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반대말은 기다림일까요

[프리뷰] 2026 서울시향 얍 판 츠베덴의 말러 교향곡 6번 ‘비극적'

by 유진


기다린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나 때가 오기를 바라는 뜻이고, 오늘의 나는 말러의 교향곡 6번을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

기다림이 늘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속절없이 그때를 기다리게 되는 걸 보면 아침에 눈을 뜨는 일만큼이나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생각해 보자.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이, 어떤 때가 오기를 바라던가.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해 보자.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첫 문장이 떠오르는 순간을 기다렸고, 이 글이 끝나는 때를 기다리고 있다. 저녁이 늘 반갑지는 않지만, 오늘 하루의 끝도 기다리고 있다.


아주 살짝 멀리 가 보자. 만나기로 한 친구가 약속한 장소에 늦지 않게 당도하기를 바라는 것, 좋아하는 뮤지션의 공연 날을 디데이로 세어 가며 기다리는 것, 그리고 합격 문자가 왔을까 싶어 괜히 휴대폰 화면을 들락날락하는 것까지 모두.


참, 끝을 예측할 수 없는 기다림 앞에 놓이면 마음이 여러모로 들끓는다. 뭐든 빨리빨리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에게 이것만큼 곤혹스러운 일도 또 없겠다.


나에게도 ‘기다림’은 그다지 유쾌한 존재는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클래식’이라는 한 겹의 외투와 ‘공연장’이라는 이질적인 공간 속에서 맞닥뜨릴 때면 알 수 없는 든든함이 되어 내 곁에 머문다.


이 안에서 나는 눈앞의 연주자들이 들려줄 오늘의 연주를 기다리면 그만이었고, 등받이 의자에 기대 앉아 100분 혹은 120분 뒤에 마주할 미지의 세계라는 그늘 안에 조용히 숨어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클래식을 특정 작곡가나 이론, 역사로만 바라보기보다 곁에 두고 지내다 보니 마음속에 웅어리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걸 밖으로 꺼내 놓지 않으면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처음에는 내가 이런 글을 써도 될까 하는 물음표를 자주 내려놓곤 했다. 그러다 막상 공연 시작 시간이 다가오면 결국 ‘그냥 하자’는 작은 탄식 앞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물음표


내가 비교적 빠르게 이 장르와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때마다 글로 느낌표를 남기겠다는 목표를 세운 덕분이기도 하지만, ‘사람’에 대한 궁금증 덕분이기도 했다. 아마 명성에 걸맞은 연주가에 대한 호기심쯤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 궁금증에는 이름보다 조금 더 안쪽의 것들이 들어 있다.


이를테면 연주자가 선율 속에서 하는 아주 작은 선택이나 표정, 듀오 혹은 솔로 리사이틀일 경우 그 레퍼토리를 선택한 이유, 그 안에 담기는 개별적인 음색, 그리고 음표와 이별하는 모습까지. 악기보다도 클래식보다도, 결국 연주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내놓는 ‘대단히 알 수 없지만 듣기 좋은 이야기’에는 언제나 끌려가는 재미가 있었다.


그래, 결국 나는 끌려가는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선택’하면, 나는 그 선택에 ‘선택’되면 그만이었다.


흥미로운 은회색 구슬 같은 연주자가 현대 음악을 한다고 하면 그를 따라갔다. 이자이 전곡 연주를 한다고 하면 1번부터 6번까지 따라 들은 뒤, 눈앞에 놓인 소리를 받아 적고 내가 생각한 그대로를 쓰면 되었다. 이 공간 안에서만큼은 순순히 이끌려갈 수 있어 좋았다. 무엇이든 내가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시로 기쁨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 주는 이 공연예술 감상을 계속 이어가야겠다고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026년을 맞이한 나는 우연히 발견한 서울시립교향악단 SPO 서포터즈 12기 모집 게시글 앞에서 발길을 멈추게 되었다.


