이 정말로 인간 존재를 바꿔 놓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당장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 내 말이 그 말이다. 나도 지금 '현대 음악'을 알고 싶어 미치겠다! 16페이지로 넘어가 보자. 저자는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절제의 미덕을 모르는 사람이다.’ (너도?) 17이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난 예술을 예술로 느끼지 못하는 때가 정말 많았다.' (나도) 18, '저 꼴사나운 가짜 백설공주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똑똑한 양반들은 이해하고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게 도대체 뭐야?' (그니까!)


19, '그래도 예술가들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 주고 무언가를 말하고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술에 바친다. 그런데 오랫동안 예술을 사랑했고 값비싼 교육까지 받은 내가 그 ‘무언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 그 사실이 나를 미치게 했다.' (으악)


그래, 저자와 나는 일면식도 없지만 저 심경만큼은 절절히 알았다. “정말 미치겠다!” 알고 싶어 죽겠고, 궁금해 입이 바짝 마른다. 나만 알아채지 못하는 그 ‘아름다움’이 도대체 무엇인지, 문장으로 붙잡고 싶었지만 아는 바가 없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클래식 전공자가 아니기에 음악의 배경이나 악보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다. (거의 없다) 작곡가와 연주가들이 어떤 역사를 지나 여기까지 왔는지도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저 네모난 바닥 위에서 어떤 해석을 내려놓고 있는지, 그들의 오늘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나는 ‘분명히’ 붙잡아 두고 싶었다. 어디서 이런 욕심이 비롯된 걸까. 이마저도 저자와 내가 비슷한 경험담을 겪었다.


‘저것을 그리기로 한 계기는 무엇인가? 왜 녹색 중에서도 이 녹색을 선택했는가?’ 미술 비평가들이 단칼에 작품의 ‘형식적’ 측면으로 치부하는 그 모든 사소한 선택이 나를 매료시켰고 궁금증을 유발했다. (1부 - 112p 비앙카 보스커)


아, 나는 누군가의 ‘선택’을 좋아하는구나! 유심을 바꾸고, 그늘 하나 없는 눈부신 블록 위를 걸으며 든 생각이다. 어쩌다 이런 문장이 떠올랐을까? (당연히 나는 오늘도 클래식을 들었다) 내게는 작은 규칙이 하나 있다. 날이 좋거나, 기분이 신나거나, 어딜 놀러 갈 땐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64를 들어야 한다. 연주는 다들 아는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 버전이어야 한다. 클래식에서 2악장은 사람의 침묵과 고요함이 배경음을 깔아주고, 그 위로 악기들과 솔로 주자가 천천히 그리고 다정하게 날아오르는 곡이 많다. 멘델스존도 그러하다.

정말 이 버전이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일단 흐름 자체가 엄청 신중하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소리니까 연주자가 이에 취해 더 날아오를 수도 있고, 조금 더 빠르게 달릴 수도 있고, 고저를 확실하게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오히려 짚어가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차분하게 또 덤덤히 나아가는, 이 정도가 마음에 든다. 음이 공기 중에 피어나 사라지는 순간순간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나는 아직 2악장의 품 안에 놓여 있다. 활이 바이올린을 타고, 딱 중앙의 적당한 속도의 흐름을 따라 위아래로 오르내린다. 현을 짚고 있는 왼손은 때때로 흔들린다. 이런 흔들림 자체가 연주자의 ‘선택’에서 탄생한다는 걸 얼마 전 알게 되었다. 나는 원래 악보에 이런 표현까지 모두 정확히 지시돼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왼손의 비브라토—즉, 바이올린 연주할 때 현을 미세하게 흔들어 음을 떨리게 만드는 주법—는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르게 쓰인다는 걸 알았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이 포인트에서 개성이 생기고, 해석이 존재하는구나!

스스로 이걸 깨달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가 담긴 영상들을 모아 보니, 그 시작점이 약지 손가락이 짚는 비브라토에서 나타났다. 너무 신기했고 또 그때 알았다. 내가 좋아한 것은 클래식이라는 장르 자체보다, 누군가의 해석, 누군가의 선택이라는 걸. (2025년 5월 8일 - 나)


우리는 예술가들의 ‘선택’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저자의 표현을 빌려 이 상태를 설명해보자. '어떤 작품을 싫어하는 것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나의 권리였다. 그러나 작품과 전혀 관계를 맺지 않는 것만큼은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래, 우리는 그냥—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누구에게? 바로 그들에게.


결국 그 선택이다. 지금 이 시각, 이렇게 연주하겠다고 내린 결단과, 왜인지 모르게 그 색을 택한 무의식적인 이유가 겹쳐져 나와 당신을 이 자리까지 데려온 것이다.


하필이면 절제의 미덕을 모르고, 뭔가에 빠지면 모든 것을 쏟아붓고, 그 ‘무언가’를 알아보지 못하면 미쳐버리는 우리에게!


