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26 서울시향 얍 판 츠베덴의 브루크너 교향곡 4번 ①
들어가며
언제까지나 낭만을 쫓을 수만은 없다. 그걸 알고 있기에, 괴로움을 멈출 수가 없다. 누구에게나 현실에 매이게 두고 싶지 않은 영원한 아이 하나가 있다.
우리는 그 아이의 영원한 부모이자 악연이다. 아이가 바라는 것을 누가 이루어주고 싶지 않겠냐마는, 비틀거리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팔랑거리던 때의 일마저 잘 풀리지 않고, 잘 가던 길도 쉬이 헤매게 된다.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애초에 낭만을 꿈꾸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만약과 만약 사이에서 빙글빙글, 우스운 춤을 춘다.
그런 때를 벗어나려면, 조금이라도 거리를 두려면 어찌 되었든 내가 있는 곳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한다. 몰랐던, 혹은 잊고 있었던 생각을 주워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할까. 내게 그곳이 현대음악일 때가 꽤 많다.
현대음악을 왜 듣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거대한 몰입감과 감동을 쉽게 전해주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이 곡들을 왜 굳이 듣냐고.
왜 듣겠는가. 나와 가장 닮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 원대한 포부를 가지지 못했고, 거대한 역경을 겪어보지도 못했으며, 이전의 나보다 현재의 내가 탄탄대로로 성장하지도 못했다.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싶지 않은 일, 해야 하는 일들이 다 뒤섞여 있는 매일을 스스로는 버텨내고 있다며 평하며 살고 있다.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지 않은 계획들에 자꾸 얽매인 채.
그런 매일이 소리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금세 사라질지언정 눈앞에 나타난다. 탐미하던 아름다움은 늘 멀리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나만의 염려가 이방인의 소리 속에 살아 있다. 그 광경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 이곳이었다. 아, 누구와도 동떨어져 있지 않구나. 그 생각을 하면, 이 곁을 떠날 수 없다.
존 애덤스,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
시작된다는 느낌보다도, 무언가가 일어난다는 느낌으로 소리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팔꿈치를 피는 것이 아니라, 짧은 틈에 여러 번 높이 양팔을 들어 올리는 것이다.
공중에 떠 있는 손 하나를 붙잡은 채, 그 위태로운 상태를 계속 흔들어 놓는다. 애시당초 정상과는 멀리 떨어진 상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손 하나와 가장 낮게 자리한 발 하나만큼, 그 사이의 거리감을 계속 염두에 둬야 한다.
태초부터 맞닿을 수 없는 세계의 이야기가 상층과 하단부에 양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때에 따라 맞닿아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건 같은 ‘소리’라는 이름 아래에서만 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서로 가장 가까운 곳을 끈질기게 괴롭혀대며 날아다니고 울렁거린다. 오케스트라는 땅바닥을 가만두지 않고 끊임없이 출렁거릴 것이다.
바이올린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으려는 것처럼, 어디에도 자리 잡지 못한다.
이렇게 다를 거면 왜 함께 있는가 싶다가도,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이 곡은 한 공간 안에서 끝까지 버틴다. 기꺼이 메워질 수 있으면서도 기어코 공백을 남긴다. 그 틈이 끈질기게 귀를 붙든다.
그 사실을 눈치라도 챘는지, 바이올린이 더욱 뒷모습만 보여대며 나와의 거리감을 더 벌려 나간다.
아래에서는 거친 타격감이 몰아치고, 바닥을 쓸어내는 듯한 움직임도 이어진다. 왼쪽은 이명이 되고 오른쪽은 아래로 침잠한다. 그 사이에 놓인 의자에 주저앉아 멀뚱하게 엇갈린 어우러짐을 구경했다.
소리가 얽히고설켰다. 마주 향해 보며 빙글빙글 돈다. 서로를 뚫고 또 뚫어내는데, 공격하지는 않는다.