서울시립교향악단 SPO 서포터즈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때가 있지 않은가. 작년 11기 서포터즈 지원 때에는 ‘꼭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득 안고 지원했다가 선발되지 않았다는 답장을 받고 아쉬움을 삼켰다. 하지만 실내악으로 꽤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내고 난 뒤에는 되려 차분한 마음으로 지원서를 쓸 수 있었다. 지원한 사실을 잠시 잊고 있던 사이, 합격 문자가 도착했다.


자기소개서를 쓰기 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시즌 안내 페이지를 살폈다. 그리고 그 목록에서 눈에 들어온 작품이 말러 교향곡 6번이었다. 얍 판 츠베덴 음악감독과 함께하는 2026년 서울시향은 말러 사이클을 이어 가며, 그 가운데 3월 공연으로 교향곡 6번 ‘비극적’을 올린다고 했다.


시즌 안내에는 말러 교향곡 6번과 4번이 극단과 온화 사이를 오가는 걸작으로, 말러 특유의 인간적인 고뇌와 환희, 그 드라마틱한 진폭을 보여 줄 작품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열된 단어 사이에서 느껴지는 극적인 대비가 눈에 들어왔다. 둘 중 하나만 해도 심상치 않은데, 그 사이를 오가는 작품이라니. 그들이 택한 ‘빛과 그림자’라는 주제와도 꽤 잘 어울리는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원서를 발송하고 나서는 그저 바랐다. 올 한 해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기를, ‘빛과 그림자’가 그려지는 길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기꺼이 기록할 수 있기를. 감사하게도 내게 작은 입장권 하나가 주어졌다. 꽤 기뻤다.


자유



서울시향 온라인 서포터즈의 첫 번째 모임 날에는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서울시향 굿즈를 한아름 챙겨 든 채—함께 피자를 먹으러 갔다. 빨간 조명 아래 북적이는 손님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나이프로 자르기 힘들 정도로 버석해진 한 조각을 먹으며 홍보팀 팀장님께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자유롭게 해보세요.
행하신 만큼 많은 것을 얻어 가실 겁니다.

자유롭게 해보라는 말. 클래식 하면 왠지 모르게 옷을 잘 차려입어야 할 것 같고, 뭔가 배경 지식이 상당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늘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나 역시 내가 도대체 무엇을 쓰게 될지 모르는 이 미지의 세계 안에서 다시 한 번 ‘자유’를 부여받은 셈이었다. 그렇게 한 번 더 무게를 덜어냈다.


사실 클래식을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내가 바다를 이해할 수 있을지 묻는 것과 비슷한 바보 같은 질문이다. 이 세계는 영원히 내가 안을 수 없는 곳, 오로지 내가 품에 안길 수만 있는 곳이다. 나는 기꺼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침잠하고, 때로는 그 위로 솟구쳐 올라 숨을 토해내며 발버둥 친다.


그렇게 헤엄치다 보면, 나는 여전히 대양 한가운데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3월 19일과 20일에 찾아올 또 하나의 바다, 서울시향의 말러 6번 ‘비극적’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말러 교향곡 6번

말러 교향곡 6번이 어떤 곡인지 궁금해져 가장 먼저 프로그램 노트를 살폈다. 첫 문장을 두어 번 반복해 읽었다.


언제나 인정받기를 원했다.


내게는 마냥 거대해 보이던 그가, 아무것도 바랄 것 없어 보이던 그가 인정을 바랐다고? 계속해서 다음 문장을 읽었다.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의 인생은 처절함이라는 단어와 닮아 있다. 그런 그의 작품에 ‘비극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면?


아, 이 곡은 정말 비극이겠구나. 그렇게 받아들인 뒤 음원 사이트에 들어가 말러 6번의 1악장을 재생했다. 쿵. 쿵. 쿵. 쿵. 묵직한 발걸음으로 시작하길래 ‘어, 이게 비극의 시작이 맞나?’ 싶었다. 내가 떠올리던 비극은 비장하기보다 비애에 가까웠는데, 생각지도 못한 밀집된 행진이 시작되어 잠시 당황했다.


이 곡이 어떻게 흘러갈지 가늠하기 어려워 조금 더 사전 정보를 찾아보기로 했다. 월간 SPO 3월호를 내려받아 말러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읽어 보기 시작했다.