그래, 바로 그렇다. 지금의 내 심경을 가장 고스란히 담고 있는 책이었다. 그동안 읽었던 어떤 책보다도, 나와 같은 길을 걷되 조금 앞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공연을 잠시 뒤로 미루고, 꼭-꼭 접어 두며 다시 이 하얀 페이지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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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었다고? 무엇을? 이 빽빽한 종이를 많이도 괴롭혔다. 왜냐고? 나는 좋은 책 ― 이를테면 필사하고 싶은 문장이 지나치게 많은 책 ― 을 읽으면 늘 곤란해진다. 그 문장들을 언제든 다시 돌아볼 수 있게 표식을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당장은 몹시 귀찮지만, 어딘가에 적어 두는 게 훗날을 위해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않은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키보드를 우다다- 치기에 바빴다. 그런데 손을 노트북 위에 얹어 두는 일조차 생각보다 큰 체력을 소모한다는 걸 다들 아시리라. 나는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몇 바가지를 퍼 올리듯 건져내느라 쉴 틈이 없었다. ‘들어가며’ 첫 페이지부터 얼마나 큰 체력을 소모했던가. 그렇게 한참을 치고 치다가, 결국 어디 던져 두었던 샤프를 꺼내 밑줄을 좍좍 긋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래도 직선다운 직선을 그었던 것 같은데, 후반으로 갈수록 거의 ― 현대 미술을 했다. 글자 위를 침범하는 게 부지기수였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줄만 그어 두면 나중에 어떻게 찾아오나 싶어 하단 종이 끝을 얌전히 접었다. 접다 보니 또 생각이 든다. 적당히 마음에 드는 곳과, 정말 곧장 다시 돌아와야 할 곳은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오케이. 적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은 아래 하단을, 크게 마음에 와닿은 부분은 상단을 아주 큰 세모로 접자. 얼씨구―? 내 책은 점점 부채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 두꺼운 책을 어떻게 하루에 다 읽겠는가. 샤프로 시작했던 밑줄은 어느새 두터운 볼펜으로 바뀌어 있었고, 위쪽에만 있던 큰 세모는 어느새 아래로 내려와 있기도 했다. 책장이 넘어갈수록 책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어쩌겠나. 누가 이렇게 재밌으래?


밑줄은 특정 단어를 강조하는 거친 원으로도 변했고, 이 단어와 저 단어를 잇는 화살표도 좍―좍 그어졌다. 아니, 도대체 공감 안 되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 (긴 대각선으로도 접었다) 장난해? 애초에 택배 상자를 열 때부터 이 책은 이럴 운명이 분명했다. 초장부터 낯가림이라는 게 전혀 없었다.


어차피 이제 나에게 ‘책’은 더 이상 ‘소중한 보물’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일전에 언급했듯, 나는 하나에 마음을 주면 주변 것들에는 금세 삐딱선을 타곤 한다. 이미 ‘클래식’이라는 책도 겨우 1장을 넘겼을 뿐인데, 감히 또 다른 ‘책’이 끼어들어? 우스운 심보가 끼어 있는 것이다. 사실, 일부러 선을 그어 둔 것 같기도 하다. 나, 이미 이것만으로도 벅차 죽겠으니까. 너 재밌는 거 내가 충분히 알거든? 그런데 좀 이따 만나…


그런데 이게 뭐냐. 나 지금 뭐 하냐. 왜 신청했고, 왜 배송 문자를 받았고, 왜 클래식과 발레 사이에서 허덕이다가도 이 문장들을 급하게 들이키고 있나. 욕심이 끝이 없다. 미치겠는 거다. 궁금한데, 도대체 어떡하라고..


“나는 삶을 통째로 예술에 바치고 있다고.” 저자가 자꾸만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결국 나는 체념하고 책의 마지막인 ‘감사의 말’에 닿을 때까지 박박―읽어낼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참으로 나를 성가시게 했다. 드디어 다 읽었다! 하고 덮어놓고도, 그다음 날 나도 모르게 가방에 슥―넣고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양옆에 사람이 가득한 지하철 내부는 여유 있는 듯 북새통이었다. 그 속에서 마음 한편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니, 공연 리뷰도 잔뜩 밀렸는데… 이럴 때 핸드폰만 붙잡지 말고, 밑줄 그은 데나 다시 읽으며 뭐 쓸지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번뜩 든 생각에 나는 곧장 가방 안에서 책을 꺼내 촥 펼쳤다.


사람들에 둘러싸인 그 가운데에서 나는 꾹꾹 접어 두고 박박 그어 둔 문장들을 처음부터 밟듯 다시 짚어 나갔다. 이리 접고 저리 접으며 읽다 보니, 저 앞 검은 유리창에 비친 사람들이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앞선 욕심, “당장 이 문장을 표시해”라는 마음이 더 커서 그런 시선쯤은 무시할 수 있었다.


아— 문장을 되짚어 오는데, 뭐 이렇게 재밌나 싶었다. 이미 아는 얘기인데도 다시 볼 때마다 웃음이 터지는 게 있지 않은가. 내가 근 1년 가까이 켜켜이 쌓아온 문장들이 여기에 꽉- 채집되어 있었다. 정말, 저자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맙소사아아아아아.”였다. 당신은 누군데 이렇게 나와 비슷한 선상 위에서 ‘현대 미술’을 지나온 것인가. 나는 지금 막 ‘현대 음악’이라는 아이러니를 온몸으로 들이받고 있는 중이 아니던가.


도대체 공명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그래, 대체 뭐가 그리 이 사람과 ‘공감’했기에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떠는 걸까. 필사한 내용을 다시 들여다보며, 일반적인 마음은 초록으로, 나를 닮은 부분은 분홍으로, 잊고 싶지 않은 문장은 노랑으로 표시했다. 그러다 보니 비로소 갈피가 조금 보였다.


아— 나는 그래서 이 책을 이토록 괴롭혔구나. 필사한 내용을 보니 공백 포함 5,000자를 훌쩍 넘어, 결국 취사선택이 불가피했다. 어차피 자주 마주할 문장들이니 당분간은 가장 가까이 품에 두고 싶은 것들만 가져가 보기로 했다.


이 색을 따라가 보자. 무슨 색을 논할 거냐고? 역시 빛을 닮은 노랑이다. 하나씩 비앙카 보스커 씨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대응해 보면 될 것이다.


2. 그와 나의 대응점


그가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이 윌슨의 작품을 사랑하지 않으면 마음을 다칠 것만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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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 안에서 상처받은 경험이 있으신가? 왜 허상인가. 아무도 힐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하고 순간적인 행동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며 스스로 그어낸 상처였다.


누구나 그렇듯, 내밀한 속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건 쉽지 않다. 원하는 수준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겉으론 티 나지 않지만 나름 용기를 내어 말했어도 모양새가 성마르다 보니, 상대는 그게 ‘중요한 얘기’인지 눈치채지 못한 채 고개를 돌리고 다른 이야기를 이어 가곤 했다.


