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 여정

2026 서울시향 니콜라이 루간스키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①

by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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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12일 오후 7시, 나는 산책을 하고 있었다.


이날 예술의전당에서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2026년 2월 정기연주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나는 그 공연이 라디오로 실시간 중계된다는 사실을, 늘 그렇듯 우연히 알게 되었다.


7시 30분이 넘도록 밖에 있었기에 아마 놓치지 않을까 싶었는데 운 좋게도 쇼팽 피아노 협주곡 1악장의 협연자가 소리를 드러내기 전에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제1번


1악장: Allegro maestoso


첫 음은 물방울은 아니고, 뾰족하지 않은 은색 브로치 같았다. 전해 오는 현악의 동굴을 닮은 소리도 또렷하다. 오늘의 협연자는 분명한데 튀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둘러싸 함께 향하고 있는 소리들의 외관이 화려하니, 두 대비가 흥미롭다.


우직한 피아노와 능숙한 오케스트라의 조합이었다. 라디오 중계를 통해, 그것도 이어폰으로 연주를 들으니 실연이라면 쉽게 놓쳤을지도 모를 아주 작은 이별 선물이 또렷하게 다가온다. 음이 사그라질 때 남는 그림자. 협연자의 음의 끝을 들어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오케스트라의 선율 끝을 음미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내 심장 어딘가가 쪼그라질 만큼 기쁜 순간이다. 또박또박 걷는 걸음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담백한 기둥을 중심으로 비장한 바람결처럼 스쳐 오는 현악의 흐름이 순간마다 엮여 있다. 서로 다른 걸음에 눈길이 머무르다 이별하는 1악장이다.


2악장: Romance – Larghetto


현악은 사무치는 안개가 되어 안쪽으로 스며온다. 튀어나오지 않고 동글게 공기 중을 감싸 안는 모양으로 관악이 기둥을 둘러싸면, 아까의 담담함이 조심스레 걸어나온다.


오늘의 화려한 아지랑이를 현악이 그려내주는 사이, 건반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으로 앞만을 바라본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 흔들릴 바람에 흩날리지 않기로 한 자그마한 결정이 지문 위에 녹아내려 있으니, 걱정도 큰 상념도, 뒤따라오는 은은한 관악의 유혹에도 멈춤이 없다.


새초롬한 기색으로 번뜩이는 현악의 생기가 와 닿아도, 오늘의 피아노는 따뜻한 숨을 고르게 만든다. 내려오는 소리 안에 큰 여파가 없으니, 잿빛 마음을 둘러안는 안개가 거기 있다.


한 번씩 오른쪽 상단 높은 곳에 작은 빛을 두어 번 박아놓을 때의 손은 어느 손이었을까. 라디오로 만나는 쇼팽은 협연자뿐 아니라 단원들의 소리도 균등하게 들리게 해준다.


유리 큐브가 몇 번을 땅 위에 구르는 소리가 있다. 좋은 기운을 대지 위에 빛먼지처럼 흘려다 놓는 무표정한 얼굴. 웃음도 울음도 짓지 못한 채, 멍울진 마음 하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3악장: Rondo – Vivace


구름 하나 없는 날, 선장의 커다란 돛이 기세 좋게 펼쳐지는 시작이다. 오늘의 쇼팽은 군더더기 없이 맑은 표정이니 건반 악기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나타난다.


재빠르게 저만치 갔다가 이리 오는 때는 또 어떤가. 부지런히 갔다가 돌아온다. 이 길이 이렇게 편안한 산책길이었나.


포근한 우유 거품 안에 있으면서도 겉선에 단단한 하얀 선을 그려놓으니, 듣는 이는 ‘쇼팽’의 또렷함을 부드럽게 음미할 수 있다. 세련되면서도 나름의 정경을 양손에 들고 우아함을 잊지 않는 천진함을, 이 협주곡이 아니고서야 만날 수 있을까.


밀고 당기듯 특정 구간을 오가는 흐름 안에서 또박거리는 발걸음을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정지’ 같은 건 없나 보다.


눈이 아린 햇살 아래 나만이 남는 순간이 있다. 피아노가 시소 위에서 장난을 타는 모습을 보니 끝자락이 다가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이렇게 평화롭게, 또 우직함을 가지고 쇼팽을 다뤄낼 수 있구나.


라디오로 듣는 박수 소리는 우중 속 타닥이는 빗기둥을 닮아 있다. 앙코르는 무엇일까. 진행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기다렸다.


앙코르 - 쇼팽, 즉흥환상곡


사뭇 다른 분위기다. 피아노 혼자가 걷는 길이기에 낮은 음의 잔향이 더 길게 남는다. 연두빛과 선홍빛 대신, 진한 보랏빛이 되어 마음 아래의 감정을 쿵쿵 두드린다.


