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임윤찬 피아노 리사이틀_리뷰

진중하다가도, 따뜻하다가도, 소년 같기도 하고, 잔잔하기도 한 이 순간에

by 유진

오늘의 기억이 지워지기 전에 그려보는 감정들

: 2024.06.17. 임윤찬 피아노 리사이틀 관람 후기



내가 익히 알던 낯가리는 소년답게 하는 둥 마는 둥 어리숙한 인사와 함께 피아노 의자에 앉아,

곧장 멘델스존의 무언가를 내리쳤다. 그때는 오늘 내가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될지 예상하지 못했다.


그냥 멀리서만 봤던 소년이, 오케스트라의 선두에서 협연하던 협연자가

오늘은 어떤 곡을 들려줄지 막연한 기대만 있었던 것 같다.

어떤 곡이든 예습을 해가야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오늘 진행될 곡들을 익혀두어 오늘의 음악을 더 마음속에 담아낼 수 있었다.


멘델스존 다음은 사계였다. 사실 초반에는 관객석의 기침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와 온전히 음악에 빠지기 어려웠지만, 그 작은 소음들마저도 사계 속에 펼쳐진 그 세계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부터는 작은 것에 너무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재치 있는 소년의 손짓이 자꾸 생각이 난다. 피아니스트마다 각자만의 연주 스타일이 있고, 제스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소년은 몸짓과 표정으로 크게 표현하기보단 음악과 그 음색, 템포로 곡마다의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템포가 빠르거나 흥겨운 리듬이면 어김없이 경주마처럼, 철없이 내달리는 소년처럼 달렸다가도, 작게 속삭였다가 장난스레 음을 튕겨냈다. 그야말로 손가락으로 음이 튕겨지고, 그 튕겨내면서 찰나의 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그 손짓은 눈을 뗄 수 없는 제스처 중 하나였다.


종달새와 관련된 곡을 칠 때는 한 명의 재즈 댄서 같았다.

피아노 건반 위로, 손가락 위로, 내려치는 팔과 다리 곳곳에 리듬이 가득했다.

그 순간마다의 모든 제스처는 잊을 수가 없다.


꽃잎이 흩날리는 봄의 정경을 보여주는 곡에서도 소년은 꽃잎처럼 음을 간지럽혔고,

그 손짓으로 음을 튕겨냈다. 눈에 담기는 그 작은 떨림. 진동.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사냥이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아는 그 소년이었다. 이백 마리는 사냥해버리겠다는 템포로 빠르게 숲을 내지르며 달리다가도, 몸을 숨기며 장난스레 소곤거리기도 하고, 사람을 들었다가 놨다가 하는 게 보통이 아니었다. 강약 조절이나 셈여림 조절이 이렇게 무서운 거라는 것을 그 순간에 느끼기 시작했다.


10월, 내가 태어난 달이었기 때문에 이상하게 이 곡에는 마음이 쓰였다.

더군다나 모든 생명이 지는 계절의 정취를 담고 있는 이 선율을 어째선지 잊을 수가 없다.

소년이 치는 10월은 내게 어째선지, 자꾸만 질문을 던져오는 것 같았다.

결국 사라지는 이 운명 속에 너는 괜찮은가? 너는 괜찮은가?

그 물음이 음을 타고 날아와 계속 내게 질문을 던졌다.


슬픔이 지나간 11월, 다시 소년이었다.

종이 달린 마차가 사정없이 내달리는 모습. 종소리가 너무나도 재미있어 사정없이 흔드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 트로이카의 종소리를 정말 있는 힘껏, “얘가 왜 이래?” 말이 절로 나오게 빛과 함께 달려오는 그 모습. 아무리 거장인들 철없는 소년의 귀여운 면모가 여기서 나왔다고 생각했다. 애기는 애기다.


12월이 왔다. 마지막 달이 와서 기쁘면서 슬펐다. 하지만 소년의 왈츠는 따뜻했다.

어째선지 내게 장난스레 미소를 지어주며 한 손을 내밀어 소년은 그 리듬을 맞춰 살짝씩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살며시 내 손을 이끌어 다락방에 숨어드는, 따뜻하게 이 계절을 마무리 해주는 그 느낌에 나는 마음 놓고 사계를 보내주었다.


진중하다가도, 따뜻하다가도, 소년 같기도 하고, 잔잔하기도 한 이 순간에 나는 행복했다.


-


이런 행복감에 어쩌면 나는 방심했던 것 같다.