애초에 성의가 부족했다. ‘알아달라’를 기저에 깔아 둔 채 건넨 말이었지만, 겉포장만 보면 중요한 말이라는 힌트도 없고 직접적인 언급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은연중에 정확하고 깊게 눈치채 달라는 건 무리였다.


그럼에도 속에는 ‘나 이랬었어’라는 동그랗고 기대 가득한 마음이 자리해 있었고, 그로 인해 야금야금 여러 번 다쳤다. 꾹꾹 눌러 담은 말은 조그마한 빗금이 되어 하나씩—하나씩—쌓였다. 텅 빈 눈초리, 쉽게 돌아가는 고개, 기대와 엇갈린 현실, 실망감이 흔적으로 남았다.


사실 사람들이 독심술사도 아닌데, 내 세상에서 빛 같은 걸 타인이 어떻게 비춰 주겠는가. 그것도 이렇게 바쁘고 복잡한 세상에. 그래서 방법을 찾았다. 내뱉고 싶은 말을 조금 더 안쪽으로, 더 아래로 내려놓는 것이다.


무언가 말하고 싶을 땐 고개를 들어 산책을 하거나, 아주 작은 공간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속삭이듯 외치곤 했다. 그렇게 마음이 조금 정리되면 네모난 키보드 자판 위에 손을 얹고, 떠올린 문장에 기대한 답을 길게 써 내려갔다.


우스운 건 그 문장 안에서도 솔직하지 못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공개적인 페이지 앞에서든, 소수의 완전한 타인 앞에서든 나는 무언가를 감췄다.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숨고 싶었던 걸까.


하지 않는 것보단 솔직하게 행동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고 늘 마음에 새기지만, 글을 가장 가까이 마주할 이는 결국 나다. 그러다 나를 너무 드러냈다가 누군가에게 너—무 눈치챔 당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에 자꾸 움찔—움찔—뒤로 물러난다.


왜 우리는 어디서든 움츠러드는 걸까. 생각해 보면 결국 방어기제 중 하나일 것이다.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호랑이 소굴에서. 다친 마음을 치유하려고 하얀 공간에 왔지만, 여기서도 ‘안 아프다’는 듯 살짝 웃어 보인다. 인간은 이토록 다치기 쉽고 어리석다.


사람이 무언가와 함께 살면 그것이 그 사람의 의식에 스며드니까요. 이건 굉장한 일입니다. :

그럼에도 포기를 모르는 우리는 이토록 어리석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나는 '굳이' 사유를 만들어 허상의 상처를 잊고, 왜곡된 판단을 열심히 흘려보낸 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나는 자잘한 기대가 많고, 그만큼의 보답이 돌아오길 바란다. 하지만 이것도 이미 무언가를 ‘얻었기’ 때문에 가능한 배부른 생각임을 이제는 안다. 애초에 이 곁에서 살고 있기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닌가.


애초에 삶이 녹록지 않았다면, 당장의 미래가 아닌 오늘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면, 이 모든 건 ‘사치’였을 것이다. 그러니 늘 감사할 따름이다. 저자 말대로, “이건 굉장한 일이 아니던가.”


나는 공연과 클래식을 가방에 키링처럼 달고 다닌다.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을 때마다 그것을 바라보며 산다. 지나온 어제엔 그토록 바라던 것이 있었고, 다가올 발걸음에는 피로 섞인 기대가 기다리고 있다. 그가 나를 기다린다. 기다린다… 이 동사를 내뱉고 난 뒤, 잠시 손가락이 멈췄다. 그 순간을 음미하고 싶었다.


대체로 일방향이지 않았던가. 큰 답변이나 거대한 보상을 원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만들어 낸 인위적인 흐름 하나를 바래 왔던 것 같다.


생각해 보라. 굳이 머릿속에 ‘공연을 보고 글을 쓰겠다’는 약속 하나를 띄워두고, 나만의 할 일을 꾹꾹 만들어낸다. 지키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무언가를 툭 내려놓고 밤 12시에는 이별한다. 그리고 돌아보면, 나조차 알지 못한 이야기가 그 안에서 이어지고 있다.


내 시야에 잡힌 것을 그 순간의 마음으로 눌러낸 것이 누군가에겐 오늘의 이야기가 된다. 나조차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퍼져나가는 실타래, 이방인인 우리가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스며드는 이 긴 선이야말로 참으로 굉장한 일이다.


나는 그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정말로 좋았다. 옆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오래 옆에 있고만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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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정말 마음에 든다. 오래오래 머물고 싶다.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조차 잘 못하는 사람이라면 이 문구 자체도 오글거릴 테다. 하지만 진짜 좋아하는 게 생기면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내뱉게 된다. 칭찬이 막 샘솟는다.


내가 당신에게 거대한 기대를 품은 것도 아니다. 무대 아래에 내려가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눈을 마주한 그 순간의 당신은 분명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가 그러지 않았던가. 작가들의 이력을 꼭 알아야 할까. 직접 멈춰 서서 지금 이 순간을 오래도록 지켜보라고. 보이지 않으면 오른쪽으로, 또 더 오른쪽으로 가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다만 내가 눈에 담는 이 페이지들은 책처럼 접을 수도, 소리를 사진으로 찍어낼 수도 없다. 그러니 짧은 시간을 길게도 들여다봐야 한다. 클래식이란 도대체 뭘까. 이 순간을 영원처럼 즐기려면 관객인 내가 바빠질 수밖에 없다.


작곡가의 의도를 좇아 무척이나 분주한 연주자들은 정작 그 순간 자신이 어떤 형상을 그려내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과연 그들은 연주하는 동안 자기 소리를 온전히 통제하며 흐름을 쥐고 있을까? 아니면 지난날의 연습을 믿고 본능에 자신을 맡길까?


분명한 건, 각자가 그어낸 선이 타인에게 어떻게 들렸는지는 연주자 본인조차 확신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내 세상에선 그들이 어떻게 보일까? 기교나 스킬은 평가될 수 있겠지만, 내 세계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평가를 바란다면 한참 잘못 찾아오셨다. 나는 오래도록 ‘응시’만 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내 포댓자루는 당신의 색과 선으로 이미 가득하다. 진심만 전해진다면, 그걸로 충분히 오래 마음에 들어할 자신이 있다. 정말로!