내가 모르는 곳까지 파고들다가, 어느 순간 눈에 힘을 툭 풀어내는 때는 또 어떤가. 처연한 것이 아니라, ‘처연’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무표정한 얼굴의 구체관절 인형이 아무것도 없는 흰 공간 안에 주저앉아 있다.
2악장
내 시선 안에 인형이 있다. 인형 아래로 우주가 놓인다. 까맣고 내려앉고, 끝이 없고, 암울하지만 답답하지도 억울하지도 않다.
허공 안에만 있던 바이올린이 이제는 그림자가 되었다. 사는 동안 밝은 날보다 어두운 날이 많고, 기쁨보다 염려하는 날이 길다는 것을 아나 보다. 때마다 잊어버리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은가.
멍한 채로, 무언가를 잃어버린 채로 가만히. 애초에 뭔가를 붙잡아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처럼, 손등을 바닥으로 향하게 한 채 온몸에 힘을 푼다.
바이올린이 말하는 대로만 따라가고, 오케스트라가 데려가는 대로 끌려가면 된다. 늘어지는 것이 맞고, 나태해져야 하는 때다.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 잠가야 한다.
일말의 밝음이 이 공간을 흐리기 전에 기다란 선을 그어내 이 회색빛을 지켜내야 한다. 애써 기분 좋아 보일 필요 없이 꿋꿋하게 물러나야 한다. 그래야만 오늘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높지 않은 곳에서 떨어지는 빗방울과, 때마다 신호를 주는 타악기의 사인을 기다리면 된다. 복잡한가 싶다가도, 그 상황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으면 조금 편해진다.
소리만 따라가라. 이곳에는 지름길도, 길을 잃게 만들 풀숲도 없다. 위와 아래, 그리고 내 앞과 뒤에 일직선과 수직선만이 그려져 있다.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3악장
충분히 주저앉았는가. 내려앉았는가. 포기했는가. 만약 그러했다면, 3악장의 초입에서 반드시 몸을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눈이 일순간 번뜩이고, 정신이 바짝 차려진다. 어디로 달려 나가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 않은 채, 빠른 속도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말 것이다. 타악기가 빠른 박자로 길을 재촉한다.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잔뜩 흥이 오른 상태로 생기를 가져올 것이다. 언제까지 회색 지대의 안갯속을 걸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메마른 평야에 새파란 풀숲을 들여다 놓으려면 언제든 시간이 부족하다.
별의별 소리가 다 나타날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동물이 뛰놀고, 구름이 조립될 것이며, 나무가 자라날 것이다. 가둬져 있을 적에나 나만의 이야기지, 이곳은 세상이지 않은가.
시선을 아래가 아니라 저 지평선 너머까지 둘 줄 알아야 한다. 언제까지 자갈밭만 바라보며 살 수는 없다. 바라볼 곳은 늘 앞에 있다. 고개만 들면 된다. 잃어버렸던 모든 중심을 되찾고, 할 수 있는 만큼 잡아삼켜야 한다. 그래야 버틸 수 있다.
온갖 악기가 거칠게 헤매줄 것이고, 사방을 파헤칠 것이다. 나만이 복잡하게 사는 것이 아니며, 있지도 않은 불행을 염려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끈질기게 각인시켜줄 것이다.
소리가 모든 잡념을 떨궈내기 위해 별짓을 다해주니, 그들의 선행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브루크너, 교향곡 제4번 ‘낭만적’
1악장
존 애덤스를 지나왔기 때문에, 보다 가벼운 상태로, 보다 철없는 채로 이날의 낭만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관악기가 서서히 우리 곁에 다가올 것이다. 놀라게 할 생각은 하나도 없다.
이곳에 풍경화 하나를 들여다 놓을 것이다, 하고 다정하게 일러주는 첫째의 목소리가 있다. 신기하지 않은가. 세상이 소리가 되어 나를 만나러 온다.
늘 내가 가야만 하는 줄 알았는데. 당신에게 어떻게 하면 이 ‘다가옴’을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느끼는 그 포근함이, 무대에서 내 자리까지 밀려온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비슷할까.