한 손이 반복적인 노래를 그리는 사이, 다른 손은 맑은 목청으로 리듬을 이끈다. 이 순간만큼은 건반 위 손끝에서 가장 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소리가 다정한 남다름으로, 무서운 줄도 모르고 편히 걸어간다.


한 손에 맹렬함과 실크 손수건을 동시에 들었구나. 연주가의 온화함은 여기서 오는구나.


연주가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빗소리 속에서 무대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입장하는 발걸음이 쿵-쿵-쿵- 들렸다. 라디오를 들으니 이런 소리까지 선명하다.


슈만, 교향곡 제2번


1악장: Sostenuto assai — Allegro, ma non troppo


뱃고동이 하얀 조명을 내뻗으면, 어둠을 가르는 현악이 다정하게 길을 내민다. 지칠 필요도 없고 마냥 장중하지도 않아, 부담 없이 어깨를 내려놓게 하는 다정한 어른의 곁에 서 있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이 항해에 모험의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첫 출항을 앞둔 이의 설렘과, 그 앞에 놓인 긴 여정을 동시에 비춰주는 생기 있는 서사다. 폭포 위에서 올려다보기도, 아래에서 내려다보기도 하며 장난을 치는 시선이 딱 이럴까 싶은, 흥미진진함이 가득하다.


아이의 속도 모르고 구름 위에 올라앉아 먹구름인 양 무서운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한다. 이미 모든 길을 거닐어본 자의 속편한 마음으로, 앞으로 항해할 모든 길을 일러주는 듯하다.


그만 놀리라 말릴 수밖에 없다. 기어코 떠날 거면서 이렇게 광대하게 펼쳐놓고 가버리다니.


2악장: Scherzo. Allegro vivace


놀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왜 이리 서사적으로 아이를 몰아세우는지 모르겠다. 활과 현 사이에서 재치 있고 분주하게 대각선을 그려내는 사이, 관악은 그 틈을 등불처럼 메워내기도 하고, 때로는 가로등이 되어 길을 비춘다. 이 모험은 어디로 향하는 길일까.


갑자기 망원경을 들고 아스라히 내려앉는 바람은 무엇일까. 꼬마 용사가 벌써 여정을 떠난 것인가.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어른들의 시선을 묘사하는 것일까.


언제 저리 컸지. 잘 헤쳐 나가리라 믿는 마음. 그럼에도 걱정되는 건 어찌할 수 없는 것. 폭풍이 불시에 쏟아져도 어깨를 곧게 세운 발걸음이 있다. 그와 늘 함께하는 햇살이 따뜻하다.


끊임없이 응원이라도 하려는 듯 따라붙는 어른들이 든든히 받쳐 서 있다. 그 힘이 내 팔이 아플 정도로 생생하게 전해진다.


3악장: Adagio espressivo


아마 조금은 지쳤을 테지. 해가 넘어간 시간, 다리에 힘이 풀린 채 모닥불 앞 통나무에 기대 겨우 잠에 들려 하는 아이가 있다.


안개가 되고, 타닥이는 불꽃이 되어 여정을 함께하는 이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순간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오늘 밤만큼은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곁을 지키는 안온함이 된다.


무릎이 긁히고 팔꿈치가 까졌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나아가기로 한 너를, 먼 곳에서 시작된 기다란 일렁임이 조용히 안아준다. 나뭇잎을 타고 시냇물을 따라 흘러가듯.


아이가 꿈을 꾼다. 그 안에서도 멈추지 못하고 솜방울처럼 동글동글 굴러간다.


너의 꿈은 무엇이길래.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이길래. 그 말이 입술 안까지 맴돌았지만, 활의 은하수 아래 어찌 말 한마디 꺼낼 수 있을까.


4악장: Allegro molto vivace


하루의 시작보다 훨씬 힘이 가득한 순간이다. 밥을 잘 챙겨 먹고 좋은 수확을 얻고 난 뒤의 기세등등함을 떠올리면 좋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요동치는 파도가 묘사될 수 있을까.


슈만의 교향곡은 쉴 틈 없이 공간을 빼곡하게 메워낸다. 색감을 떠올리기도 전에 밀물과 썰물의 기운이 강하게 귓가에 밀려와, 강해지는 지점과 내려앉는 곳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어느새 조금 자라났구나. 장하기도 하면서 끝이 다가오는 이 시점까지 놓칠 수 없는 긴장감이 머물러 있다. 아직까지는 걱정 반 기대 반이 맞겠다.


올라갔다 내려앉는 움직임 끝에, 정돈된 안정감을 지닌 거대한 깃발들이 성문을 향해 다가온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내달린 아이의 맑은 표정. 성공을 축하하는 타악기의 울림.


끝에 와서야 알겠다.

이 우중 여정의 끝은 해피엔딩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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