내가 도움이 되고 있었다. (…)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

그래, 나는 아주 약간 도움이 되고 싶기도 했다. 결국 이 세계에 특별히 관심 있는 아군이 아니던가. 다만 조금 애매하게 중간에 서 있다. 내 앞에 잔뜩 펼쳐진 고전 작품 리스트는 반짝이는데, 내 뒤와 양옆에는 무플 정도의 관심도를 가진 주변인들이 가득하다.


아무리 내 눈을 반짝여주는 세상이어도 누군가에겐 제 눈을 침침하게 하는 밤의 요정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거기다 이곳은 조명이 매우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내가 보고자 하지 않으면 빛이 들이치지 않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공연을 자주 보다 보니 그 점이 유감스러울 정도로 아쉽다. 내가 침대에서 허송세월 보내던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저런 사람들이 목 터져라 노래하고 있었구나. 몰랐다. 정말 몰랐다. 보던 것만 보다 보니, 하던 것만 하다 보니 여력이 없었다는 말 한마디에 다 스쳐갔다.


그러다 보니 없던 맘도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된 이상 너나 나나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 나는 당장의 오늘을 기억하고, 너는 완전한 타인의 시선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추억받아라.


나는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때로는 완전히 착각했음을 선물 받을 수도, 일깨움 당할 수도 있으니 어찌 보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사실 내가 이곳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더 많은 이야기를 더 많은 기회 안에서 해볼 수 있어서였지 무언가를 크게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근데 이 공간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물의 영역이었고, 더 많은 이에게 닿을 수 있음을 알게 되자, 나는 도리어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그냥 아— 붙잡길 잘했다. 그뿐이었다. 다소 피곤하고, 엄마가 딸과의 시간을 빼앗겼다며 많이 섭섭해 하시지만... 순간의 지침에 물러서지 않은 것이 기뻤다.


그들은 특별하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

이곳의 사람들은 무대 위에 선 미술계 인사들처럼, 어딘가 격식을 지닌다.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이 오가고, 나처럼 ‘재미’의 영역으로 바라보지 않는 이들은 ‘좀 차려입고 가야 하나?’ 하는 물음도 던진다.


그러게, 그래야 하나? 싶으면서도 굳이? 라는 생각이 든다. 연주가들의 옷차림에 우리도 맞춰 격식을 꼭 갖춰야 할까? 글쎄… 내 생각엔 번쩍이는 보석 목걸이를 걸고 오는 것도 멋지지만, 반짝이는 눈망울과 ‘안녕하세요—’ 하는 마음만 품고 오는 게 훨씬 값지다.


아무리 잘 차려입어도, 커피를 양껏 마셔도 대문이 닫혀 있으면 들리지 않는 게 클래식이다. 사실 열어놔도 졸릴 때가 있다. 친하다고 생각해도 끝없이 어렵다. 그러니 그냥 툭— 들어보자— 하는 마음 한 줄이면 준비물은 충분하다.


왜냐? 연주가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무서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모두 우아하게 인사하고 부드럽게 웃어주길래 나보다 훨씬 더 어른일 줄 알았다. 그런데 입장과 퇴장이 확실히 정해진 공연 말고, 관객과 눈을 맞추며 소통할 수 있는 하콘이나 문화재단 프로그램에 가보시라.


아,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공연 전에는 제육볶음 맛집을 들르고, 생각보다 타이트한 시간 안에서 최선의 합을 맞춰 무대에 오른다. 무대 위에서는 완벽히 프로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마주하면 공손하고, 조금 낯가리지만 할 건 다 해주고 대답도 성실히 해주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물론 내가 인사를 나눠본 분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적어도 그분들은 우주의 기운을 다 끌어온 산신령 같은 존재가 아니라, 도전과 배움을 멈추지 않아 지나치게 멋있으면서도 (약간 내향적인) 사람들이었다. 나는 나만 낯가릴 줄 알았지?


지금은 하고 싶은 말을 멈추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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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 문장을 내가 길게 설명해야 할까? 사실 멈추지 못해 애를 먹은 적은 없다. 멈춰 본 적이 없으니까. 나는 이 숏폼 대유행의 시대에 혼자 대하 에세이를 쓰고 있다.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


지금 이 글도 결국 독후감 아닌가. 저자와 내 마음이 대응되고 있음을 왜 굳이 증명하려 드는지 나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이건 조금 저자 탓도 있다. 누가 내 마음에 그렇게 들래?


문장에 밑줄을 긋고, 페이지를 접고, 거기서도 또 문장을 컴퓨터로 옮겨 적고, 다시 색깔로 나누고, 질문으로 추려내기까지 아주—힘들었다. 어떻게든 나와 당신이 딱—맞아떨어진다는 걸 알려야만 했다. 아니, 너무 똑같잖아!


그동안 나는 관객으로서 예술을 분석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젠 창작가로서 예술을 이해하고 싶었다. :

클래식이 교양임을 어디서 체감할 수 있을까? 굳이 자리를 지정할 필요는 없다. 앞도, 뒤도, 옆도, 정중앙도—사방에서 느껴진다.


공연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미리 곡을 귀에 익혀 가는 편이 좋다. 그래야 내가 듣던 ‘음원’과 지금 눈앞의 ‘음악’이 어떻게 다른지 감지할 수 있고, 새로 알게 된 명곡을 공연장이라는 거대한 스피커 속에서 듣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공연의 순간엔 무엇을 하는가?”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무대 위 주역들의 표정과 자세를 살피느라 바쁘다고 답할 것이다. (나는 각인 수준으로 기억하느라 더 바쁘다.)


