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속사 As if 말고, 이하느리

[프리뷰] ‘마치’라는 단어로 만나는 작곡가 이하느리의 소리 세계

by 유진

요즘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다. 그런 바람에 작곡가 이하느리의 ‘As if…’로 시작하는 곡 제목을 보자마자, 이런— 문장 하나를 떠올리고 말았다.


As if... 접속사.
뜻은? 마치... 그런 것처럼.



3월 9일 오후 8시, 대학로 예술가의집 3층에서 열리는 제1149회 하우스콘서트는 작곡가 이하느리의 작품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으로 마련된다. 혼합 4중주, 바이올린 듀오, 혼합 6중주 편성의 다섯 곡이 연주된다. 앙상블 아인스를 중심으로 지휘 이중현, 더블베이스 조수환, 기타 안용헌, 타악 김은혜가 함께 무대에 오른다.


단어를 예문에서 볼 때는, 아, 문장 속에서 이렇게 쓰이는구나 하고 성마른 눈으로 보게 되지만, 방금 전 외운 단어가 우연히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운명처럼 눈에 띈다면? 그것을 내가 ‘마치’ 한글을 읽듯 빠르게 해독해 낸다면? 그것만큼 소소하고도 확실하게 자존감을 채워 주는 일도 없겠다.


마치… 그런 것처럼. 그 말을 머릿속으로 두세 번 곱씹은 뒤, 키보드 위 대문자 D 키캡을 손톱으로 몇 번이나 튕기며 3월 9일에 있을 작곡가 이하느리의 1149회 하우스콘서트 레퍼토리를 살폈다.


이변이 없다면 첫 곡은 Stuff #2A for Mixed Quartet (2024–2025). 그다음은 As if… III for Mixed Quartet (2025), 이어 As if…… IV for Violin Duo (2026). 네 번째는 Stuff #3 for Mixed Sextet (2025), 마지막은 As if… III (Deluxe) for Mixed Quartet (2026).


다섯 곡 모두 작곡가 이하느리의 창작곡이니 공연 날까지 잠자코 기다릴까도 싶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곡 제목을 드래그해 인터넷 검색창에 붙여 넣었다. 오, 운 좋게도 금세 그의 유튜브 채널을 찾았다.


여섯 곡이 묶인 재생 목록에서, 맨 첫 번째 ‘As if…… I’을 더블클릭했다.


과연 그의 곡은 무엇을 형용하고 있을까… 하는 가벼운 궁금증을 떠올린 채 아무 생각 없이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있다가, ‘이요오옹’ 하는 소리에 다시 불려 왔다. 기타가 타악기 연주자의 양손에 들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앞에 누워 있었다. 누워 있다고— 그 시작부터 이미 특이했다.


연주자의 왼손을 보면, 유리잔 하나가 현 위를 그야말로 오고 간다. 기타답지 못한, 내가 아는 ‘기타적인’ 소리와 빗겨난 소리가 장난스럽지 않은 얼굴로 매끈하게 내려놓아지고 있다.


오른손은 또 어떤가. 불규칙적이면서도 쾌활한 리듬을 타며 현을 긁고 있다. 이쯤에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게 연주가 맞을까? 소리를 ‘유도’하고 있는 건가?


다음 장면에서는 더 재밌어진다. 혼자 길을 가던 기타 옆에서 두 대의 어깨 위 현악기가, 활은 온데간데없이 손가락으로 외로운 아지랑이에 짧게 협주한다. 그 위로 관악기가 ‘마치’ 삐에로 모자 같은 분위기를 얹고, 이어 타악기와 현악기가 각자의 방식으로 소리를 발생시키기 시작한다.


하나의 합을 중심점으로 뭉치는 것도 아니고, 티격거리며 서로의 길을 방해하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원초적인 것보다 더 본능을 닮아 보이는 소리를,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를 묘사하는 것처럼 노래한다. 이것이 As if…… I의 1악장 ‘X-Section’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이 곡을 다 듣기도 전에 궁금증이 앞서 다음 영상으로 넘어가 보기로 했다. 차근차근보다 섣부른 욕심이 생겼다. 제목은 Hanurij Lee: As if…… III (あなたが私の話をまったく聞いていないのは明らかですよね。) (2025).



일본어로 제목이 적혀 있어 뜻이 뭘까… 하는 생각으로 재생 버튼을 누르려 했는데, 궁금해할 틈도 없이 곡이 0:00에 바로 시작되었다. 요상하면서도 짜릿한 랩을 내뱉는 듯한 관악기를 꼬마 난장이처럼 붙잡은 타악기들. 두들겨지며 탄생하는 소리들.