더 커질 수 있으면서도 몸집을 감춘 롤러코스터를 눈에 담아본 적 있으신가. 조금 전 인사했던 사람이 또다시 찾아와 말 한마디를 건네고, 안부를 묻기도 한다. 꼭 얼굴을 보면서, 눈을 맞춘 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시시각각 거대해졌다가도, 그런 것이 있었냐는 듯 혼자 남겨진 아주 고요한 자리에서 현악기와 나누는 대화도 있다.
언제까지 이렇게 평화로울 수는 없지만, 잃어버린다고 생각만 해도 그 자체로 눈이 파르르 떨려오지만, 뭐든 되돌아오는 것이 있다고. 첫 시작의 낭만이 다시 한번 되돌아온다.
짧은 시간을 지나온 뒤 다시 만난 이 다정한 눈맞춤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경쾌함을 잊지 않는 이 깔끔한 끝인사를 어찌 쉽게 보낼 수 있을까.
2악장
1악장에서 다가왔다면, 2악장은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다. 잠잠해지는 때를 기다려왔다는 듯 바라보자. 사람이 늘 기세등등하고 거대해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자리에 앉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때로는 뒷편에서 전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일부러 거리감을 이만큼 두었으니, 우리는 이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눈으로 담아야 한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 같지는 않고, 어떤 조형물을 세워 놓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수상할 정도로 의미심장하지도 않다.
이유도 없이 가라앉아 버린 마음을 닮았다. 어찌 원인이 없을 수 있겠냐마는, 그 진짜 이유를 파헤침당하고자 이곳에 당도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냥, 그 자체로 내버려 둔 채 가만히. 그저 가만히. 그 기다림을 들었다. 그럴 만한 즐거움이 곳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3악장
아, 이제 본격적으로 즐겨볼 시간인가. 교향악의 파도를 그 자체로 들이마시기 딱 좋은 3악장이다. 짧은 숨과 넓은 곁이 주어질 것이다. 브루크너의 품 안에 있을 적에는 여러 가지 관악기의 서로 다른 내뱉음이 다채롭다.
0에서 100까지 소리가 커져가고 있는 모양새를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다. 일렁일렁, 흥미진진, 부담스럽지 않은 몰아붙임까지. 아주 깔끔하게.
4악장
길게 쉬어갈 필요 없이 분위기를 이어붙여서 관악기가 바닥선의 현악과 딱 붙은 채 몸을 움직인다. 오늘의 길잡이는 저곳에 있구나. 멀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사라질 때의 이야기와 머무는 이의 오늘이 뒤섞인다.
내밀한 감정이 중간 선상에서 몰려들어올 때에도 부드럽게 손끝을 내민다. 과장되기보다 말 없는 가사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시간이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그냥 넘어갈 단어 하나, 호흡이 긴 문장 하나 없으니 검은 잉크선을 따라 브루크너의 장편소설이 펼쳐진다.
요령을 부리겠다고 뭐 하나 뛰어넘는 구간이 없다. 지휘자의 손을 따라 작가가 새겨놓은 온갖 풍경이 묘사된다. 시시각각 어떤 그림이 타오를지 모르니 은근한 재미가 있다.
다만, 그럼에도 이곳은 ‘낭만’이 가득한 곳이라 거창한 깨달음도, 마음을 울렁이게 만드는 감정보다도, 편지 한 장을 한 손에 쥔 채 보고 싶은 이를 눈에 담아낼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줍는 대로, 펼쳐놓는 대로 소리가 따라붙는다. 저 관악이 길을 이끌어주는 줄 알았는데. 아, 내가 가장 맨 앞에 있었다. 그들이 우리 뒤를 흥겹게 따라온다. 거대한 망토가 되어, 언제든 쉬어갈 돗자리를 품에 안은 채, 나만의 작은 세계 하나를 가득 들고.
아, 이게 낭만이구나.
이렇게 도착하는 거였구나.