공연이 끝난 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로워진다. 마음에 든 곡이 있었다면 프로그램북에 적힌 제목을 검색해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보기도 하고, 협연자와 지휘자를 찾아보거나 동행과 후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니면 그냥 하루의 일부처럼 휙—지나가버리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그때부터가 오히려 시작이다. ‘봐야만 하는 공연’이 ‘정말 봐야 하는 공연’이 되면, 공연이 끝난 순간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기분이 든다. 써야 끝나는 게임이다. 금방 써도 또 써야 한다. (복에 겨웠다!) 미리 뭘 써 놓을 수도 없다. 영감은 절반 이상이 내 손아귀 밖에 있지 않은가.

그날 연주자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 어떤 테마가 드러나느냐에 따라 나는 하얀 자판 위에서 독수리 춤을 춘다. (새끼손가락을 잘 안 쓰는 독수리 타법이라)


시작이 가장 어렵다. 엄살 부리는 이유도 아주 가지각색이다. 너무 재밌어도 어렵고, 별 게 없어도 난감하다. 배울 점이 많으면 그만큼 난처하고, 감동이 심하면 뒷목이 당긴다. 아직 신나 죽겠는데 그걸 글로 풀어내려면 관자놀이가 지끈—미치겠다!

그럼에도 쓰다 보면 어떻게든 쓰게 된다. (뭐, 아 모르겠다?) 이쯤 되면 내가 리뷰를 쓰는 건지 탈춤을 추는 건지 헷갈린다. 다만 놓치지 않으려는 건 단 하나, 그 공연이 내게 남긴 감정의 끝자락이다.


결국 글을 쓰는 궁극적인 이유가 뭘까? 훗날의 내가 되돌아보기 위함이다. 그래서 자세히 적어야 한다.—무엇을 봤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왜 울었는지. 퍼즐을 채우듯 한 조각씩.


이쯤 되면 이건 한글로 새겨낸 그림에 가깝다. 한동안 놓았던 펜을 양손으로 이렇게나 두드리고 있으니, ‘무언가를 창작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떻게든, 어느 순간엔가 또 찾아오는 것 같다.


‘지금이야, 어서 물어봐.’ 나는 스스로를 재촉했다. 그가 싫다고 할까 봐 겁이 나서 배가 울렁거렸다. “난 늘 작가와 함께 일하고 싶었어요.” 난 그렇게 운을 뗐다. 줄리의 얼굴에 커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작품 활동을 시작하고 싶은 거예요?” 그가 진지하게, 내가 ‘네’라고 대답할 게 당연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난 늘 작가와 함께 일하고 싶었어요.” 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

클래식 공연의 묘미는 무엇일까? 우리의 스타들이 무대에서 곧장 사라지지 않고, 로비로 나와 관객에게 직접 인사를 건네 주신다. 하콘에서는 공연 뒤 와인 파티라는, 말 그대로 거대한 팬미팅의 시간까지 마련해 주신다. (이렇게 감사할 수가!)


무대에서 내려온 연주자에게 무슨 말을 건네면 좋을까? 매번 마음은 앞서간다. 음악가라면 듣고 흐뭇해할 만한—“첫 곡 2악장에선 이 부분이 너무 좋았고요, 여긴 이래서 저래서 좋았고요, 마지막 소리에선 기절할 뻔했어요”—이런 말이 술술 나올 것 같은가?


천만에. 현실의 나는 ‘와주셔서 감사해요’라는 인사 한마디에 이미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속으론 수백 마디를 재촉하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나온 건 딱 한마디. “잘 들었어요..!” (어이쿠!)


내 글을 읽어본 당신은 아시다시피, 나는 말이 많아도 너무 많지 않은가? 풀어낼 게 넘쳐나고, 또 배움이 짧다 보니 (사실 거의 없다) 구어로는 좀처럼 요약이 안 된다. 결국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잘 들었어요…!” (도망)


새로운 일을 경험할 때는 시간이 살짝 느리게 가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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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린 반대다. 나는 새로운 일을 경험하는 시간이 대체로 오후 7시 30분이나 8시, 혹은 오전 11시쯤 찾아왔다. 그런데 1시간, 2시간이 금세 흘러가 버린다. 진짜 5시간 공연해 줬으면 좋겠다! (되겠냐!)


클래식 곡을 예습할 땐 오히려 시간이 더디다. 이해가 안 되고, 난감하고, 너무 느리다. 그래서 가끔은 연주자가 부러울 때가 있다. “맨날 듣잖아” 하면서.


연습 과정에서 특정 음을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소음처럼 들린다던데, 나는 다룰 줄 모르니 그냥 궁금하기만 하다. 전에 연주자께 “연주자님은 좋으시겠다, 맨날 소리 들으시잖아요.” 하고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말한 적이 있는데,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저한텐 시끄럽기만 하죠…(웃음)”


그래, 내겐 재미지만 저들에겐 엄연한 일 아닌가. 그래도 부러운 걸 어떡하랴. 그렇다고 내가 바이올린을 잡을 수도 없고. (안 돼, 안 돼)


“맙소사아아아아아.” 줄리가 거리 풍경에 감탄하며 씩 웃었다. “이건 정말, 미쳤어요.” (…) 줄리가 갑자기 걸음을 재촉했다. 맨홀에서 증기 기둥이 솟아났고, 점멸하는 옥외 광고판이 빽빽하고 걸쭉한 안개에 파묻혀 빨강과 파랑의 섬광으로만 흐릿하게 빛났다. “저쪽으로 갈래요!” 줄리가 맨홀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보폭을 두 배로 키워 줄리를 따라잡았다. 그는 갤러리에서도 이 정도로 흥분하지 않았다. 여긴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였으나 그곳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욱하고 신비로운 운무에, 몸체 없이 맥동하는 색의 소용돌이에 갇혔다. 이 도시가 지금 이 순간, 바로 우리만을 위해 특별한 의상을 입고 눈부신 쇼를 펼치는 것만 같았다. :

모든 공연이 나에겐 “맙소사”다. 진짜 맙소사. 너무 재밌다. 잊지 말자—나는 지금 클래식 공연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다. 락 페스티벌이 아니라 클래식이다.