비극적

SPO매거진에 실린 프로그램 노트를 읽으며 내가 알게 된 사실은, 이 교향곡이 말러의 삶에서 비교적 안정되어 보이던 시기에 작곡되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말러는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알마 쉰들러와 결혼해 가정도 꾸린 상태였다. 겉으로 보면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삶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기에 말러는 파국으로 향하는 듯한 교향곡을 완성했다. 프로그램 노트에서는 이 작품을 말러 자신의 삶에 닥칠 비극을 예견한 음악처럼 해석해 온 시선이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고 전한다. 특히 알마 말러는 이 교향곡을 말러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이 작품을 말러가 평생 떨쳐내지 못했던 감정과 불안을 음악으로 표현한 교향곡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고 덧붙인다. 예습용 추천 음반으로는 상반된 해석을 보여 주는 레너드 번스타인과 피에르 불레즈의 녹음이 소개되었다. 두 음반의 1악장 도입부를 차례로 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번스타인의 시작은 맹렬하다. 말러의 삶과 작품에 깊이 몰두했던 그의 해석은 거의 맹목적으로 보일 만큼 앞으로 돌진한다.



반면 불레즈는 다르다. 창작자와 작품을 분리하는 입장을 취한 그는 더 신중하고 차갑다. 눈을 번뜩이기보다 차라리 감은 채 제 길을 밟는 듯한 태도가 느껴진다.



그들은 분명 같은 곡 한가운데 서 있고, 같은 악보 위에서 출발했는데도 도입부부터 향하는 길이 달랐다. 사람 한 명이 바뀌었을 뿐인데, 지휘자의 선택 안에서 우리는 이렇게 상반된 시작을 마주한다.


프로그램 노트를 더 읽다 보니 이 교향곡이 ‘비극적’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작 말러 생전에는 이 부제가 붙어 공연된 경우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 이름 역시 결국 후대의 해석 속에서 굳어진 것이라면, 이 이야기를 ‘비극’으로 받아들일지 말지도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내가 비극 안에서 희망을 발견한다면? 웃음보다 더 슬픈 기쁨을 느끼게 된다면? 무엇을 떠올리든 틀린 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거대한 교향곡 앞에서 상상할 수 있는 자유를 남겨 준다.


그렇다고 말러 교향곡 6번이 가진 어두운 긴장감을 잊을 수는 없다. 이를테면 마지막 악장에 등장하는 나무 망치의 타격. 타악기 수석 에드워드 최는 이 순간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표현했다.


지휘자 얍 판 츠베덴과 서울시향은 과연 우리를 어디로 이끌게 될까. 그들이 들려줄 말러의 ‘비극’은 파국으로 향하는 길일까, 아니면 또 다른 길의 시작일까.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아직 울리지 않은 망치 소리와 3월 19일과 20일을 기다리는 일이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들려줄지, 그리고 내가 그 선택을 따라 어디까지 가게 될지. 롯데콘서트홀에서 펼쳐질 얍 판 츠베덴과 서울시향의 말러 교향곡 6번 ‘비극적’을 기다려 보자.


■ PROGRAM ■

말러, 교향곡 제6번 ‘비극적’
Mahler, Symphony No. 6 in A minor ‘Tragic’



덧붙이며

이 글을 끝내며, SPO 서포터즈가 된 기념으로 전하는 서울시향 소식 하나. 3월 10일에는 2026 서울시향 유럽 투어 프리뷰 콘서트: 베토벤 '합창' 공연 티켓이 오픈된다. 매년 빠르게 매진되는 공연을 여름에도 만나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고,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의 협연도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예매는 3월 10일 후원회원 오전 11시, 일반 예매 오후 4시에 진행된다.


또한 3월 13일에는 '2026 서울시향 키즈 콘서트 : 클래식 음악 여행' 티켓도 오픈된다. 예매는 후원회원 오후 2시, 일반 예매 오후 4시에 진행되며 얼리버드 할인은 3월 31일까지다. 예매에 도움이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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