다음 레퍼토리는 얼마나 흥미로울까? 정도의 즐거움에 휩싸여 그가 “누구”인지 그 순간 잊었다.

2부의 막이 오르고 그는 1부 때와 다름없는 발걸음으로 홀연히 들어와 의자에 내려앉아 첫 음을 내리쳤다.

그야말로 내리“쳤다”. 그 순간까지도 나는 그가 아직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아기 병정과 같은 당당한 그 발걸음 같은 음으로 펼쳐지는 어디서 들어보지 못한 프롬나드에 나는

당황하면서도, 역시 흥미롭다고만 생각했다. 나의 이 오만한 생각은 첫 곡인 난쟁이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내가 아는 그 난쟁이가 아니었다. 불안정한 자세로 길을 구부정하게 거니는 난쟁이가 아닌,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영역 속 심연의 걸음이 나의 발목을 붙잡고 끝없이 끌어내렸다.

대지를 진동시키는 난쟁이의 몸짓, 그건 정말 하나의 난쟁이였을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이 차게 식으면서,

눈이 점점 뜨거워지며 도저히 눈을 깜빡일 수 없었다.


다시 프롬나드. 다음 그림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나의 오만한 생각을 더욱 부끄럽게 했다. 아기 병정은 사라지고, 형용할 수 없는 “깊은 것”이 피아노를 타고 진동했다. 그의 손에서 눈을 뗄 수 없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은 매 순간 떨리고 있었다. 긴장도, 걱정도 아닌 그저 그 음 속에서 있는 그의 떨림. 피아노의 현처럼 울리는 그의 손. 그 떨림이 나를 다시 한번 무너뜨렸다.


다음 그림으로 향하는 그 “늪”과 같은 것이 나를 집어삼키기 무섭게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템포로 속주하며 아이들의 정경을 그려냈다. 그의 상상 속에서 펼쳐지는 음악은 도대체 뭘까. 그는 무엇을 그토록 그려내고 있는 걸까.


이 레파토리에서 나를 울렸던 것은 발걸음이 무거운 소를 표현한 곡이었다. 예습을 통해 내가 들었던 곡 중에서 가장 지루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런 나를 코웃음 치기라도 하듯 더 깊이, 깊은 어둠 속으로 파고 또 파고드는 발걸음으로 나를 짓밟았다. 심장이 쿵. 쿵. 내려앉는 그 느낌은 도저히 짓밟혔다는 표현 아니고선 표현할 수 없다.


이 레퍼토리의 중간부터는 어느 샌가 느껴졌다. 이 공간에는 청중도 악사도 없었다. 그저 음악이 이 공간을 유영하며 육신을 잃고 혼미해진 영혼들을 마구 괴롭히고 있었다. 그 순간을 만들어 내고 있는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홀려있는 것만 같았다.


병아리 곡의 가장 중요한 순간, 그가 가장 몰입하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에 누군가 기침을 했고, 그는 홀린 듯 그쪽을 살며시 바라본 뒤, 그가 “해야 할 일”을 하였다. 그는 그 순간 이후로 계속해서 무언가로 변신해 나갔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음유시인이었으며 난쟁이었고 바람이었고, 나비였으나 어느샌가 마귀와 같은 “인간”이 되어있었다.


분명 내가 아는 이 곡은 마녀와 관련되었다고 했는데, 그가 그려내는 것은 마녀가 아니었다. 절규 그 이상으로 피 토해내는 무언가였다. 마귀였을까? 괴물일까? 생각의 끝에 닿은 것은 결국 그가 그려내는 건 ‘인간’이 아니었을까. 신에게 저주를 받은 듯 이 운명에 피토하고 절규하며 자신을 저버린 신에게 도전하는. 그런 인간의 모습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무엇일까. 유언일까? 아니었다. 저주였나? 아니었다. 결국 그 모든 것은 예언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기법을 사용하여 피아노 건반을 쿵. 쿵. 내려치는데 도저히 남아날 정신이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그의 떨림에, 전율에, 주먹에, 손짓에, 진동에, 나는 끊임없이 짓밟혔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는 없었다. 익히 그에 대해 알려져 있듯 그는 자신을 장작으로 하여

이 음악을 위해, 이 운명을 위해, 스스로를 갈아 넣었고, 파괴하였다.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진심이 그 마음이 어떻게 가짜일 수 있을까?

연주가 끝나고 지친 듯 힘겹게 일어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애써 흘린 눈물을 지워내며 생각했다.

나는 무엇에 타오를 것인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