다시 생각해도 돌아가고 싶은 달이 많다. 언제가 제일 좋았을까? 아, 못 고르겠다. 3월도 좋았고, 작년 11월도 진짜 행복했다. 계절마다 하나씩 좋아하는 연주자를 따라 공연을 감상하는 재미가 크다.


겨울까지 지나고 나면 계절 일기를 한 번 써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첫눈이 오던 날, 거의 첫차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공연을 본 적이 있다. 너무 행복했다.


나는 진짜 가끔은 서서 듣고 싶다. 춤을 추려는 건 아니고, 좋아하는 파트가 나오면 그냥 제자리에서 몇 번 뛰기만 하고 싶다. (아무래도 앞에 암막 커튼이 필요할 것 같다.)



이제는 내 쪽에서도 할 말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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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단순했다. 그날을 잊고 싶지 않았고, 연주자에게도 작은 선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길고도 예기치 않은 나비효과로 이어질 줄은, 1월의 나는 몰랐다. 아주 사소한 계기였는데.


막상 쓰다 보니 깨달았다. 클래식 전공 지식이 많지 않아도 할 말은 얼마든지 생긴다. 애초에 화려한 음악 용어를 쓸 재간도 없고, 쓸 마음도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 들리는 대로 쓰면 된다. 아주 간단하다.


그렇게 첫 문장을 쓰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조금 수월해졌다. 연주자들이 연습의 성과를 무대 위에 올리면, 나는 나대로 그걸 해석하는 재미가 생겼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까지 와버렸다. 그러지 않은가?



내가 그동안 적잖은 돈을 써 가며 모은 물건과 옷을 더 이상 참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 어떻게 행복하기만 하겠는가. 그러나 달라진 취향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순 없을 것 같았고 그러길 원하지도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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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 되돌리기엔 한참 늦었다. 벼락처럼 “넌 사실 이게 더 취향이었어!” 하고 감전시키듯 다가오는 무언가가 아니고서는,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재미는 분명 있지만, 그만큼 대가도 크다. 늦은 귀가, 적잖은 비용, 오가는 시간. 그래도 사람마다 느끼는 ‘지금은 당장 이걸 하는 게 맞다’는 확신이 있지 않은가. 지금의 나는 바로 그 확신에 붙잡혀 있다.


그 사실이 자꾸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겨 일상을 흔든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리라 마음먹어도, 어느새 ‘예매’를 하고 있거나, 곧장 집에 가지 않고 카페로 향하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집으로 벼락같이 달려가던 원래의 나는 도대체 어디로 숨어버린 걸까. (이 글을 치고 있는 지금도 카페 안이다)


이날 나는 너무도 많이 웃었다. ‘그래, 바로 이거지!’라고 생각했다. 빵과 빗자루, 우리의 정신을 풀어헤치는 것들. :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저자도, 당신도 모르게 몰래 품어둔 약속이 있다. 책을 덮은 뒤, 결국 내 앞의 작품을 내보이겠다는 결심 말이다.


빤히—쳐다보다가, 내가 점으로 딱—딱—찍어둔 부분이 나오면 기절할 듯 ‘베히히!’ 웃어버리는 재미, 아시는가? 나는 안다. (으하하) 이건 사실 완전히 나만의 즐거움이다. 이 대응점이 마무리되고 있는 지금, 이제는 내 앞의 작품을 지켜볼 차례다. 나는 또 다른 점을 찍을 준비를 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작품을 한 시간만 보고 그칠 게 아니라, 더 오래 바라보아야 한다고. 그렇다면 이제는 내 앞의 무대와 음악을 바라볼 시간이겠다. 저자의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따라왔으니, 나도 이제 내 방식의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음—보스커 씨,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3. 디어 비앙카 보스커, 이제 내 말 좀 들어봐.

기다랗게 이어지는 보스커 씨의 현대 미술 대훈련기를 듣다 보니, 문득—나도 그에게 눈앞에 놓인 ‘현대 음악’을 들려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어쨌든 이 책을 세 번이나 읽었으니, (내 얘기 한 번쯤은 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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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9월 15일, 나만의 상주 음악가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의 리사이틀이 예정되어 있다. (음하하)


나는 임동민 연주가의 공연을 앞두고 늘 지키는 규칙이 하나 있다. 바로 마음에 담아갈 ‘한 부분’을 미리 정해두는 것! 원래는 여러 곡 중 딱 한 대목만 고르곤 했는데, 이번에는 욕심을 부렸다. 곡마다 하나씩, 전부 정해보자고 결심한 것이다. (도전!)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정말 예상치 못한 거대한 변수였다. 레퍼토리 예습하기도 벅찬 와중에, 이렇게 두터운 책을 평일 내내 읽으려니 시간을 쪼개야 했다. 그 자체가 드문 경험이었다. 지적 허영심이 아니라, 지적 허겁심 그 자체다. 어떻게든 다 먹어치우겠다는 욕심—나는 거대한 식탐쟁이가 분명하다.


자, 서론은 이쯤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15일의 레퍼토리는 무엇인가?


쉬니트케: 바이올린 소나타 1번
스트라빈스키: 디베르티멘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소나타 1번 f단조, Op.80


어떤 곡인지, 또 곡 제목 앞에 쓰인 이름들은 누구인지 잠시 짚어보자. (안 궁금한 분들은 그냥 넘어가시라. 저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이런 정보에 압도되지 말 것!)