이상하다. 분명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면적을 통해 태어난 것들. 굳이 평범하게 표현하면 ‘특이하다’일 텐데, 오히려 듣는 내내 독특하다는 생각도, 낯설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희한한 소리라고 말하기에는, 그가 그려 놓은 소리들은 모두 ‘아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물체가 어떤 물체에 부딪치는 소리. 물방울보다 무거운 것이 물방울처럼 떨어지는 소리. 내 손만 한 시소가 아주 작게 삐걱거리는 소리. 삐뽀… 삐뽀… 장난감으로 이루어진 구급차 소리가 시소를 타고 있다.


반복적인 노크. 저 멀리서 다가오는 담백한 발자국 소리. 볼펜으로 책상에 점을 찍는 소리. 이어폰을 타고 들려오는 음표와, 지금 이 공간, 유리창 너머 구급차의 ‘위급한 소리’가 엮여든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점점 느려지고 작아지는 것들. 노트북 키캡의 ‘타닥’이는 소리까지 절묘하게 엮여들고 있음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마치 위태로운 춤사위 소리가 묘사되고 있는데, 위기가 아닌 조작된 ‘재미’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흥미롭다. 그래, 나는 이 지점에서 그의 곡에 흥미로움을 느꼈다.


아주 다분한 의도가 보이는, 사람의 숨소리 같은 것과 함께 이 곡이 끝이 났다. 끝에 다다라서야 아까 해독하지 못한 제목의 뜻이 아래쪽 본문에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신이 내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 말을 보고는 잠시 억울했던 기억이 난다. 열심히 들었는데! 아니려나?


그의 스타일에 대한 아주 간단한 힌트를 얻은 후에는 그를 조금 더 찾아보았다. 이하느리는 자신의 주요 관심사가 음악을 통해 어떤 의미를 표현하는 데 있다기보다, 악기가 지닌 가능성과 제한된 제스처를 활용해 악기 간의 음향적 관계를 탐구하는 데 있다고 전했다.


그에게는 의미보다 가능성, 개념보다 관계가 먼저인 셈이다. 이상하게 그가 추구하는 방향성을 알고 나니 알 수 없는 안정감이 느껴졌다.


이름을 가지기 전, 딱 떨어진 정형성의 규칙 안에서 놀기보다도 가장 근원적인 얼굴로. 화장기 하나 없이, 제 것들의 두드림으로 노는 시간인 건가? 정확한 다섯 가지의 이야기는 3월 9일이 되어야만 알 수 있겠지만, 아무렇게나 바닥에 나뒹구는 책 몇 가지와 책상 위 한구석을 점령하고 있는 볼펜과 형광펜들 사이에서 마음껏 제멋대로 있어도 될 것 같은, 어딘가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참으로 흥미롭다. 그의 소리가 하우스콘서트를 통해서라면 어떤 표정으로 나타나게 될까? 무척이나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일반 공연장도 아닌 마룻바닥에서, 악기의 민낯을— 몰랐던 각도의 얼굴을— 마음껏 탐해 볼 수 있다니. 익숙한 소리들의 상상치 못한 조합이라 여겼으나, 내가 생각한 것보다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인사하게 될까? 아니면 나와는 완전히 ‘불협’하는 매력으로 불쑥 나타나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를테면 내일의 방향으로 향해진 허공 쪽에 궁금증과 또 하나의 궁금증을 그려 놓다가— 문득, 언제 ‘마치’라는 단어를 썼던가? 하는 생각이 들어 지나온 글 하나를 헤집기 시작했다.


작년 여름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공연 리뷰 글 하나를 발견했는데, 하나의 글에 ‘마치’를 무려 일곱 번이나 썼다. 뭘 그리 떠올리고 싶어 했는지. 많이도 무언가를 떠올렸더라.


마치 먹방처럼, 호그와트 입학식처럼, 워터파크 속 물살처럼, 오른쪽 상단 끝 어딘가에서 출발하는 듯한 첫 음처럼. 그리고 무대 아래 동그란 원형 조명들이 마치 반딧불처럼.


2026년의 3월 하콘의 문을 열어 줄 이하느리는 우리에게 어떤 ‘처럼’을 떠올리게 만들까? 어떤 재미난 상상을 그려 내게 만들까. 기대해 봐도 좋겠다.


마치…


■ PROGRAM ■

Hanurij Lee (b.2006)

Stuff #2A for Mixed Quartet (2024-2025)
As if… III for Mixed Quartet (2025)
As if…… IV for Violin Duo (2026)
Stuff #3 for Mixed Sextet (2025)
As if… III (Deluxe) for Mixed Quartet (2026)

※프로그램은 연주자의 사정에 의해 변경될 수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뭐? 서울시향 SPO 서포터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