알프레트 슈니트케(1934–1998)는 20세기 러시아의 대표적인 현대 작곡가다. 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은 1963년에 작곡되어 이듬해 모스크바에서 초연되었고, 1968년에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할 수 있는 버전으로 편곡되었다. 네 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은 1악장의 어둡고 무거운 시작, 2악장의 빠른 리듬, 3악장의 침착하고 느린 흐름, 4악장의 경쾌하고 춤추는 결말로 이어진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1882–1971)는 20세기 음악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러시아 출신의 작곡가다. 그는 1928년 차이콥스키 서거 35주년을 기념해 발레 요정의 입맞춤을 작곡했고, 이를 토대로 1932년에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디베르티멘토를 만들었다. 이 곡은 발레 장면을 따르며, 1악장은 눈보라 속 요정의 등장, 2악장은 마을 축제의 춤, 3악장은 요정의 장난, 4악장은 두 사람이 함께 추는 춤으로 구성된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1891–1953) 역시 20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다. 그는 1938년에 바이올린 소나타 1번 F단조 Op.80을 착수했으나, 전쟁으로 완성이 늦어져 1946년에야 마무리되었고 같은 해 모스크바에서 초연되었다. 작품은 1악장의 음산한 분위기, 2악장의 격렬한 전개, 3악장의 잔잔한 흐름, 4악장의 활기참으로 마무리 된다. 이 곡으로 프로코피예프는 1947년 소련의 스탈린상을 받았다.


첫 번째 곡은 7월 24일 줄라이 페스티벌에서 이미 들었던 곡이었고, 스트라빈스키는 작년 11월 하콘 무대에서, 프로코피예프는 KBS 클래식FM ‘2024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 앨범으로 자주 만났던 작품이었다.


세 곡은 내 메인 공연 레퍼토리에 있던 작품들이 아니었고, 뭔가를 찾아보고 관람하겠다는 생각조차 하기 전에 불쑥 마주쳐 버렸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처음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재회이자 첫 눈맞춤 아니던가? (꺄하하)


이번 기회에 실연의 매력과 새로운 가능성을 맛볼 수 있으니, 기대감에 어깨가 절로 으쓱거린다.


게다가 요즘 발레를 자주 본 건 아니지만, 한두 번의 관람 덕분에 스트라빈스키의 4악장 Pas de deux가 확 눈에 들어왔다. 나는 몰랐다. 정말 몰랐다! 발레리노와 발레리나가 펼치는 2인무 장면이라니. 작년만 해도 이 곡이 발레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그저 멍—하게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의 손만 바라보던 기억뿐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어쩌자고 그렇게 수동적으로 듣기만 했을까 싶다. 그땐 연주자가 날 이해시켜주겠지 하는 심보로 앉아 있었으니, 남은 기억이 거의 없다. 결국 추억이 되려면, 공연 전부터 내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사전 장치를 해두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백조의 호수를 본 뒤 차이코프스키 음원 가운데 가장 자주 들었던 곡이 다섯 번째 Pas de deux였다. 산뜻한 현악의 바람이 스쳐 지나가면, 바이올린 한 대가 솔로로 사잇길을 따라 우아하게 흘러나온다.


그 선율을 따라 두 무용수가 어여쁜 춤을 추고, 머물며 원을 그린다. 나는 이 곡에서 무용수의 손짓과 발끝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처음 알았다. 작곡가와 곡은 다르지만,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의 춤 아니던가. 이걸 어떤 모습으로 그려낼지—너무 궁금하다!


참, 아무리 생각해도 비앙카 보스커 씨 책 때문에 시간을 많이도 빼앗겼다. 도대체 왜 이렇게 재밌는 거냐. 그러니 이제 어디 한번, 나의 모든 설렘을 몽땅 그의 앞에 풀어놓아보자.


쉬니트케: 바이올린 소나타 1번

1악장

첫걸음부터 우리가 흔히 아는 안정감과는 거리가 멀다. 연주자는 이 나지막한 길을 차갑게 거닐까, 몰아붙일까? 삐걱대는 소리 끝에 치닫는 힘은 얼마나 강할까. 혹은 의외로 담담할 수도 있다. 마지막 피치카토는 어떤 얼굴로 지나갈까?


2악장

개구지게, 또 삐걱거리며 달려갈 듯하다. 강약의 균형은 어디에 실릴까? 순간 몰아치는 리듬에서는 쪼가 살아 있을까, 쾅쾅 짚으며 나아갈까. 피치카토가 가볍게 지나간 뒤엔 높은 음을 익살스럽게 흘릴까. 흐름이 불붙듯 타올라서는 어떤 속도로 내려올까.


마침내 개구진 피치카토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피아노는 혼자 춤을 추듯 둥쾅거리며 장난을 친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3악장으로 이어지겠지.


3악장

피아노가 퉁— 하고 길을 열면, 그 뒤로 높지만 낮게 노래하는 선율이 펼쳐진다. 어떤 풍경일까. 아마 평화로움일 것이다. 서서히 내려올 때는 파동이 깊게 퍼질까. 서로 다른 위치에 소릿돌을 줍듯 이어가는 순간도 있다.


그러다 갑자기 아주 높은 바람이 분다. 피리 같은, 휘파람 같은 소리. 짧고 가벼운 호흡이 피아노와 장난을 주고받는다. 찾았다. 이 곡은 이 부분이겠구나!


4악장

‘라 쿠카라차’를 얼마나 가지고 놀까? 특유의 리듬감으로, 피치카토로, 손가락 장난으로 흉내낼까. 신나게 풀어내려나?


중간에 높이 타올랐다가 곧장 내려오는 대목도 있다. 구간마다 표정이 이렇게 달라도 되나 싶을 만큼.. 진이 엄청 빠질 것같다. (나는 재밌지만) 끝에 어떻게 사라져버리려나..


스트라빈스키: 디베르티멘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1악장 — 폭풍우 치는 밤

어린 아기를 안은 엄마가 길을 잃고 헤맨다. 그런데 요정이 나타나 아이를 훔쳐 갔다고 한다.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왜 훔쳐가는 거야? (도리도리) 작년에는 이 이야기조차 모르고 들었으니, 도대체 뭘 들은 걸까.


초반에는 어떤 느낌으로 분위기를 가라앉혀 놓을까? 중후반에 활끝으로 확 짙은 음을 빠르게 몰아치는 구간이 있는데, 그 부분도 무척 궁금하다. 요새의 현이라면 더 거칠게 지직거릴지도 모르겠다. 또다시 찾아오는 고즈넉함 뒤에 얼마나 쫄깃하게 소리를 당겨낼지도 기대된다. 으악, 피치카토! (꺄)


2악장 — 약혼식 잔치

아이는 장성해 청년이 되고, 마을에는 약혼식 잔치가 열린다. 경쾌한 무도곡, 흥겨운 축제 분위기! …그런데 축제가 왜 이렇게 뒤뚱거리지? 아, 약혼식이었구나~~~~ 꺄~~ 얼마나 소리가 통통 튀어오를까?


하지만 묘하게 달콤한 분위기만은 아니다. (느낌상…) 오히려 빡빡- 달려가는 듯한 기세가 있다. 중간에 현과 활이 삐걱거리는 듯한 소리가 나다가, 곧 확! 하고 현 위를 쓸고 올라가는 특유의 ‘빡!’—재즈 같은 부분이 한두 번 나오는데, 그건 또 얼마나 힘을 실어줄까?


3악장 — 유혹

약혼 잔치 도중 요정이 나타나 청년을 홀려 방앗간으로 이끈다. 유혹이다~~~ 꺄~~~~~~~~ 어떻게 간드러지게 표현될까? 높은 음에서 내가 좋아하는 특유의 리듬감이 섞일 텐데, 얼마나 재미있을까.


갑자기 목가적으로 변할 때는 어떤 행복이 그려질까? 아—이것도 모르고 들었으니, 작년의 나는 바보였나 보다. 타올랐다가 살짝 놓아주는 이 재미, 도대체 어떨까. (ㅠ)


4악장 — 사랑의 춤

결혼식 장면의 아름다운 이인무. 청년과 그의 신부(혹은 요정)가 추는 사랑의 춤이라고 한다. 꺄~~~~~~~~~~ 이 악장은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대된다. 나는 지금 진짜 배가 부른 것 같다. 발레 공연도 보고, 그 공연에서 쓰인 곡을 이렇게 실연으로 코앞에서 듣다니—정말 배가 터질 듯하다.


어떤 춤일까? 어떤 모양일까? 혹은 넓게 그려진 분위기일 수도 있겠다. 소리가 높게 치고 올랐다가 리본처럼 길게 펼쳐지는 부분이 있는데, 아마 이 곡에선 그 대목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뒤쪽에서 갑자기 불이 붙는다. 속도감이 활활 타오르는 구간이다. (내가 봤을 때 여긴 분명 겁나 잘할 듯) 아~~~ 재밌겠다~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소나타 1번 f단조, Op.80

이 곡은 원주에서 못 들은 (나만 혼자) 천추의 한이 서린 곡이다.. 이렇게라도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1악장

첫 음이 어떨까? 그다음은? 무슨 노래를 부르려나? 얼마나 흔들릴까? 어떤 사각형을 그릴까? 어떻게 올라갔다 내려올까? 어떻게 날아오르고, 또 어떻게 내려앉을까?


2악장

얼마나 꽝꽝거릴까? 이 요란하게 파동치는 긴 선을 어떻게 가지고 놀까??? 마지막에는 어떤 느낌으로 몰아붙이려나?


3악장

내가 좋아하는 이 소리가 나를 어떤 세계로 데려다줄까? 그냥 이땐 듣기만 해야지. 그래야지!


4악장 (체통 없음 주의)

그냥 신나, 신나!!!!! 달려달려!!! 피치카토 피치카토!!! 그냥 다 신나~~~~~ 삐갹삐갹 삐굑삐굑거릴까??? —거의 나를 위한 악장이 아닌가? 너무 신나 (ㅠㅠ)


아, 영상을 보고 음원을 들으며 길을 미리 짚어보니 벌써 월요일이 기대된다. ('월요일'이 기대가 되다니!) 악보에도 책에 낙서하듯 여기저기 표시를 해뒀는데, 귀로 들을 때와 악보로 따라갈 때 좋아하는 포인트가 전혀 다르더라.


15일의 레퍼토리는 구간마다 색다른데 재밌는 표현이 넘쳐나고, 신이 나는 피치카토도 가득 쌓여 있어 점을 찍기가 너—무 어렵다. 악장마다 분위기가 달라지고, 그 안에서 연주 기법까지 눈부시게 바뀌니 어질어질하다.


그래도 이렇게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듣다가 공연장에 들어서면, 선물처럼 찾아오는 순간들이 꼭 있다. 눈앞의 바이올린이 내가 귀로는 이해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단숨에 설득해버리는 순간이다. 바로 그때, 미리 들어둔 시간들이 한꺼번에 제자리를 찾아간다.

아—정말 바빴다. 책도 보고, 예습도 하고, 공연도 가야 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저자가 말한 대로 나는 제법 잘 해낸 셈이었다. 그가 뭐라 했던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지금, 바로 이 순간, 바로 이 조명 속에서, 바로 이날, 바로 이 시각, 바로 이 투어에서 작품을 만나는 것임을 이제 여러분도 알 테다.”


그래,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했다! 그러니 보스커 씨, 부디 당신도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을 들어보시기를.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 버전 아니면 안 된다. 나 진지해) 나도 당신 말대로 일상 속에서 예술을 건졌으니, 이제는 내가 당신께 추천을 돌려드릴 차례다. (음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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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금요일 밤, 비 오는 거리를 큰 남색 장우산을 받쳐 들고 걷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침 가로등 불빛이 우산을 통과하며 맺힌 빗방울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이건가? 저자는 미술 작품뿐 아니라 길 위에서도 흩뿌려진 별가루 같은 순간들을 스스로 더듬어가며 오래도록 바라보지 않았던가. 나는 우산을 한참 올려다보다가, 그 장면을 살짝 들춰본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낯설고도 환한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장 미술관으로 달려가진 않을 것이다. 지금은 현대 음악과 친구하기에도 벅찬 때가 아니던가. 그러니, 디어 비앙카 보스커. 우리는 결국 각자의 사랑 안에서 당신이 말한 그대로,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할 땐 사치를 부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잖아요.”

이만큼이나 사치스럽게!

그렇게 사는 거다. (신난당 공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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